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조관형의 백두대간 30. 내 잔이 넘치나이다

(대관령 - 진고개 23.5km)

<연재>-조관형의 백두대간 30. 내 잔이 넘치나이다

옛날에 한양에서 ‘동대문 밖은 강릉’이라는 말이 있다.


동대문을 나서면 강릉(江陵)이 가장 살기 좋은 곳이라는 뜻이리라. 그리고 강릉은 경복궁 광화문에서 동쪽에 있는지라, 매일 아침 첫 빛을 받는 정동진(正東津)이라는 지명도 얻었고, 해 뜨는 고을로 알려진 고장이다.


큰 고개(大關嶺)를 넘어서면 낯선 바닷가, 마치 유배지와도 같은 강릉으로 부임했던 관리들은 한양에서 이곳까지 700여리, 멀고 먼 길을 걸어와 다시 40여리가 넘는 큰 고개를 넘자니 힘들 뿐 아니라 ‘언제 이 고개를 넘어 한양으로 돌아가나’ 눈물까지 흘렸다. 그런 이유로 대관령의 다른 지명은 ‘원울이 고개’다.


그리고 정선아리랑 가락에도 강원도에서 경치 좋고, 살기 좋은 곳으로는 일(一)강릉, 이(二)춘천, 삼(三)원주를 노래하기도 했다.


 


고갯마루에 도착하니 새벽4시, 사위는 캄캄한 어둠속이다.


예로부터 양양과 강릉은 바람이라(襄江之風), 말 그대로 동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거셌다. 아직은 이른 봄이라 그런지 성근 빗방울도 낯설고 차갑게 느 껴진다.


고갯마루에는 풍력발전기의 거대한 날개가 어둠속에서 차가운 바람을 자르고 있었다. 싸악 싹 찰싹 - 날개소리에서 멀리 파도소리가 묻어났다.


대관령은 동해바다를 품고 있는 큰 고개로 강릉의 진산이다.


무려 아흔 아홉 구비가 된다는 고갯마루였으니, 험하기로 말하면 대굴대굴 굴러갔다하여, 이곳 촌로들은 ‘대굴령’이라 불렀다.


중종 때 강원 관찰사 고형산(高荊山)은 자비(自費)로 큰길을 내고 통행을 수월하게 했으나, 병자호란 때 왜군이 고개를 쉽게 넘어서자, 그 책임을 따져 부관참시까지 당해야 했던 아픈 역사도 품고 있는 고개다.



대관령은 추풍령, 조령(鳥嶺)과 함께 우리나라 3대 고개로 꼽히기도 했다.


산에서 관(關)이라함은 두 지역을 지형적으로 크게 구분 짓는 산줄기의 목 부분으로, 령(嶺)이나 현(峴)보다는 큰 고개다. 그런즉 대관령은 ‘큰 관문이 되는 고개’라는 뜻이다.


 


그리고 본래 영(嶺)이라 함은 산의 어깨나 목 부분을 지나는 통로(山之肩領可通路者)를 의미한다. 산꼭대기를 넘는 것이 아니라 인체로 말하면 목 부분에 해당하는, 8부 능선 쯤 되는 곳을 넘어가는 고개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신라시대엔 대령(大嶺), 고려시대에는 대현(大峴), 굴령(堀嶺), 조선조 태종실록에선 대령산(大嶺山)이라 불리었고,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르러 대관령(大關嶺)이라는 지명이 처음으로 언급되었으며, 강릉 서북 45리에 있으며 이 주(州)의 진산임을 기록하고 있다.


택리지(擇里志)는 문경새재를 기준으로 조령(鳥嶺)남쪽을 영남이라 했다. 그리고 대관령을 중심으로 영동(嶺東)과 영서(嶺西)로 구분지어 생리와 인심을 논했으며 대관령 동쪽 9개 군을 묶어 관동(關東)으로 불렀다.


 


관동지방은 지리적으로 백두대간 큰 산줄기에 가로막혀 막다른 곳이다.


때문에 기후도 다를뿐더러, 임진란이나 병자호란 같은 병화(兵禍)도 크게 미치지 못했다. 강릉은 비록 산으로 막혔으나, 속세와는 달리 산이며 계곡마다 선풍(仙風)이 깃든 명소가 널려 있는 곳이다.


울진 월송정(月松亭)에서 통천의 총석정(叢石停)까지 8곳의 명승 길, 800여리가 관동팔경(關東八景)이요, 400여 년 전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한 송강 정철(鄭澈)이 그 풍광을 보고 지은 노래가 관동별곡(關東別曲)이다.


