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조관형의 백두대간 33 -아- 가을바람에 쓰러지는 술병처럼
(조침령 - 한계령 21.4km)

살면서 어떻게 살아야 잘산다는 소릴 들으며 사는 것일까.
명나라 문인이자 화가인 동기창(董基昌)은 그의 저서 화선실수필(畵禪室隨筆)에서 ‘만권의 책을 읽고(讀萬卷書), 만 리 먼 길을 떠나는(行萬里路)것으로 흉중의 진탁(塵濁)을 씻어버리라’, 인생을 잘 살아가는 방법으로 독서와 여행을 즐겨하라 했다.
그리고 ‘만권의 책을 읽는(讀萬卷書)것은 만 리 먼 길을 떠나는 것보다 못하니(不如行萬里路)‘ 길부터 먼저 떠날 것을 권하기도 했다.
근래 중국 루쉰 문학상을 받은 한사오궁(韓少功)도 수상작, 산남수북(山南水北)에서 노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살던 도연명(陶淵明)의 모습- ‘맑은 날엔 부지런히 농사를 짓고 비오는 날은 책을 읽고(晴耕雨讀)’- 과 최근에 다시 각광을 받고 있는 미국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처럼 자연과 함께 살 것을 권하기도 했다.
혹자는 시(詩) 서(書), 화(畵)를 가까이 하며, 모진 추위에도 향기를 팔지 않는 매화를 곁에 두고, 살아가는 일에서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으니(上善若水), 자기 길을 가면서 늘 낮은 곳에 머무는 물처럼 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혹 살아가는 의미가 무엇이냐는 물음에 어떤 대답을 해야 하나. 분명한 것은 ‘아직 모르겠다(不知)’ 이다.
최근 동양철학 칼럼으로 널리 알려진 조용헌교수는 ‘나무이름 100가지와 꽃 이름 100가지를 아는 사람도 잘 사는 인생’이라 했다,
그렇다면 점봉산을 걸어보라 권하고 싶다.
점봉산은 우리나라 최대 야생화 군락지이다. 한반도 자생식물의 남, 북방 한계선이 맞닿는 곳으로, 자생종 식물 850여 종이 서식하고 있어, 산림청에선 천연림보호구역으로 설정했고, 세계 유네스코는 설악산과 함께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했다. 점봉산 곰배령 주변의 꽃과 나무만 잘 살펴보아도 100 여 가지 꽃과 나무를 한자리서 익힐 수 있는 소중한 산이다.
조침령에서 점봉산을 넘어 한계령까지는 60여리 길이다.
먼 거리는 아니지만 위치를 놓고 보면, 강원도에서 오지 중 오지인 인제군을 경유하는 구간인 만큼 산이 높고 골은 깊어, 교통이 불편했던 시절에는 자연스레 외지와 격리된 첩첩산중이었으리라.
‘인제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네-’
오죽했으면 이런 산골에서는 답답하고 원통해서 살 수 없다고, 엊그제 고개 넘어 시집 온 새색시도 낭군 몰래 눈물을 흘렸고, 갓 전입 온 신병도 세평 남짓 한 하늘을 보며 눈물짓던 곳이 인제, 원통이다.
지도상으로 보면 인제군 북쪽으로는 철책 선으로 가로막혀 더 이상 갈 수 없다. 해발1000m가 되는 산이 96개나 있고, 800m급은 무려 200여개가 된다하니 눈을 들어 하늘이 아니라 산을 보라는, 강원도 최북단 산림지대다.
그러나 인제는 이제 이 땅에 남은 마지막 청정지역으로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옛날의 인제가 아니라 ‘인제(이제)가면 좋을시고, 원통해서(그 동안 푸대접 받은 것이 억울하니) 살아 보자’, 신명 난 고장이 된 것이다
밤을 도와 달려 조침령 고갯마루에 도착한 시각이 새벽3시, 깊은 산 계곡의 기운은 여름임에도 냉기가 서려있어 차가웠다.
마치 초가을 날씨 같았다. 그리고 오늘이 말복(末伏)임을 고려하면 한 낮에는 불볕더위가 될 터인데... 산행 출발 약1시간여 만에 인제 양수발전저수지 상부 능선을 지났고, 다시 1시간을 걸어 1,136봉 안부에 도착했다.
