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조관형의 백두대간(34-2) -백담사(白潭寺)는 만해(萬海)를 얻었고...

(한계령 - 미시령 (2) 22.4 km)
사실 대간산행의 대미(大尾)는 설악산이다.
한계령에서 미시령으로 이어지는 주능선 길은 이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비경이 구석구석 숨어있는 설악의 정수(精髓)요, 대간산행의 백미(白媚)이다.
3년 전, 종주산행 첫날 일출은 지리산 연하천에서 맞이했었고, 대미를 장식하는 일몰은 엊저녁 설악 대청봉에서 마주했다.
지리산 일출로 시작한 대간 산행은 그 대미를 설악산 대청봉에서 그것도 장엄한 일몰로 마감하게 되었으니, 우연치고는 대단한 행운이요, 우리는 적어도 하늘이 허락한 일이라고 믿고 싶다. 우연은 언제나 필연을 동반한다 했던가.
기상은 새벽3시라 했다. 눈을 뜨니 03시10분전, 몸은 밤새도록 시계가 되어 지키고 있었다. 낮고 힘 있는 목소리로 동해- 동해- 바다를 불렀다. 동해바다를 불렀더니 대원들이 하나 둘 일어났다.(‘동해’는 필자가 재직했던 회사이름이다.)
문밖을 나서니 대청봉위로 초롱초롱 빛나는 별빛이 가득 했다.
대청봉 정상에는 벌써 몇 개의 불빛이 움직이고 있었다. 갈 길이 먼 우리도 떠나야 할 시각이 된 것이다. 하룻밤을 묵었다고 산장은 아늑한 느낌이다.
길은 낯설지가 않았다. 몇 해 전 적설기에 천불동계곡으로 올라왔던 기억이 희미한데... 어둠이 잔뜩 웅크리고 있는 길을 따라 희운각으로 하산하길 2시간여, 두런두런 물소리가 들려오는 희운각 산장에 도착하니 날이 밝아오며 새벽 5시를 가르친다.
멀리 공제선상에 어둠이 걷히면서, 희운각 산장 계곡은 등산객들로 왁자지껄 시골장터로 변해 버렸다. 갈 길은 다르지만 목적이 같으니, 표정들이 모두 밝다. 서울과 경기, 경상도와 내 고향 충청도 말씨도 가끔 들려왔다.
산 꾼들이 하는 얘기란 것이 대부분 대청이니 중청, 미시령등 하나같이 산 얘기 같은데 물소리와 섞여 잘 들리지는 않지만 모두 즐거운 표정들이다.
새벽같이 내려 온 거리만큼 이제 공룡능선을 타고 다시 올라가야 한다.
몸이 생각보다 무겁게 느껴진다. 길은 오르막 외길, 무너미고개(1,080m)를 넘어 1시간 가까이 땀을 쏟고, 신선암에 오르니, 산은 역시 설악산이라는 말이 나올 만한 선경(仙境)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천화대 우측으로 우뚝 솟은 범봉과 이름 모를 산봉우리들, 그리고 그 아래 계곡과 계곡사이로 피어오르는 안개는 제 몸을 풀어 한 폭의 거대한 산수화를 그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눈앞에서 펼쳐지는 한 폭의 진경산수다.
지금 눈앞에 펼쳐지는 절경에 모두들 할 말을 잃고 만다.
정조 때 산야인(山野人)으로 불렸던 선비 정범조(丁範祖)는 설악 산유기(山遊記)에서 ‘하늘과 땅 사이를 채운 것은 모두 산이라(而塞天地階山也),’ 눈길마다 산이요, 깊은 계곡이며 그 위로는 하늘이라 했다.
예로부터 절경은 노래(詩)가 되지 않는다. 대원들은 모두 그 선경에 넋을 잃고 그냥 바라 볼 뿐이다. 그 아름다운 절경을 표현해야 할 언어가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이럴 땐 조용히 신음처럼 읊조리는 감탄사가 있다.
아- 그리고 .....!
차마 ‘글로는 다 할 수 없고 그림으로도 얻을 수 없다(書不塵 畵不得)’ 했던 조선조 선비들의 금강산 탐승기 한 구절을 지금 설악풍경에 차용하고 싶어진다. 이보다 더 이상 절실한 표현이 어디 있겠는가.
능선 남쪽에 자리 잡은 봉정암(峰頂菴, 1,244m))은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절이다.
택리지에도 설악산 높이의 9부 능선쯤에 있어(菴號鳳頂,高得雪嶽十之九), 풍수가들이 말하는 앞쪽의 모든 산들이 우러러 받드는 비봉포란형(飛鳳抱卵形) 산세다.