그리고 강릉에는 과거에 급제한 선비들이 많았던 관계로 자연스럽게 문향(文鄕)과 예향(禮鄕)의 고장이 되었다. 그런 이유로 혹자는 강릉을 바위 밑 늙은 부처(巖下老佛)같다 하여, 그 성향 또한 상당히 보수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심지어 중종 때 강릉부사로 부임한 한급(韓汲)은 이곳에서 큰 인물이 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방해정 뒷산 경포대를 지금 위치로 옮기고, 안산격인 모산봉(母山峰.104m) 높이를 3자3치 깎아 내리기도 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최근 강릉 사람들은 20여 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동원, 그 모산봉을 찾겠다며 다시 흙으로 쌓아 올렸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산행출발 1시간여 만에 동해전망대에 도착, 잠시 쉬었다.


어둠 탓인가, 바다는 하늘이 되었고, 하늘 또한 바다를 닮아 경계가 사라지고 없다. 사방은 캄캄했다. 살아 있는 것은 오직 바람소리뿐이다.


조선 전기 유학자로 45년간 무려 여섯 임금을 모시고, 지리지 동국여지승람을 편찬했던 문신 서거정(徐居正)은 조선의 산수중 경치가 가장 빼어난 곳은 관동(關東)이요, 강릉의 산수는 천하제일이라 (江陵山水甲天下)했으니, 강릉은 ‘제일(第一)’이라는 수식어가 흔할 만큼 빼어난 곳이다.


擇里志에도 ‘이름난 호수와 기이한 바위가 많아, 높은데 오르면 푸른 바다가 멀리 아득하게 보이고 골짜기에 들어서면 물과 돌이 아늑하여 경치가 나라 안에서 참으로 제일이라’ 했다.


강릉은 저 아래 바닷가 불빛으로 잠들어 있고 사위는 고요하다. 단지 바람소리만이 저 멀리 어둠속에 바다가 있고, 파도가 크게 출렁이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다시 대관령 목장길을 따라 걷기를 1시간여, 새봉(1.071m)에 도착하니 동쪽하늘이 실눈을 뜨기 시작했다. 대원들도 이제 몸이 풀렸는지 걸음걸이도 빨라진다. 그러나 바람은 차가웠고 모두들 추위에 쫓기듯 종종걸음으로 선자령(仙子嶺, 1,157m)에 오르니,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찬바람이 맹위를 떨친다. 모자가 벗겨져 날아가고 모래 바람이 사정없이 얼굴을 때린다.


눈조차 뜰 수가 없다. 누군가 바람은 역시 ‘선자령 바람’이라 했다. 바람뿐이랴. 대관령에서 선자령까지는 5.5km, 거리도 짧고 오르기도 편하다. 애들도 쉽게 오를 수 있어 찾는 이가 많다.


그러나 영동과 영서를 잇는 험준한 백두대간은 예로부터 가끔 그 이름값을 한다. 이른바 ‘선자령 바람’이다. 쉽게 생각한 코스가 기상이변으로 예상치 못한 등산사고가 의외로 많이 발생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전망은 거칠 것 없이 좋다. 북쪽으로는 대관령 목장 끝에 올라 선 황병산과 서쪽은 계방산, 남쪽은 발왕산, 그리고 서북쪽엔 오대산이 한 눈에 조망되어 실로 그 풍광이 뛰어난 곳이다.


무엇보다 덧칠을 하지 않아도, 그리고 언제나 한 폭의 풍경화가 되는 검푸른 동해바다가 우르릉 소릴 지르고 있다.


 


그 뿐이랴, 살아서는 왕이 되고 싶었고, 죽어서야 왕이 된 사내와 죽어서도 바람이 되어, 그 자리를 지켜야 했던 병사들의 한이 거센 바람이 되었다는, ‘명주군왕릉(溟洲郡王陵)’을 품고 있다. 그는 신라 태종 무열왕 6대 손으로 이곳 강릉김씨 시조가 되었단다.


그런 전설 때문인지 선자령 바람을 단지 거센 바람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왠지 친근한 느낌이 있는 바람이다. 그러나 오늘은 선자령 바람이 화가 났는지 몸을 움직일 때마다 발걸음을 막아선다. 몸을 잔뜩 웅크리고 옆으로 기어가듯 걸었다. 거센 파도가 숨어있는 바다바람은 그 소리조차 대단했다. 바다가 울릴 듯 거세었다.


 


산에서 만난 거센 바람은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고난과 그 속성이 비슷해서 머뭇거리거나 등을 보이면 안 된다. 바람을 향해 곧장 걸어가야 한다.


