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조관형의 백두대간 31 - 좌이대사((坐而待死),좌탈입망(坐脫立亡)
(진고개 - 구룡령23.5km)

누군가 삶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견뎌 내는 일’이라 했다.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에스겔 16장 6절)
하나님도 인간의 약함을 짐작하셨는지, 피투성이가 되더라도 살아 낼 것을 반복해서 주문하셨다. ‘살아 낸다’ 함은 얼마를 더 견뎌내야 하는 것인지 답답함이 먼저 밀려오기도 한다. 그래도 살아봐야 하지 않겠냐고, 다짐하며 살아내는 것이 삶의 모습이다. 백두대간 종주 역시, 그렇게 견뎌내야 이룰 수 있다.
그뿐이랴 우리는 지금, 또 다시 어려워진 회사 사정을 고민해야 하는 샐러리맨들이다. 그래도 견뎌내야 한다. 현실이 어렵다고 쉽게 사표 한 장 써내고 뛰쳐나가는 어리석음으론 안 된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고 살아남은 자가 강한 자다. 견디다보니 이렇게 푸른빛으로 다시 살아난 나무들처럼 .....
다녀 간지 불과 한 달 사이, 그동안 온통 초록빛으로 단장한 나무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건네고 싶어진다. 그래 지난겨울은 그토록 길고 추웠는데 잘 견뎌내서 푸른빛으로 단장을 했다.
길게 늘어선 나무들이 반가웠고 듬직한 모습이 대견스럽게 보였다.
견디다 보면 어떻게든 살아지게 되는 것처럼, 나무들도 견뎌내니 풍성해졌다. 그렇게 살아내는 것이 삶인데... 벌써 여름이 성큼 다가왔다.
여름 산은 ‘견뎌냄’이 곧 ‘살아있음’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고개는 넘어가야 할 곳이고 산은 올라야할 대상이다. 진고개는 넘어야 하고, 동대산은 그렇게 올라야 한다.
고갯마루에서 곧바로 이어지는 대간 길머리에 들어서자, 동대산은 가파른 비탈길로 숨고를 틈도 주지 않고 1시간 가까이 굵은 땀을 흘리게 한다.
삶이 고해(苦海)라면, 산을 오른다는 것 또한 고통을 견뎌냄(忍苦)이니, 때론 육신의 고통이, 깨달음을 주고 성찰이 되기도 하는 것이 산행이다.
그 고통을 치유라도 해줄듯 가파른 산길은 땀을 내놓으라 하고, 금방이라도 넘어갈듯 거친 숨소리를 토하게 만든다. 마른 숨소리는 쇳소리가 된다.
산은 시작부터 내게 지독한 싸움을 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람은 여인의 미소처럼 부드럽고, 숲속 구석구석에서 피어오르는 봄기운이 안개 속에 숨어드니, 봄 산은 향기로 가득했다.
동대산(1,434m)을 올랐으나 정상은 아직 미명이다.
이럴 때 땀에 젖은 대원들 얼굴은 막 열리기 시작한 하늘을 닮았다. 함께 땀을 흘렸다는 것 하나로 목소리가 상기되고, 그런 모습이 서로에게 기쁨으로 미소가 된다. 그런 것이 산행에서 느끼는 또 다른 소소한 즐거움이다.
오대산은 신라 때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 온 부처님 정골사리를 모신 적멸보궁을 중심으로 문수보살 현현을 위해 상왕봉(1,491m), 비로봉(1,563m), 호령봉(1,561m), 두로봉(1,422m), 동대산(1,434m)등, 5만 불보살이 상주한다는 봉우리가 연꽃 모양으로 피어난 모습 그대로, 거대한 불교성지가 된 산이 오대산이다.
오늘은 갈 길이 멀어 해찰을 떨 수가 없다. 1,000m 이상이나 되는 산봉우리만도 20여개를 넘어서야 하는 결코 만만찮은 구간이다. 거리 탓인지 산행대장은 오늘따라 출발한다는 호각소리도 없이 배낭을 주섬주섬 짊어지고 서둘러 먼저 자리를 뜬다.
저럴 땐 아주 딴 사람 같아 보인다.
다시 한 시간여 상쾌한 산길을 걷다보니, 커다란 차돌백이 바위가 나타났다. 작은 공기돌이 아니라 오대산에 박혀있는 사리(舍利)와도 같은 흰 차돌바위다. 문득 어릴 적 할아버지 쌈지에 들어있던 부싯돌 생각이 났다.
