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조관형의 백두대간(35.끝) 길 떠나는 자에게 길은 양식이다

(미시령 - 진부령 14.9 km)

<연재>조관형의 백두대간(35.끝) 길 떠나는 자에게 길은 양식이다

 예로부터 일엽지추(一葉知秋)라 했던가. 나뭇잎 하나 물드는 것으로도 불쑥 찾아오는 것이 가을이다. 지금이다.
 가을은 벌써 제 몸을 털어내며 황철령에서 미시령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바람도 제법 싸늘해졌고, 낙엽이 풀풀 날리는 미시령에 도착하니 달빛조차 차갑게 느껴졌다. 고갯길은 희게 빛났고 사위는 고요하다.


 그러나 그 적막 속엔 감시원들의 눈빛과 통행금지구역을 통과해야만 하는 우리와 밀고 당기는 팽팽한 긴장감이 깔려있다.
 그 탓인지 어둠도 달빛에 놀라 계곡으로 숨어버렸고, 우리는 감시원 숙소를 피해 숨소리조차 죽이며, 미시령 북쪽 상봉(1,242m)아래 달빛 그림자 속으로 몸을 재빨리 숨겼다.
 
 남설악 한계령이 눈의 고개라면 미시령은 바람과 눈의 고개다.
 내렸다하면 적설량이 한길 사람높이요, 불었다하면 살아있는 나무도 눕게 하는 강풍인지라, 그 바람에 놀란 황동규시인은 미시령에 서면 풍경조차 바람이 됨을 노래했고 평생을 설악에서 떠돌다 설악이 마주보이는 곳에 묻힌 이성선 시인은 ‘미시령노을’을 그리워했다.

 ‘풍경전체가 바람 속에 / 바람이 되어 흔들리고 / 설악산이 흔들리고 /
내 등뼈가 흔들리고 / 나는 나를 놓칠까봐 / 나를 품에 안고 마냥 허덕였다.
 (황동규 ‘미시령 큰바람’ 부분)

 ‘미시령 큰바람’을 처음 읽었을 때 가슴이 뛰듯이 설레었다.
 그리고 설악산이 풍경처럼 바람에 흔들리는 느낌과 함께 언젠가 그 바람 속에 꼭 한번 서 있고 싶었다. 그러나 산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건 젊은 날 가슴속에 오래 동안 묵혀놓았던 꿈이었다. 그 꿈을 이루기까지는 나름 오랜 세월이 흘렀다. 먹고 사는 세상사가 녹록치 않아서 일까.


그렇게 묵은 세월이 이제 지극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서야 미시령에 서게 된 것이다. 참으로 오래된 일이다. 아무튼 지금 이 자리가 한없이 기쁘다.

 나뭇잎 하나가 / 아무런 기척없이 어깨에 / 툭 내려앉는다
 내 몸에 우주가 손을 얹었다 / 너무 가볍다. 
 (이성선 시인의 ‘미시령 노을’ 전문)

 때론 나뭇잎보다도 가볍게 느껴지는 것이 우리네 삶인데, 바람이면 어떠하고 노을이면 어떠하랴, 그리고 바람이나 노을 모두, 내가 불러들이고 보낸 것이 아니다. 저들이 그냥 오고 갔을 뿐이다.
 지금 내 곁에 남아있는 것은 젊은 날, 그냥 산이 좋아 철없이 돌아다녔던 기억 뿐 인데, 이젠 젊은 날 가슴을 위로하던 바람보다 미시령 고갯마루에 걸린 노을이 더 정겹게 다가온다. 왜일까.

 미시령(彌矢嶺,825m)은 설악 남쪽 한계령(1,004m)과 함께 영동(嶺東)에서 영서(嶺西)로 통하는 큰 고개다.
그리고 미시령을 넘어서면 산세는 설악을 벗어난 금강산 지맥으로 되었으니, 미시령 아래 신라 혜공왕 때 창건된 화암사도 금강산 화암사(金剛山禾岩寺)로 불렸다.
 진부령 너머 금강산 건봉사(乾鳳寺)는 설악산 신흥사, 내설악 백담사, 양양 낙산사를 말사(末寺)로 거느렸던, 우리나라 4대 사찰중 하나로 꼽히던 거찰(巨刹)로 국란에 처했을 때마다 사명대사를 비롯한 뜻있는 승려들이 구국의 선봉장 역할을 했던 절이다.
 
