표절 시비에 대하여

표절 시비에 대하여

결과적으로 언젠가는 터져 나와야 할 미봉해온 고질병이 또 다시 불거진 것이다 고질병은 표절만이 아니다.


기득권을 틀어 쥐고 있는 문단의 공고한 기득권 카르텔의 우리끼리 띄워 주고 밀어주는 주례사 비평과 허명의 확대 재생산은 정치판보다 도리어 더 정치적이다. 일부 시인작가들의 명망가 의식과 중독증도 도를 넘었다. 오로지 이름 나는 데 목숨거는 부류들이 많아도 많다.


머릿수를 쥔 자가 권력을 잡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문단 권력을 쟁취하기위해 변별력도 없는 신인을 쏟아내고 받으나마나한 문학상들을 제정해 씨줄날줄을 짠다.


여간 좀 쓴다 해도 무연고자로선 서울의 소위 아는 사람 없으면 중앙문예지에 작품한편 올리는 것도 백골난망이다. 디지털 시대에 문학만은 왜 그렇게 구태가 줄줄 흘러야 하는지


작품의 상단에 이메일만 한줄 올려도 좋은 작가 엄선해 문예지들이 실어주는 시스템 도입은 왜 안 되는지는 곧 문단 내 파워 형성에 답이 있을 것이다. 21세기에도 남의 허리춤 잡고 사정해야 한 두 줄 실어주는 아날로그 방식의 보부상 문학이다.


소통 소통하지만 시인작가들이 독자를 무시하니 독자들도 시인작가를 무시하는 난독증도 점입가경. 그들만의 리그와 그들만의 소통으로 연명하고 있는 문학이 정치의 혼돈상과 난맥상에 걸핏하면 종 주먹을 들이대지만 이제 그 손가락질의 방향을 자신들에게로 향하라는 것이 독자들의 준엄한 요구다. 문단의 해괴한 논란을 계기로 환부를 파헤쳐 뜯어고치는 일대 개혁을 바란다.


윤동주, 한용운, 이육사 시인 등 기라성같은 선배 문학인들을 기리는 문학상을 제정하고 문학 애호가들을 끌어 모아 축제를 열고 있다. 하지만 정작 문단 선배들의 고결한 정신과 정실의 배격, 비타협 정신을 이어받는 덴 관심조차 없다.


그들만의 리그를 우물 안 개구리처럼 답습해오고 있는 지역문단도 오십보 백보. 창작에 혼신을 기울이기보다 선거에 관심이 더 지대하다.


표절도 문제고 더 큰 문제는 솔직하게 시인하지 못하는 작가로서의 양심의 문제지만 돈맛에 길든 출판 재벌이 제법 대중에 먹혀드는 신경숙이라는 돈줄을 붙잡고 끝도 없이 죄고 신작을 압박하고 문학상 심사권 등 당근을 주며 채근했을 것이다.


그러니 스케줄에 쫓긴 작가가 엉덩이 진드근하게 붙이고 숙성된 작품을 쓰기 어려웠을 테고 돌파구를 찾기 위해 유수의 일본 소설가의 작품을 펼쳤을 것이고 한 토막 슬쩍했을 것이다. 굳이 신경숙을 위한 변명을 하자면 집 한 채 짓는데 남의 모퉁잇돌 하나 슬쩍해 괴어놓았다고 너 앞으로 건축업 손 떼라는 건 좀 과하다.


대중의 실망과 이응준 작가 등 문단 일각의 문제 제기는 분명 만시지탄의 이유가 있지만 말이다. 한국적 현상인 몰매에는 다분히 대중들의 가학적 감정이 실려 있다.


도둑질하는 팔을 잘라버리는 함무라비 법전의 관용 없는 사회 주장과 무엇이 다른가. 왜 문학판 만은 집행 유예가 적용되지 못하는가. 이러면서도 작품 속에서 인간에 대한 무한 애정을 말할 수 있는가. 일부 작가가 대중


추수주의 문학을 곱게 보아오지 않은 심경의 일단을 드러낸 것 이라면 신경숙을 좋아하는 한 사람의 독자로서 유감이다. 신경숙 문학의 주조인 휴머니티와 인간구원이 수렁에 빠진 그를 구제하는 지푸라기가 돼야 한다.


정작 ‘엄마를 부탁해’ 같은 대중에 알려진 작품보다 TV문학관 극본 ‘새야 새야’ ‘외딴 방’ 등 주옥같은 작품들을 도매금으로 내다버리는 것은 지리멸렬의 한국 문단으로선 적지 않은 손실이다.



문학인들이 익히 문단 내외의 구태의연한 난맥상을 다 알면서도 문단 권력의 비위를 거슬려 혹시 자신에게 피해나 오지않을까 쉬쉬해온터에 문제가 백일하에 불거지니 불현 듯 자다가 일어나 남의 봉창 뜯듯 해서는 안 된다.


신경숙 개인의 문제만은 아니다. 신경숙의 소설은 일정 기간의 근신과 숙성을 통해 새로이 거듭나야 한다. 사람을 폐기 처분하기보다 이러한 몰 풍정에 이르게 된 대한민국 문단의 구태의연한 시스템부터 확 뜯어 고치는 것이 급선무다.


글/류윤모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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