그리고 백담사에서 수렴동 계곡이나 오세암을 거쳐 봉정암에 이르는 10여 km 산길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례자의 길로 알려진 스페인 북부 산티아고 대성당에 이르는 ‘사도 야곱의 길’(산티아고 순례길)과 같이, 이 땅의 불자들이 평생에 한번은 무릎으로 기어서라도 가고 싶어 하는 ‘봉정암 순례의 길’이다.
물론 거리상으로 보면 비교가 될 수 없겠지만 실제로 할머니들이 무릎으로 기다시피 오르는 모습을 본 사람은, 저토록 간절한 기도이니 부처님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고... 입을 모은다. 어쩌면 그런 간절함이 기도의 본래 모습이었으리라.
특히 봉정암 부처님 불뇌사리보탑은 봉황새 정수리에 해당되는 명당 터에 노승이 목탁을 치며 예불 드리는 노승예불(老僧禮佛) 형세인지라, 간절한 소원 하나는 꼭 이뤄진다고 알려진 ‘소문난 기도처‘로 지금도 주말이면 1천 여 명의 참배객이 올라와 기도를 올리는 곳이기도 하다.
●용아장성(龍牙長城) 용이 공룡을 타고 넘을 듯한 형세
그 아래 내설악이 숨겨 놓은 비경, 용아장성(龍牙長城)은 마치 용이 공룡을 타고 넘을 듯한 형세와 그 생김새가 기기묘묘하고 칼날 같은 암릉을 넘어야 하는 난코스로 잊을만하면 한 번씩 발생하는 추락사고 때문에 몇 해 전부터 아예 출입이 금지된 코스다.
용아장성 남쪽으로 하늘금을 긋고 있는 능선은 서북릉이다. 그 서북릉 발치로 흐르는 구곡담 물길이 수렴동계곡을 빠져 나오면서 오세암 아래 가야동계곡과 합류하며, 잔도(棧道)를 안고 돌고(抱回), 업고 돌아가니(負回), 담(潭)과 소(沼)가 100여개, 그 백 번째 연못 자리에 세웠다는 백담사까지는 물길만도 30여리가 되는 계곡이다.
그 물길이 장수대를 지나 한계천으로 흐르는 물소리를 듣고 세조와 정치적인 뜻을 달리한 설잠 김시습은 ‘목메어 우는 한계의 물아 빈산을 밤낮 흐르나’ 오열탄(嗚咽灘)이라 탄식을 했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 설잠 김시습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소리 내어 통곡을 했으며, 허균의 스승 이달(李達)은 술을 마셨고, 천하 명기(名妓) 황진이도 어쩌지 못한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은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는 그들은 이 땅의 방외인(方外人)들이었다.
대청봉에서 서북쪽으로 장쾌하게 뻗어나간 공룡릉은 용아릉보다 거대한 산세임에도 코스가 수월해서 거리는 오히려 짧게 느껴졌다. 수월하다함은 발걸음은 더 무거워졌지만, 산 아래 펼쳐진 절경에 몸은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는 뜻이리라.
●천변만화하는 공룡능선의 자태
아침 8시에 희운각을 출발, 4시간여 만에 공룡능선 끝자락인 나한봉(1,260m)에 올라 돌아보니 어제부터 걸어 온 설악능선들이 한눈으로 조망되었다.
눈앞에 펼쳐진 공룡능선 모습에 쉽게 발길을 떼지 못하는 대원들을 마냥 채근 할 수는 없었다. 몇 번이다 바라보며 조금만 더 더...감탄을 연발한다. 두 번 다시 못 볼 것 같은 설악의 진경을 오랫동안 기억해두고 싶어 하는 모습들이다. 그럴 때마다 발아래 천 길 낭떠러지에 오금이 저려온다.
자연도 사람을 닮았음인가. 아름다움은 언제나 위험하다.
멀리 서북릉이 거대하고 직선적인 남성상이라면 공룡은 기기묘묘한 부드러운 여성상이다. 발아래 용아장성을 아기자기한 여성상으로 본다면, 공룡릉은 우람한 근육질의 남성상이다. 볼수록 절묘한 대칭미를 보여주는 설악의 봉우리들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신선암에서 1,275봉을 지나 나한봉(1,260m), 마등령(1,230m)까지 줄 곳 암릉으로 이어지는 공룡능선은 ‘봉우리 위로 줄지어 솟은 바위 빛깔이 모두 눈빛이라‘ 설악(雪岳)으로 불렸으리라. 그 선경(仙境)에 눈길을 주며 걷다보니 공룡능선 끝자락인 마등령까지는 4시간이 언제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코스가 짧게 느껴졌다. 그렇게 자연이 베푼 아름다운 풍광은 힘들게만 느껴지는 세상사도 잠시 내려놓고 쉬었다 가라 한다.
마등령에 도착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지친 몸은 달랬다.