차돌은 부딪치면 불꽃이 튀길 정도로 단단해서 당찬 사람을 일러 ‘차돌백이’ 같은 사람이라 했다.
살아가면서 그 차돌배기 같은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많이 있어왔다.
6,25동란 때 목숨을 내놓고 오대산 상원사를 지킨 한암대선사(漢巖大禪師)역시 스승인 경허(鏡虛)스님에 필적할만한 ‘차돌배기’ 같은 선승이었다.
‘불을 놓을 테면 놓아라 나는 법당에 앉아 소신공양(燒身供養)을 하겠노라’
퇴각하는 국군들이 전략상 상원사를 소각하겠다고 하자, 일갈하고 좌이대사(坐而待死), 앉아 죽기를 각오하고 결연한 의지로 삼매에 드니, 이에 감화를 받은 군인들은 하는 수 없이 그 방편으로 문짝을 떼어내 태우는 것으로 명령을 수행, 오대산에서 상원사만이 유일하게 병화(兵禍)를 피한 절이 되었다.
그리고 1.4 후퇴 때도 오대산에 있는 승려들은 모두가 피신했으나, 선사는 남아 상원사를 지켰고 한 달 후 당시 종군기자로 활동하던 선우휘(鮮于煇. 훗날 조선일보 논설위원 역임)는 우연히 상원사에 들어갔다가 무려 보름 동안이나 곡기를 끊고 정진하다 앉아채로 좌탈입망(坐脫立亡), 열반에 든 선사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겨 놓았던 것이다.
사진이 아니었다면 도저히 믿기지 않을 입적으로, 또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한 선승(禪僧)이었다.
그리고 상원사는 조선조 태종과 세조가 원찰(願刹)로 삼았던 절이다.
어릴 적부터 영민했던 세조는 개인적으로 보면 참으로 불행한 왕이었다.
어머니 소헌왕후가 서거하자 석보상절(釋譜詳節)을 지을 만큼 박학했고, 부왕세종과 담론을 나눌 정도로 총애도 받았으나, 훗날 왕위를 찬탈하고 수많은 신하들을 죽음의 길로 몰아 낸 후 이곳, 상원사에 와서 뒤늦게 뼈아픈 참회를 하기도 했다.
온몸에 창궐한 종기를 낫게 한 문수동자나, 세조의 옷소매를 물어 법당아래 숨어있던 자객의 위치를 알려준 고양이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상원사 사방 80리 땅을 묘전(猫田)으로 하사했다는 전설은 권선징악의 가치가 지고(至高)했던 시절, 과연 무슨 의미였을까. 생각도 해본다.
아마 큰 자비(慈悲)는 살아있는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음을 알려주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대산은 말이 없다. 그래서일까, 삶을 고통으로 보았던(一切皆苦) 불교는 진리의 종교라기보다 타인을 향한 연민과 자비의 종교인지라, 큰 사랑(大慈)을 큰 기쁨(大喜)이라 하지 않고, 대비(大悲)라 했으니, 그 슬픔조차 연민이요, 아픔을 승화시킨 사랑이 되었으리라.
오대산 비로봉으로 내려설 수 있는 두로봉에 올라서니, 말 그대로 다섯 봉우리가 물결치듯 흐르는 산세가 한 눈으로 조망된다. 오대산은 온갖 세상풍파를 겪고 가슴에 풍진이 쌓인 후 에야, 그 진면목을 알아채고 뒤늦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산이라 했다.
예로부터 오대산 풍경 중 비오는 날은 월정사가 으뜸이요(雨中月精), 눈 내리는 설경은 오대(雪中五臺)를 제일로 쳤으니, 겨울풍경은 오대산을, 그리고 여름 풍경은 월정사를 꼽았었다.
그러나 지금은 눈도, 비도 없는 짙은 녹음뿐인 다섯 봉우리 산세는 마치 활짝 핀 연꽃과도 같은 삼재불입지처(三災不入之處)인지라, 그 산세를 보고, 풍수지리에 밝았던 사명대사는 오대산에 사고(史庫)를 짓도록 임금께 주청을 드렸고, ‘나라 안 명산가운데서도 입지가 가장 좋은 곳으로, 불법이 만대를 두고 번창 할 곳’ 이라는 일연스님의 예언대로 불교성지가 된 산이다.
사고(史庫)는 사명대사의 예언대로 300 여 년 동안 안전하게 보관되었지만 한일합방 후, 1914년 일본으로 반출되는 비극을 맞게 되었으니, 천하명당으로 하늘이 내린 삼재는 피했지만, 이 땅에서 벌어진 무지막한 인재(人災)는 어쩔 수 없었는가 보다.