강이나 바다에서 거센 바람이 불면 새들은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머리를 두고 바람과 마주한다. 바람에 맞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깃털을 보호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사는 게 외롭다, 힘들다고 피하다 보면 삶은 바람맞은 새의 깃털처럼 흐트러지기 마련이다. 역린(逆鱗)의 이치도 이와 같을까.






▲ ‘내잔이 넘치나이다...’ 다윗의 감사 기도였다

ⓒ 뉴스울산


얼마쯤 걸었을까, 동편 하늘 한쪽으로 햇살이 비집고 들어서며 바람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곤신봉(1,129m)에 오르니 무려 600여만 평이나 되는 광활한 대관령목장 전경이 가슴을 탁 트이게 한다. 가슴조차 후련해진다.


그리고 드넓은 목장위로 거대한 크기의 풍차가 바람에 실려 쉼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급할 것도 없이 돌아가는 모습은 실로 장관이다.


 


‘스르륵 스르륵 싸악- 스르륵 싸악-‘


1기 2기 3기....스물, 서른, 서른하나, 둘 아니 셀 수가 없다.


거대한 날개는 바람을 가르며 날개를 돌리고, 날개는 소리를 낳고, 소리는 조용한 목장의 아침을 일깨우며 바람을 불러들이고, 풍차는 다시 살아서 돌아가며 속삭인다.


‘바람이 분다... 살아 봐야 겠다‘.


시인 폴 발레리 ’해변의 묘지’ 한 구절처럼 바람이 불면 풍차는 ’살아 봐 야겠다- ‘ 모두들 그렇게 살아봐야겠다며 이곳저곳에서 거대한 양팔을 벌리고 돌아가고 있다. 바람이 분다. 그래 살아 봐야겠다.


싱그러운 바람에 긴 날개를 맡긴 풍력발전기는 넓은 초원을 아주 느린 그림자로 건너가고 있었다. 느림은 목가적인 풍경을 만들며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렸다. 순간 살아있음에 대한 뜨거운 감사가 울컥 솟구쳐 올랐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You anoint my head with oil; my cup overflows)


 


고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왕, 지금도 이스라엘 국기에 파란색 육각별로 남아있는 다윗을 원수의 목전에서도 상을 차려주시고, 머리에 기름을 부어주시는 것으로 왕임을 인정했으며, 축복된 삶을 살았다는 기록을 시편으로 남겨 놓았었다.


다윗은 사랑하는 아들로부터 죽음보다 더 한 배반을 당하는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했다. 끝내 그의 감사(thank)는 하나님이 베푼 은혜를 잊지 않고 기억하겠다는 생각(think)에서 유래되었음을 성서는 기록하고 있다.


‘삶을 깊이 생각하라, 사랑하라, 그리하면 감사하게 되리라.’


네 삶을 송축하라! 지금 이 순간-. 내 잔도 그렇게 넘치고 있었다.



1천 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던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촬영지를 지나, 매봉(1,173m) 아래 동해 전망대에 앉아 아침 식사를 했다.


멀리 푸른 동해바다는 식탁이 되고, 넘실대는 파도가 반찬이 되어 진수성찬을 차린다. 축복인 냥 구름사이로 비집고 들어 온 햇살이 목장위로 쏟아져 내리니, 흘러가는 구름은 후식이 되고, 느린 걸음으로 목장을 건너가는 구름은 덩실 더덩실 춤을 추고 있었다.


 


매봉에서 소황병산까지는 목장을 벗어나 산길로 접어들어야 한다.


나무들도 연초록 잎으로 가녀린 손을 내밀고 봄꽃들은 여기저기 수런수런 꽃을 피우고 있다. 꽃이 잎보다 먼저 피우는 이유는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부터 보여주기 때문이란다. 그 꽃들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말을 건넨다.


‘여기예요 여기-’ 눈인사도 하란다.


특히 매봉에서부터 눈에 띄기 시작한 연보라 빛 얼레지 군락은 소황병산을 지나 노인봉 아래까지, 무려 20여리나 되는 거대한 꽃밭을 이루고 있다.


온통 산은 보랏빛 얼레지 천국, 천상의 화원이다.


꽃이 만개하면 보랏빛 꽃잎이 위로 말려 올라간 모습이 동화책 마귀할멈 고깔모자를 닮았다. 새싹은 나물로 데쳐 먹기도 하고, 꽃말은 ‘바람난 여자’이다. 그래선지 날씨가 따뜻해지면 꽃잎이 뒤로 활짝 젖혀진다.


기온이 올라가면 얼레지는 얼른 꽃잎을 열어 그 속에 꿀이 있음을 알려주고 곤충들은 그 때를 알아채고 기다렸다는 듯이 몰려든다.


그야말로 치마를 걷어 올리고 보란 듯이 ‘바람이 나는’ 것이다. 이래저래 봄은 여인의 계절이다.