오세암 1.4km, 안내판 화살표가 눈에 들어온다. 오세암(五歲菴)! 꼭 한번 가보고 싶었던 암자였는데... 이번에도 시간이 없다.
5살 된 어린 조카를 홀로 두고 탁발 갔던 설정선사(雪淨大師)의 전설이 지금도 폭설이 내리면, 눈 속에 갇힌 오세암의 관음설화를 세상 밖으로 불러내곤 한다.
당시 ‘오세(五歲)’는 신동이나 천재의 별칭이었다.
5세 신동(五歲神童)으로 어릴 적부터 세종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던 매월당 김시습(金時習)은 삼각산에서 과거 공부를 하던 중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했다는 소식에 책을 불살라버리고,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하여 노량진에 묻어 준 후 ‘설잠’이라는 승려로, 이곳에 잠시 몸을 의탁했던 절이다.
그리고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육당 최남선(崔南善)이 지조를 버리고 일제에 아부를 하자, 그 집 앞에서 거적을 깔고 곡(哭)을 하며, 버젓이 살아있는 육당(六堂)의 장사를 치러버린, 만해 한용운(韓龍雲)이 젊은 날 일경(日警)에 쫒기다 불목하니로 잠시 칩거했던 절이기도 하다.
‘아 - 사랑하는 나의님은 갔습니다.’/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중략)/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 아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얏습니다./
젊은 시절 한 때는 동학에 가담하기도 했고, 출가 후 백담사에 머물면서 설악을 두루 다녀 본 만해(萬海)는 ‘조선 땅덩어리가 하나의 감옥인데 어찌 불 땐 방에서 편히 살겠느냐’, 차가운 얼음 같은 기개를 꺾지 않던 그를 두고 위당 정인보(鄭寅普)는 ‘인도에는 간디가 있고 조선에는 만해가 있다’ 했으며, 벽초 홍명희(洪命憙)는 7,000 명의 승려를 합해도 만해 한 사람을 당해내지 못한다 했으니, 만해는 불굴의 기개로 백담사(白潭寺)를 얻었고, 절(寺)이 하는 말(詩)로 백담사를 빛낸 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백담사와 더불어 한 편의 시가 되어 설악에 남게 되었다.
만해는 유일하게 일제 앞에서도 드러내놓고 독립운동을 한 승려였다.
설악은 다시 마등령(1,230m)에서 서서히 몸을 일으켜 황철봉(1,318m)을 용트림해 놓았고, 오른쪽으로는 하늘이 허락하지 않은 계곡, 천불동(天不洞)으로 내려가는 길이며, 멀리 검푸른 빛 바다를 등에 업은 커다란 바위는 조물주가 금강산에 1만2천봉을 모아 천하 경승지를 만든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으로 가다 낙오하여 산이 된 울산바위가 석양에 잠겨있다.
그러나 이는 호사가들이 지어낸 전설일 뿐, 울산바위 옛 이름은 설악을 울타리처럼 둘러 쳐진 산이란 뜻의 이산(離山)이다. 또 다른 일설로는 설악산에 천둥이 치면, 그 소리가 울산바위에 부딪혀 마치 울부짖는 듯 소리 내어 울었다하여, ‘울산‘ 또는 ‘천후산(天吼山)’이라 불렸다.
예로부터 ‘울부짖듯 소리 내어 울었다’는 산이 울산바위이다.
오늘처럼 이렇게 설악에 올라 검푸른 동해바다를 바라보니 그 풍광 탓인가. 산 아래 두고 온 세상살이 때문인가. 산다는 것이 이런 것은 아니다 싶어 왠지 가슴이 먹먹해진다. 이럴 땐 한바탕 큰소리를 질러대고 싶어진다.
1780년 여름, 건륭황제 만수절(70세) 축하 사절로 삼종형 박명원을 따라 처음으로 연행길에 올랐던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도 마치 망망대해와도 같은 요동벌 앞에서 큰소리로 외치고 싶었던 것일까.
강은 천리가 안 되고, 들판도 백리가 안 되는(江不千里, 野不百里) 답답한 조선 땅에 묻혀 살다가 산해관까지는 무려 1천2백리, 아득히 펼쳐진 드넓은 요동벌을 본 순간, 번쩍하는 섬광처럼 찾아 온 것이 ‘크게 한 번 울어보고 싶은 울음 터, 호곡장(號哭場)’이다.
‘아- 참 좋은 울음 터(號哭場)로다. 가히 한번 울 만하구나(可以哭矣)!’.
곁에 있던 정진사가 웬 울음타령이냐, 퉁을 주니 ‘내 오늘에야 알았다. 인생이란 본시 아무런 의탁함이 없이, 다만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떠도는 존재인데, 요동벌이야 말로 크게 한 번 통곡할 만한 곳’이라는 호곡장론(號哭場論)을 남겼던 것이다. 그건 존재론적 울음(哭)이다.