두로봉(1422m)은 한강기맥(漢江妓脈)의 출발점이다.
한강기맥은 두로봉에서 시작한 산줄기가 상왕봉 계방산 운두령 갈기산 용문산을 타고 내려오다 양수리(두물머리)에 이르러 강줄기에 막히고 만다.
산세가 동해안이나 서해안으로 흘러드는 강을 분수(分水)하는 큰 산줄기를 대간(大幹), 정간(正幹)이라 했으며 그로부터 갈라져 강의 경계를 구분 짓는 분수산맥(分水山脈)을 정맥이라 했다. 그리고 산줄기가 바다까지 이르지 못하고 이렇게 강줄기에 막혀 중간에서 끊긴 것을 기맥(妓脈)이라 불렀다.
금강산에서 발원한 물줄기(自金剛山出來)가 철원 화천 춘천 가평을 거치면서 북한강(318km)으로 몸을 부풀리고, 태백 금대봉 아래 검룡소에서 발원한 남한강(375km)이 단양과 충주를 거쳐, 이곳 양수리(二頭水)에서 북한강을 만나 비로써 큰 물줄기를 이루니 수도 서울의 젖줄, 한강(漢江)이다.
두로봉에서 신배령과 만월봉을 지나 응복산까지는 이십 여리, 길은 보이질 않고 온통 나무로 둘러 쌓여있다. 숲속은 어두웠고, 길은 수시로 갇히고 열리기를 반복했다.
신갈나무, 서어나무, 자작나무, 껍질이 질겨 밧줄로 쓰였던 피나무, 잎 모양이 마치 박쥐를 닮았다하여 이름도 박쥐나무다. 박쥐나무는 수간과 절제미가 있는 가지의 생김새가 정갈하여 ‘숲속의 신사’로도 불리는 나무다.
소리 나는 대로 ‘칭칭나무’라 불렀던 ‘층층나무’도 보인다. 여름이면 하얀 꽃무리가 수간을 따라 꽃이 층층으로 피어, 한때는 지(紙)우산을 만들기도 했던 나무다.
칭칭폭포(밀양 재약산 사자평 아래 폭포), 쾌지나칭칭나네, 물칭칭, 칭칭시하, 칭계... 층층나무는 목질은 부드럽고 성장속도가 빨라 깊은 산속에 있어도, 수형이 귀족적인 자태로 곧잘 눈에 띄는 바람에 중국에선 등대수(燈臺樹)라 불렸다. 생김새가 단정하고 깔끔한 나무다.
우리도 칭칭나무처럼 귀족이 되어 여름 숲이 깔아 놓은 초록빛 융단 길을 따라 달빛이 가득 차올랐다는 만월봉으로 사뿐히 올랐다.
그냥 바라보기에도 아까운 숲은 적어도 일백년 가까이 인간의 접근을 멀리해 온 원시림이다. 그래서일까, 길은 부드럽고 산은 한층 짙어진 그늘과 그윽한 꽃향기로, 훈향(薰香)을 피우고 있었다. 때론 고생만 하던 발(足)도 걷는 복(福)을 누리는 경우가 이런 때 인가 보다.
또한 오대산은 물맛 좋은 약수가 구석구석 숨어있는 산이다.
실학자 이중환은 이곳 오대산 우통수를 한강 발원지로 보았으며(五臺于筒之水於是乎出寔爲漢江之源), 조선 초기 문장가로 벼슬이 대제학이었던 기우자(騎牛子) 이행(李行)은 나라 안에서 가장 좋은 물로 충주 달천수(達川水), 한강 우중수(牛重水), 속리산 천왕봉의 삼타수(三陀水)를 조선의 3대 명수로 꼽기도 했다.
100년에 한 사람 태어날까 싶은, 천재 문사(文士), 교산(蛟山) 허균(許筠)도 ‘봄날 끝 무렵에 차를 끓여 갈증을 달래고 싶지만, 어찌하면 우통수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안타까워했다.
당시 사대부 집안에서 찻물로는 맛도 맛이지만 저울로 달았을 때 무게가 많이 나가는 물을 좋은 물로 여겼다. 한중수(漢中水)라 불리기도 했던 우통수는 무게가 ‘소처럼 무겁다(牛重水)‘ 하여 한양에 이를 때까지 다른 물과 잘 섞이지 않으므로, 최고의 찻물로 대접을 받았다. 교산도 백방으로 그 물을 구하려 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화전을 일구던 아낙네가 방아를 찧다 바위가 갈라지면서 솟아나왔다는 방아다리약수며, 마늘봉(1,1267m) 북서쪽 아래에 있는 불바라기약수와 명개약수 등 계곡마다 좋은 물이 숨어 있으니, 구룡봉으로 내려서는 산도 약수산(藥水山.1,306m))이라 이름을 얻었으리라.