산행속도가 생각보다 빨랐다. 걸음이 빠른 만큼 한 밤중임에도 허기가 밀려왔다.
멀리 운무(雲霧)에 잠긴 동해바다 위로 붉은 기운이 퍼지기 시작했다.
바다는 실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출은 구름에 갇히고, 울창한 숲은 바다를 가로 막는다. 우리는 이른 새벽 풍경이 숲으로 가로막힌 능선 길을 걷는 것으로 위로를 받아야 했다. 여름 새벽은 깊지가 않다.
얼마쯤 걸었을까, 편안한 안부에 등산객들이 서성이는 모습이 보였다.
우락부락한 눈방울이 툭 튀어나온 장승도 보이고... 단목령인가. 단단하기가 귀신도 맞으면 죽는다는 박달나무(檀)가 많아 박달령이다.
시계를 보니 아침 6시 30분, 허기가 물밀듯 엄습해온다. 물부터 들이켰다. 꺼내기가 귀찮아서 그냥 걸었지만 몸은 밤새도록 물을 찾고 있었다. 이런 때 일수록 반응이 빠른 쪽은 몸이다.
산행시간이 길어지고 코스가 험해질수록 몸은 정직하고 단순해진다.
동물적인 속성을 갖고 있는 몸은 마음과는 달리 반응 또한 본능에 충실하게 된다. 마음에는 몸처럼 본능적으로 자신을 제어하는 자동제어 장치가 없다. 쉽게 말해서 기분만 좋다면 금방 후회 할 일도, 아싸! 하며 갈 때 까지 가는 것이 마음의 모습이다.
때문에 깨달음은 항상 뒤늦게 오고, 그 깨달음의 꼬리를 잡고 따라오는 것은 후회라는 놈이다. 참 어리석은 것이 마음이다. 그러나 몸은 힘이 들면 본인의지와는 상관없이 야멸차게 거부하는 배짱도 있다.
감시원 눈을 피하느라 칠흑같이 어둔 밤에 위험한 점봉산 암릉을 통과해서 왔다는 서울 팀을 만났다.
‘한계령에서 새벽1시에 출발했거든요.’
그들은 한계령에서 이곳 단목령까지 밤새도록 뛰다시피 도망쳐 왔단다.
코스가 위험한 점봉산 암릉 구간은 험로인지라, 야간 산행은 어찌 보면 목숨을 담보하는 일이 될 수도 있는데, 이 땅을 두고 어느 곳으로 도망 왔다는 말인가.
어느 시절엔 독도도 함부로 못 가게 하다 우스운 꼴 당하더니... 어찌 되었던 이곳도 아침에 산림청 감시원이 오면 입 싸움을 해야 한다며 빨리 자리를 뜨라한다. 감시도 이중으로 한다는 말인가. 더 이상 투덜대지 말자, 공연히 내 입버릇만 나빠진다. 그냥 지나가면 된다.
그들은 대간 길에서 스스로 도망자가 된 증거라도 남기려는 듯, 프랑카드를 들고 온 서울 팀이 기념촬영을 해달란다.
‘익스트림 산행, 한계령 - 대관령구간, 84.2km 돌파‘
익스트림은 무엇이고 돌파는 또 무슨 말인가.
극한상황으로의 몰입이 ‘익스트림’이라면, 군사작전 같은 용어인데 국립공원 관리법에 쫓기고, 스스로를 극한상황으로 몰아넣고... 결국 산행은 어느 사이 시간과 거리에 멱살을 잡히고, 돌아 볼 여유조차 없이 서둘러 자리를 떠야하는 전투가 된 것이 아닌가.
구간거리가 84.2km 인 것을 보면 1박2일 코스 같은데, 이쯤 되면 산행이 아니라 고도로 훈련된 게릴라들이 벌이는 유격훈련과 다를 바 없다.
모든 것이 속도라는 시간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짓거리다.
산은 높고 깊은 이유는 ‘느림’과 ‘힘듦’을 체득하는 곳이라고 지적해 주고 싶다. 그러나 그것도 혼자 생각일 뿐이다.
그러나 사람들이여! 그렇게 서둘지 마라-.