우리도 3년이라는 세월을 걸어왔다. 물론 어려움도, 숱한 포기를 생각도 했다. 그런 고생 끝에 마주한 풍경이라서 그런 느낌이 들었던가.
결코 짧지 않는 시간동안 정직하게 걸어서 방금 도착한 곳이 설악 대청봉이다. 한바탕 큰소리로 외쳐대고 싶어진다.
‘큰소리로 외치긴 산이 좋고 울기는 바다가 좋다!’
거대한 산처럼 파도로 넘실대는 동해바다는 그 자체가 호곡장(好哭場)이었다. 그건 외침도, 호곡도, 탄식도 아닌 오직 살아있다는 고독한 외침 일 뿐이다. 그래 금강산까지는 가야한다. 저렇게 홀로 떨어진 울산바위 같은 외로움이 내게 손을 내민 것이다.
천리 길에는 눈썹조차 짐이 된다 했던가. 몸은 지칠 대로 지쳤으니, 차라리 울산바위처럼 이대로 주저앉고 싶다. 벌써 15시간 이상 계속된 산행에 몸은 더 이상 못가겠다며, 어린애처럼 어리광을 피우고 싶어 한다.
금방이라도 쓰러져 일어나지 못할 것 같지만, 지금 이 순간 숨 쉬고 있다는 것, 그리고 길은 다시 걸어가야 한다는 것, 그것만이 진실이다.
그렇게 혼신을 다해 저항령을 지나 황철봉을 오르고 있지만, 어찌 보면 길이란 결국 자신과의 정직한 만남이 아닌가 싶다.
거기에는 가쁘게 몰아쉬는 호흡과 지친 걸음, 그리고 끝내 마주 한 것은 산이 아닌 자신임을 확인 해주는 만남이 있을 뿐, 그 외엔 아무것도 아니다. 길에서 얻은 고통은 또 다른 길을 깨우쳐 준다.
그런 의미에서 산행이란 마치 순례와도 같이 처음 길을 떠났던 곳, 결국은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길이 아닌가 싶다. 다른 어떤 생각이나 감정조차 끼어 들 수 없는 진실 된 한 순간, 산 꾼들은 자신이 그런 순간에 몰입(flow)했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필연적인 무상의 고통을 감내하는 사람들이다.
다만 걷었을 뿐인데... 적어도 그들은 이렇게 걷는 동안만큼은 마음속으로라도 죄를 짓지 않았다는, 치열한 명상이 주는 ‘기쁨’을 즐기는 사람들이다.
그건 아주 오래 묵혀 둔 기쁨이다.
●멀리 울산바위가 석양에 잠겨있다.
그러나 황철봉은 남한 최대 너덜구간을 펼쳐 놓으면서, 이제부터는 네발로 가라 한다. 입에서 단내가 난다. 물은 이미 떨어진지 오래... 어제부터 암릉과 너덜지대에서 시달린 무릎이 통증을 호소해온다.
발걸음은 떨어지지 않고 다리는 후들거린다. 황철봉 내리막 길 너덜지대는 엉금엉금 기다시피 엉덩이를 끌며 내려와야 했다.
‘우릴 짓누르고 있는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 몸은 끝없이 가벼워지길 원하고 / 삶이 지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 우리의 영혼은 무거워지길 원한다.’
왜 그래야 했을까.
대간산행 때마다 산행을 핑계로 자신에게 왜 그토록 가혹해야 했는지, 거칠고 힘든 길에서도 등짐이 무겁지 않았으며, 오히려 은근히 그 고통을 즐기기까지 했던 기억들이 아직도 새롭다.
그리고 산에서 겪는 고난은 단순한 고통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고통을 겪었다는 것 하나만으로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과도 소통이 되었기 때문에 산은 관념이 되었고 길은 현실이었다.
이제 설악을 오르고 대간종주를 끝냈다는 느낌 때문인지, 이 순간만큼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얘기한 밀란 쿤데라의 말을 믿고 싶다.
뒤돌아보면 지난 3년여 동안, 힘듦을 마다않고 우직하게 걸어왔다.
그러나 이제 모두 끝이다. 대간 종주를 마쳤다는 느낌하나로 모든 것이 완결되었다는 것 보다는 이상하리만큼 허전함이 앞선다. 대신 몸은 가쁜 해졌다, 예전처럼 배낭이 등짐을 붙잡고 늘어지지 않는다. 홀가분하다는 표현이 맞다, 마치 대간종주라는 무거운 화두(話頭) 하나를 내려놓는 기분이다.
그래서일까. 오늘따라 한결 가벼워진 영혼을 짊어지고 미시령을 내려서니 저녁노을은 서쪽 하늘로 한껏 기울어 있었다.
이제 진정 대간은 끝 이련가.(08. 9.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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