 멀리 속초에서 미시령을 바라보면 하늘 한쪽이 휑하니 뚫린 모습이다.
 그런 이유로 울산바위로 가는 갈림길 1,029봉과 북쪽 상봉(1,381m)을 이어주는 미시령은  사람보다 바람이 넘나들기 좋은 고갯마루가 되었다.
 바람도 넘고 구름도 넘어가고 달그림자는 거침없이 넘어가는 데 사람은 갈 수 없단다. 상봉아래 샘터에서 목을 축이고 동해를 보니, 어둠은 지척인데 바다는 너무 멀다. 그리고 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산길은 오늘따라 새벽이 깊었는지 화암재를 지나 신선봉 암릉에 이르기까지 어둠을 구석구석 부려놓았다.

 야간산행에서 빛과 어둠은 상대적이고 보완적이다.
 빛이 밝을수록 어둠은 더 짙어진다. 어둠은 발걸음을 힘들게 하고 길을 숨겨놓는다. 오늘이 마지막 산행이라는 생각 때문인지 발자국마다 고인 어둠은 족쇄를 채우며 길을 조금씩만 내놓는다.
 ‘조심해라 진황아 목차장 좀 잡아주고...’


 산행대장 목소리에도 긴장감이 배어있다.
 진황이는 입사한지 그리 오래 되지 않은 젊은 대원이고, 목차장은 몇 해 전 안전사고로 한쪽 손을 잃은 탓으로 길이 험한 곳에서는 걱정부터 앞서는 친구다. 덩치가 좋고 힘이 좋은 진황이는 말이 없고 진중하다. 그는 대간종주 처음부터 자발적으로 대열 후미를 걸어왔다.
 맨 뒤에서 걷는다는 것은 군대에서 장거리 행군을 경험 한 사람들은 알겠지만 생각보다 힘든 일임에도 꾸준히 낙오대원을 챙겨 왔고, 차갓재 구간에선 낙오한 신입회원을 위해 자신의 구간 산행을 포기하면서 산행 후미를  챙겨 왔던 친구다.


 그런가 하면 평소에도 1개월에 한번은 장애인 목욕 돕기 등 봉사활동을 빠짐없이 참여하고 있는 그에게 그동안 내놓고 칭찬은 못했지만 마음 씀씀이가 누구보다 넉넉한 젊은이다.

 암릉 구간 탓인지 발걸음마다 후라쉬 불빛은 어둠사이로 춤을 추었고, 멀리 수평선과 맞닿은 바다 끝에서 고깃배 집어등(漁火)도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어화둥둥 내 사랑이라,’


 그 춤사위 사이로 어둠은 바다를 서서히 걷어 올렸다.
 하늘은 조금씩 색을 얻기 시작하며 구름정원을 만들었다. 검푸른 바다위로 피어난 꽃, 그건 구름이 만든 꽃이다. 그 구름 꽃 사이로 긴 줄기 햇살이 비집고 들어왔다. 새벽하늘과 바다가 만들어낸 아름다운 박명(薄明 ; 여명에서 일출  전 까지 하늘이 점점 밝아지는 상태)이다.


  빛은 하늘이 먼저 얻었지만 그 빛을 색으로 완성하는 것은 땅이다.
 그런 이유로 땅이 하늘보다 아름다운 이유가 되었으리라. 그래서 일까, 높이 있음에도 하늘이 바다를 품은 적은 없다. 그러나  바다는 언제나 하늘을 받아 주었다. 세상의 온갖 것을 ‘받아드린다‘ 하여 ’바다‘가 되었단다.


 하늘을 받아들인 바다는 마침내 하늘과 하나가 되었다. 그 만남의 끝, 수평선은 어둠에 갇혀있고, 물이 맑아 바다 속 검은 바위가 검푸른 빛으로 넘실대니 검은 호수(墨湖)가 되었는가. 강릉아래 위치한 고을은 이름조차 묵호(墨湖)다.
 
 옛사람들도 동해일출 풍경을 진귀하게 여겼던 것 같다.
송강(松江)정철은 ‘관동별곡’에서 ‘해돋이를 보려고 한 밤중에 일어났다’ 밤잠을 설치기도 했으며, 조선의 화성(畵聖)으로 알려진 겸재(謙齋)정선과 단원 김홍도(金弘道)는 ‘낙산일출’을 그림으로 남겼으며, 설악산과 인연이 깊은 한용운(韓龍雲)과 낙산일출을 최고로 쳤던 김시습(金時習)도 일출을 보러 험난한 고개를 넘어 이곳까지 왔었다고 하니, 예로부터 빼어난 일출을 만난다는 것은 어렵고도 귀한 일이 되었던 것 같다.

 

●길 떠나는 자에게 있어 길은 양식이다.
 