그대들이 그렇게 서둘러 급하게 돌아갈 곳은, 그대들이 그토록 떠나길 원했던 일상(日常)이었음을 기억하라!.
좌측 계곡으로 내려서면 눈으로 유명한 진동리 설피마을이요, 설피마을 삼거리에서 서쪽 강선리 위쪽 능선은 마치 배를 하늘로 향해 누워있는 곰의 형상을 닮았다는 곰배령과 작은 점봉산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이요, 세 물길이 가로막았다는 삼거리 아래 계곡은 청정계류 방태천 상류이다.
단목령 우측으로 내려가면 외설악 오색초등학교로 이어지는 계곡이다.
감시원이 오려면 아직 시간적인 여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울에서 온 팀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숲속으로 사라진다. 정상적인 산행이라면 점봉산 코스는 출입자체가 안 되는 곳이다. 지금 이곳에선 외설악 계곡 말고는 내려 설 곳이 없다. 남쪽으로 내려서는 진동계곡 역시 통제구역이다. 이제 산 조차도 편히 쉴 곳이 없다.
밤새도록 땅속을 파헤쳐 먹이를 찾다가 새벽이면 산속으로 사라지는 멧돼지처럼, 우리도 감시원들이 나타나기 전 아침식사를 하고 서둘러 몸을 숨겨야 한다.
단목령에서 점봉산까지는 10여km, 구간거리가 멀어져 갈수록 호흡은 거칠어지고 얼굴엔 땀은 비오듯 떨어진다. 그늘 아래임에도 한낮이 되니 더위까지 기승을 부린다.
홍포수막 터에 도착, 잠시 숨을 돌렸다. 동쪽 우거진 숲 사이로 설악산 서북능선이 조망된다. 마루금은 단정하고 웅장했다.
대청, 중청, 끝청 그리고 날카로운 기운이 느껴지는 귀때기청봉으로 이어지는 장대한 서북릉이다. 그리고 서북릉 아래로 적갈색 암릉은 초록빛 산기슭에 보석처럼 박혀있는 바위봉우리들은 칠형제봉 같아 보인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산이 좋아 오르는 사람에게 설악은 자신의 본래 모습을 아낌없이 보여준다.
게다가 낮게 깔려있던 안개조차 차츰 걷히기 시작하니 좀처럼 보기 힘든 설악 서북릉 절경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대단한 경치다. 이럴 때는 어떤 아름다운 형용사를 빌려 쓸 생각 말고 그냥 한마디로 말해도 충분하다.
‘저 저기- 봐라 저 그림 죽인다!
단지 저 선경(仙境)을 보기위해 무려 3년여를 걸어왔던가.
그러나 마음 한 구석으로 밀려오는 허탈감은 숨길 수가 없다. 산을 배경으로 하는 절경은 수없이 보아왔건만..... 아닐 것이다. 단지 저 절경하나 보기위해 이 고생을 하면서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으리라. 그렇다면 지금 이렇게 물밀 듯 밀려오는 이 허전함은 무엇 때문인가?
아직도 ‘왜 힘들게 이곳까지 걸어 왔지?’ 하며 묻는다. 그 질문은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이미 오래전부터 내 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또 다른 내가 나한테 던지는 물음이다.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다. 왜 왔지.....? 물론 그 동안 수없이 혼자 묻고 답했던 것이기도 하다.
처음엔 줄곧 ‘왜 시작했지?’, 그리고 2년 후엔 ‘그래 백두대간 종주하길 잘했지-’ 스스로를 위로했다. 이제 이렇게 설악산 대청봉을 눈앞에 두고 서는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것 대청봉은 올라 봐야지-’ 어느 정도 기대감과 흥분에 대간산행이 기다려지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한 편으론 허전한 느낌 속으로 빠져드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간절한 대상이 눈앞에 나타나니 그동안 꿈꿔왔던 환상이라도 걷힌 탓일까. 설악산을 눈앞에 두고 이런 허탈감이 엄습하리라곤 예상조차 못했다.
왜 그럴까? 산도 사람일과 다르지 않을 터, 설악에 들어와 보니 설악이 보이지 않는 이치와도 같은 것일까. 그래서 인가. 산꾼들 사이에서 오래된 얘기가 하나있다.