그러나 마지막 봉우리 약수산은 쉽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 한다.
커다란 봉우리 2개를 앞세워놓고, 마지막 남은 땀 한 방울까지 모두 내 놓으라는 으름장에 제발 봐달라고 사정이라도 하고 싶다.
벌써 10시간 이상, 땀으로 목욕을 하다시피 걸어 왔으니 몸도 지치고 힘이 들었는지 나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 나온다. 혹시 산도 우릴 기다리지 않았겠냐는 기대는 언제나 혼자만의 착각이다. 산은 언제나 냉정하다.
그냥 잠시 쉬었다 가라며 작은 공터하나 내줄 뿐이다.
이렇게 힘들게 만난 정상을 놓고 ‘정복했다’는 표현은 잘못 된 일이다. 더 이상 한걸음도 옮길 수 없는 극한 상황을 겪어 본 사람들은, 결코 산에서 ‘정복’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지 않는다.
그건 정복이 아니라 잠시 허락을 받은 것 일 뿐, 다만 정상에 오르면 산은 멀리 바라보라 하며 시원한 풍경을 열어 준다. 가슴까지 휑하니 뚫리는 기분이다. 그때 앞서 걷던 대원 입에서는 신음처럼 탄성이 터져 나온다.
‘와 - 설악이 보인다.’
모두들 고갤 들어 멀리 북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눈에 익은 풍경, 그래 그토록 보고자 했던 설악산이 눈앞에 나타났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설악산 연봉들이 한 폭의 풍경화가 되어 마치 우릴 기다리듯 도열해있다. 멀리 대청봉에서 좌측으로 이어지는 서북능선, 그리고 그 능선 끄트머리에 불쑥 튀어 오른 귀때기청봉과 좌측으론 점봉산도 희미하게 조망된다.
감개가 무량하다 해야 하나, 뒤돌아보니 아- 꿈 길 같은 능선이 꼬리를 물고 따라 와서 ‘저 여기 있어요’ 손을 흔들고 있는 모습이다.
그렇다. 꼬박 3년여를 마치 손 박음질하듯, 실로 단 한발자국도 빠뜨리지 않고 걸어서 마주한 설악이다.
힘들게 죽을 고생해서 이렇게 마주한 설악산...
그래서 더 감동이다. 가슴 벅찬 느낌이 울컥 밀려왔다.
그러나 그런 감동도 잠시, 설악을 마주하고 바라보니 반갑다는 느낌보다 한편으론 왠지 원망스런 느낌이다. 저 산 봉우리가 그동안 우릴 그토록 힘들게 했던 대청봉이다. 어찌 보면 저 봉우리들 때문에 지난 3년 동안, 그 지난한 고생을 하다니..... 좀 허망하다는, 그래 몽땅 속았다는 느낌까지 든다.
오늘도 종일 울창한 원시림 같은 숲길을 걸어 왔다.
그늘이 깊은 숲속을 걸어 본 사람은 안다. 몸은 피곤해서 곧 쓰러질 것 같지만, 그럴 때마다 숲이 주는 청량감은 그런 육신의 피로를 보상해 주고도 남는다. 그건 깊은 산을 걸어 본 사람들만 아는 비밀이다.
지금 이 순간, 산이 우리에게 사기를 쳐도 좋고, 또한 길에 배신을 당해도 좋다. 분명한 것은 지금 이곳까지 정직하게 걸어왔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산에서 겪은 정직한 고통은 늘 자신에 대한 깨우침과 걸어온 길에 대한 자긍심을 갖게 한다는 점이다.
그렇게 걸어 온 발걸음이 깨달음을 얻는 행각(行脚)이요, 행선(行禪)이 된다면, 걷는다는 것은 무엇을 얻기 위해 걸어 온 것이 아니라, 결국 나를 버리는 ‘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어찌 보면 그 길은 우리가 걸어간 것이 아니라, 뒤돌아보니 웬 낯선 길이 따라 온 것 같이 느껴져서 홀로 걸어 온 것이 아님을 깨닫기도 한다.
낯선 길은 마치 도반처럼 지리산에서 이곳까지 무려 1,500여리나 되는 길을 몰래(?)따라 온 것이다. (08. 6. 5 - 6.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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