 신선봉(1,204m)에 오르니 드넓은 푸른 바다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멀리 속초(束草)시내도 한눈에 들어왔다. 신선봉에서 바라 본 속초는 바다를 닮아 널따란 지형이다.
 ‘산은 설악이고, 호수는 청초호와 영랑호요, 바다는 동해’라는 천혜의 자연 조건과 그리고 산과 호수, 바다를 고루 갖춘 속초는 누가 보아도 ‘남한 최고의 관광도시’임에 틀림없다.


 풍수지리로 보았을 땐 와우(臥牛)형국인지라, 속새풀을 뜯어 먹기 좋게 묶어주었다 해서 속초(束草)가 되었다는 설과 울산고을 수령이 울산바위를 자기네 바위라 우기면서 해마다 세(稅)를 요구하는 바람에 신흥사 동자승이 그럼 바위를 가져가라 대꾸하니, 울산고을 수령은 그럼 재(灰)로 꼰 새끼줄로 묶어 달라고 하자, 동자승은 속초 땅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속새로 새끼를 꼬아 묶고 불로 태웠다는 전설에서 얻어진 지명이라 했다.
 
 검푸른 바다 저 깊은 곳에 숨어있던 햇살이 서서히 제 빛깔을 찾기 시작했다. 먼 바다에서 일기 시작한 백파(白波)가 넘실대며 다가왔다. 백파가 보였다 함은 물결이 높아졌다는 뜻이다. 바다는 그렇게 조금씩 제 속살을 열어 보이며 일출을 준비하고 있었다.
 멀리 북쪽에서 불어 온 바람은 바다의 소리를 실어 나르고 있었다.
 바다 바람은 새벽 탓인지 차가웠고 낯설게 느껴졌다. 낯설다 함은 이제 우리가 걸어갈 길도 얼마 남지 않았음을 뜻하는 것이리라.

 길 떠나는 자에게 길은 양식(糧食)이다.
 이제 그 양식도 하루치 밖에 남질 않았다. 가난한 집 빈 쌀독 바닥 긁히는 소리는 크게 들리듯, 얼마 남지 않은 길에서 머뭇거리는 우리들 발길 역시 자못 심란하다. 그 많은 길 위에서 서성이며 이제 어디로 갈 것인가.  몇 개월 전부터 그런 물음에 휩싸여 있었다.
 이 길이 끝나면 무엇을 할 것인가. 그 때가면 발이 기억하는 고난을 난 다시 받아 드릴 수 있을까. 혹 또 다른 길을 걸을 수 있을까. 돌이켜보면 지난 3년여 동안, 길은 우리에게 양식이고, 희망이었다.


 때론 포기하고 주저앉고 싶을 때 마다, 우리를 붙들어 일으켜 세운 것도 길이었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발걸음을 재촉하고, 땀을 흘리고... 때론 속으로 안달했던, 그런 길이 끝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쯤해서 길이 끝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길을 걸어 본 사람은 어렴풋이나마 짐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길을 걸어간 자, 길을 닮듯, 등산화도 주인을 닮았음인가, 뒤축은 닳고 닳아 얕아졌고, 선명했던 등산복 색깔도 물이 빠져 힘도 없어 보인다. 우리들 모습도 그럴까, 눈앞에 목표가 다해 없어진 발걸음은 고단한 모습이다.
 왠지 초라한 느낌이다.


 이제 길이 끝났으니 길을 잃었음인가. 산이 낸 길은 산을 닮고, 그 길을 걸어간 사람들 또한 그 길을 닮아간다고 했다. 직선이건, 곡선이건 산 꾼들은 그 길만 있어도 부자가 된다. 그러나 길은 말이 없다. 걷는 자의 몫이다. 이제 그것도 하루치가 남았을 뿐이다. 안타깝다.

 대간령(642m), 산그늘에서 아침식사를 했다.
 또 다른 지명은 큰새이령(샛령)이다. 인제군 용대리와 고성군 도원리를 이어주는 고갯길로, 옛날에는 동해바다의 소금이나 미역 같은 해산물과 내륙의 농산물이 교환되던 고개로, 미시령과 진부령보다 통행이 잦았으나, 70년대 들어서서 미시령과 진부령이 뚫리고 난 후, 대간령은 그 흔적이 잡풀로 채워지고 있었다. 대간령은 사람들 머릿속에서도 그렇게 사라져간 길이다.