‘점봉산을 다녀오지 않고는 설악을 얘기하지 마라-’
점봉산은 서서히 덩치를 키우기 시작했다.
산이 몸짓을 키우면서 길은 우리에게 땀을 내놓으라 한다. 세상에 공짜가 없단다. 점봉산도 그냥은 안 된다며 쉽사리 정상을 보여주지 않는다. 게다가 오늘은 염소 뿔도 녹인다는 말복이니, 노염(老炎)에 시달리고 있는 것일까. 숨이 턱턱 차오르며 말을 잃은 지 삼십 여분, 웃옷을 흠뻑 적신 후에야 점봉산은 앙증맞은 야생화를 내어 우리를 마중한다.
산오이풀꽃, 까치수염. 주황색 동자꽃, 노란큰뱀무, 노루오줌, 하늘말나리, 진보라색 좀처럼 보기 힘든 보라색 애기 앉은부채까지, 꿀벌도 꿀을 따러 이곳까지 올라왔다. 과연 신이 가꿔놓은 천상의 화원이다.
하늘은 시리도록 높았고, 한 줄기 흰 구름이 서북릉에 몸을 걸치고는 지친 눈길을 유혹한다. 풍경이 선경을 낳으니 눈이 맑아지는 기분이다.
이곳 인제읍 귀둔리 사람들은 점봉산(1,424m)을 고랭지 산나물로 돈벌이가 되는 산이라 하여 ‘돈산' 이라 했으며, 소리 나는 대로 덤붕산, 게다가 덩치가 큰 산이니 큰덤붕산이라 불렀다,
남쪽으로 뻗은 작은 점봉산(1,293m)과 우리나라 최대 야생화 군락지인 곰배령을 지나, 산나물을 채취했던 챗목과 가칠봉(1,165m)으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능선은 산채(山菜)하는 ‘아낙들이 종일 걸어도 발바닥이 아프지 않았다’는 육산이다. 점봉산은 이들에게 생활의 터전이 되었다.
‘ 인제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네 -’
그러나 인제는 노랫말처럼 답답하고, 원통한 곳이 아니다. 인제는 이곳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던 시인 박인환의 고향이며 시비도 세워져 있다.
평양의전을 다녔고, 댄디보이로 더 잘 알려진 박인환은 6,25동란 후 암울했던 시절, 종로 단골술집 ‘경상도집’에서 김광규, 송지영, 김규동 등 가까이 지내던 문인들과 술을 들다가, 여주인의 요청으로 술값대신 즉석에서 가사를 짓고 친구인 이진섭이 곡을 붙인 다음, 동석했던 가수 나애심으로 하여금 노랠 부르도록 했으니, 그의 대표작 ‘세월이 가면’이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시인은 훗날 그 대상이 누구였는지, 아니면 무슨 의미였는지, 그리고 그런 시대적 아픔들이 세월이 가면 잊혀 질까 노래했지만, 뒤돌아보면 당시 다방 마담이 박인환의 어깨를 툭 치며 던졌다는 말이 가슴속에 멍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그 노래 눈물 난다. 어쩔라고 그런 노래를 지었노?’
그는 천재 시인 이상(李霜)을 좋아했고, 아침 산책길에 지팡이와 모자를 남겨 놓고 주머니에 돌을 가득 채운 후, 넘실대는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간 버지니아 울프를 흠모한 나머지 ‘목마와 숙녀’를 헌시(獻詩)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상의 기일(忌日)을 착각하고, 무려 한 달이나 앞서 모인 추모자리에서 사흘간이나 폭음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와 가을바람에 휘파람 소리를 내며 쓰러지는 빈 술병처럼, 젊은 나이에 요절(夭折)하고 말았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별이 떨어지듯 ‘세월이 가면’을 짓고 불과 일주일 만에,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났다. 불과 서른 살 밖에 되지 않았던 그는 무엇이 그리 답답했는지, 죽기 전 가슴을 쥐어뜯으며 ‘답답해 아- 답답해’ 를 연발했다.
‘사람들이여- 가을이 되면 빈 술병 속에서 울고 있는 낙엽소리를 들으러 점봉산을 한 번 다녀오지요’.
이 가을 점봉산 낙엽 지는 소리를 들어보라 권하고 싶다. (08. 8.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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