▲ 황병산 기슭엔 ‘바람난 여자’들이 모여살고 있다

ⓒ 뉴스울산


조선조 장서가(藏書家)이하곤(李夏坤)은 ‘산을 유람하는 것은 미인을 보는 것과 같다’ 했으니 이를 두고 한 말인가. 규방(閨房)의 여인들이여 생이 고달프게 느껴진다면, 괜스레 까탈피우지 말고 산이라도 올라 봄날 갓 피어난 얼레지처럼, 치마를 걷어 올리고 요염하게 걸어 볼일이다. 혹시 아는가, 저 연초록빛 산이 그대들에게 봄날 고운 미소(春波)라도 던져 줄런지...


 


소황병산(1,328m)은 대관령 목장 끝부분에 작은 봉우리로 서있다.


넓은 초원 끄트머리에 작은 표지판 하나만이 정상임을 확인해줄 뿐, 나무 한그루 없는 까까머리 민둥산이다. 겨울엔 춥겠다.


대관령에서 이곳까지는 무려 18km, 무려 오십 여리나 되는 초지가 해발 1천 미터 고원에 펼쳐져 있으니, 상상만 해도 즐거운 산행이 되고도 남는다.


이제 대간 길은 황병산(1,407m)을 저 혼자 서쪽에 남겨두고 길머리를 북쪽 노인봉으로 돌리라 한다. 노인봉 아래서 동해로 이어지는 20여리 소금강 계곡은 1970년대 국립공원이 되기 전부터, 우리나라 명승1호로 지정된 유명한 경승지다. 경치로 말하자면 금강산도 부러워할 절경이다. 그래서 소금강이다.



노인봉(1,338m)으로 가는 길은 부드럽고 편하다.


눈 길가는 곳마다 봄꽃들이 천상의 화원을 이뤄 놓고 발길을 잡는다.


얼레지 군락지에 푸른 자주빛 현호색이며, 노란 양지꽃, 애기괭이꽃, 남산제비꽃, 뒤늦은 진달래까지, 짧은 봄날을 놓고 보면 키 큰 나무들한테 햇빛을 뺏기기 전에 꽃을 피우고 열매까지 맺어야 하니 시간이 없다.


꽃들은 저희들끼리 울긋불긋 바쁘다며 야단법석이다.


 


제 때를 알지 못하는 사람을 ‘철부지’라 한다.


때를 모른다거나 잊었다는 말이다. 하물며 저 많은 꽃들이 어찌 봄날은 기억해서 제때 꽃을 피운단 말인가. 실로 기적같이 놀라운 일 아닌가.


꽃들은 나름대로 겨우내 낮과 밤의 길이와 온도까지 감지해오며 계절의 변화에 자신의 생활을 맞춰왔다. 이른바 생물계절현상(phenology)이다. 이와같은 적응력은 식물이 주변 환경에 자신의 상태를 적응시키는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꽃들은 추운 겨울을 겪어야만 봄이 온 것을 깨닫기 때문에 봄꽃은 봄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미 그 전 해 여름과 가을에 꽃이 만들어 숨어 있는 것이다. 겨울은 그냥 지나갈 뿐이다. 갑작스런 기상이상으로 추위를 겪지 않은 꽃들은 종종 개화시기를 놓치곤 한다. 겨울이 없으면 꽃도 피질 않는다. 추워야 꽃도 핀다.


그 뿐이랴. 우리 몸에도 그런 생체시계(biological Clock)가 있었다. 그러나 사회적 시간에 매달려 살면서 자신도 모르게 생체시계를 잃어버렸다. 그 탓으로 때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철부지가 되었다. 마치 잠시 기온이 높다고 피어난 꽃과도 같은 모습이다.


최근 외신에 따르면 호주에선 꽃이 꿀벌의 성비(性比)에 까지 영향을 미친다하고, 곤충을 유혹하기 위해서 화려한 색깔과 독특한 냄새까지 피운다하니, 가히 그 생존법이 인간과 다를 바 없다.


 


그래서 일까. 살아생전 가장 지혜롭고 찬란한 영화를 누렸던 솔로몬 왕의 찬란했던 영광도 들에 핀 백합꽃 하나만 같지 못하다 했으니, 꽃은 모든 아름다움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러나 인간들의 무지한 탐욕 앞에서는 그 조차 궁핍한 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아름다운 꽃들이 길섶에서 넌지시 말을 걸어오고 있었다.


 


‘노인봉(老人峰)을 꼭 가려거든 철부지(節不知)들만 올라가지요’


( 08. 4. 30-5. 1)






▲ 현호색과 바람난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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