 햇살기가 없는 골바람은 차가웠다.
 턱관절이 덜덜 떨렸다. 밥이 넘어가는지 땅에 흘리는지 갑자기 기습한 추위로 성질 급한 대원들은 술부터 찾는다.
 산에서 술은 만병통치약이다. 배가아파도, 기운이 떨어져도 술을 찾는다. 경치가 좋아도, 비가 오고 바람만 불어도 술, 술을... 술은 산에서도 백약지장(百藥之長)이다. 그런 술도 술이 되는 사람이 있고 안 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술 없이도 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는 말은 산 없이도 잘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는 말과 다름 아니다.
 본래 술 못하는 산 꾼은 없다. 꼭 취한다고 해서 술꾼이 아니고 꼭 산을 잘 타서 산 꾼이 아니다. 술에 취하듯 산도 온 몸으로 몰입을 해야 한다는 말일게다.

 술이 들어간 몸은 부드러워 졌지만 암릉을 지나 병풍바위(1,058m)를 올라서기까지 숨소리는 거칠어졌다. 술과 길은 늘 대칭적이다. 마실수록 숨소리는 가빠지고... 짙푸른 동해 바다는 흰 꼬리를 넘실대며 귀여운 강아지처럼 졸졸 따라왔다. 파도는 흰 강아지 떼를 닮았다.

 이제 마지막 봉우리라며 올라서니 마산봉(1,052m)이다. 그 마산봉아래 산간마을 지명은 간성읍 토성면 흘리(屹里)다.
 한 때는 하루에 리프트 2번 타기도 힘들 정도로 호황을 누렸던 알프스 스키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화전으로 따비밭을 일구어 구황(救荒)식물이나 먹고 살았던 하늘아래 첫 산간마을이 스키장으로 개발되어 이국적인 풍경으로 변한 것이 30여 년 전 일이었으니, 아마도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되었으리라. 그런 일을 땅은 진작부터 알고 부자동네, 진부령(陳富嶺)이라 불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대간 길은 스키장이 가로막고 있다.
진부령까지는 비산비야(非山非野) 산세이니, 눈물고개(610m)라 부르는 봉우리를 넘어 진부령까지는 약4km, 십리길이다.
 기쁨이 차고 넘치면 슬픈 정만 남는다 했던가. 백두대간 이라는 대장정을 끝내고 나니 기쁨이나 성취감보다는 왠지 허탈한 느낌이 먼저 들었다. 슬픈 정이라기보다는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지만 가슴 한쪽이 헛헛하게 느껴지는 허전함은 숨길 수가 없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고개, 눈물고개를 남겨두고 있다.


 ‘눈물고개’, 대간종주를 끝냈다는 기쁨보다 그 동안 겪은 고생으로 왠지 모를 허탈감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고 해서 대간꾼들이 붙인 지명이다. 그 길 끝, 마지막 야트막한 고개가 진부령(520m)이다, 평화롭고 아늑한 느낌을 주는 한적한 시골마을 고갯마루다.

 북쪽으로는 최전선 향로봉(1,209m)이 하늘 높이 솟구쳐있다.
그곳은 더 이상 갈 수없는 민간인 통제구역이다. 그러나 분단은 슬픈 현실임에도 이미 곰삭은 일이 되어버렸는지 가슴으로 별다른 감흥이 일지 않는다.
 왜 그럴까. 왜 감동을 잃어 버렸는가. 산행이 끝나서인가. 아니면 길은 있되 길이 막혀 가지 못함인가. 몸은 아직 길을 원한다.
 더 갈수 있다고... 더 걸을 수 있다고 고집을 부린다. 그러나 이젠 길을 놓아줘야 한다. 길도 쉬게 하고 싶다.


 그리고 대간산행을 끝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글쎄 아직은 잘 모르겠다.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어떤 형태든지 느낌이 전해 올 것이다. 아마 당분간은 ‘백두대간 증후군‘에 시달릴 것 같다.
 무슨 계획을 세울 때면  버릇처럼 대간종주일정을 가장 먼저 입에 올리던 버릇이 따라붙을 것 같다. 그리고 얼마쯤 더 지나면 ’그때 종주하길 잘했다‘ 안도하며 그 능선을 바라보며 느낌을 얘기 할 것이다.
 우선 지금 이 기분을 명쾌하게 정리해줄 단어가 떠올랐다.
 ‘그냥 시원하고 섭섭하다.’ 시 원 섭 섭.....

 이젠 지친 등에 정들었던 낡은 배낭을 벗어놓고, 눈에 띄게 휘어버린 지팡이도, 절룩이는 걸음도 쉬게 하고 싶다. 그리고 백두대간을 걸었던 마음가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가자는 무언의 다짐도 했다.

 길은 있으되 갈수가 없다. 아- 이제 진정 끝이련가. (08. 11.14)

 
●계절은 저 혼자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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