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시인협회 밀양 일대 문화답사 수행기






밀양 영남루
지난 22일 울산시인협회 회원 17명은 밀양으로 문화답사를 다녀왔다.


밀양 문인협회 회장인 이순공(李淳恭) 회장의 안내로 보물147호인 밀양 영남루(嶺南樓)에 당도했다.


영남루는 신라시대 영남사라는 사찰이 있던 자리에 누각 형태로 지어졌었는데 고려시대와 임난 때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세기 중반에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지어졌다고 했다.


고려시대 이후 그 시대를 대표하는 문인들의 글과 글씨가 누각 내부를 장식하고 있으며 기둥 사이에 걸려 있는 편액은 ‘영남제일루’로 당시 이인재 부사의 첫째아들인 10세인 이증석의 글씨라 하니 힘차게 써내려간 글씨체가 어린 소년이 쓴 글로는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또 강변 쪽에 영남루라고 걸려있는 현판도 1844년 이 영남루를 중수할 때 당시 7세이던 이인제 부사의 둘째아들이 쓴 글이었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영남루의 천정을 받히고 있는 나무들이 모두 용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물을 품고 다닌다는 용의 모습을 새겨 넣으므로 화재를 방지하고자 했던 선조들의 고육지책이었다는 것이 이 회장의 설명이었다.






영남루


일행은영남루를 나오면서 한국 가요계의 대부로 불리던 고 박시춘 작곡자의 생가를 둘러보았는데 초가 단칸방인 생가 옆에 세워진 ‘애수의 소야곡’의 악보가 이날따라 유난히 구슬프게 보였다.






박시춘 동상
박시춘 생가를 떠난 일행은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159호인 추원재(追遠齋)를 찾았다.


이곳 추원재는 강호산인 김숙자(江湖散人 金淑滋)가 처음 거처를 정한 곳으로 그의 아들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이 생장하고 별세한 곳이기도 하다. 김종직은 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어 성리학의 도통을 세우고 뿌리를 내리게 한 사상적 역할을 한 인물로 이곳은 조선시대 서림파 유학자들의 정신적인 고향과 같은 곳이라고 했다.
 
추원재를 거쳐 일행은 예림서원(禮林書院)을 찾았다. 예림서원은 조선시대 사설교육기관이자 대유학자인 선현(先賢)들을 제사지내던  곳으로 이곳도 김종직(金宗直)의 덕행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1567년에 덕성서원(德城書院)으로 건립되었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燒失)되었던 것을 다시 지었으며 인조 12년 1634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예림서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예림서원
예림서원은 독서루(讀書樓)와 구영당(求盈堂), 육덕사(育德祠)를 일직선으로 배치하여 앞에는 교육영역을 두고 뒤에는 제례의 영역을 두는 일반적인 서원의 건물 배치 양식을 따르고 있다.


특히 구영당은 당시 유생들의 교육 회합 및 토론의 장소로 사용되었다고 하며 이층 누대는 유생들이 쉬면서 손님을 접대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울산시인협회 회원들은 밀양 시청에서 추천해준 음식점인 ‘수라간’에서 점심을 먹은 후 임난 때 큰 공을 세운 사명당(四溟堂) 송운대사(松雲大師)의 높은 뜻을 기려 세운 표충비와 대사의 생가를 찾았다.


사명대사는 1559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명을 모아 평안도 순안(順安)으로 가서 서산대사 휴정(休靜)과 합세하였으며 그곳에서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이 되어 혁혁한 공을 세웠다.


뿐만 아니라 네 차례나 왜군의 진영에 들어가 휴전협상을 벌이며 왜군이 제시한 휴전협정의 모순점들과 죄악을 조목조목 들추었고 전쟁이 끝남 뒤 정조 37년 인 1604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8개월이나 머물면서 3,000여명의 조선인 포로를 귀국시키는 등 많은 공을 세웠다.


대사는 일본에서 돌아와 모든 공직을 버리고 해인사에서 제자들에게 설법하던 도중에 그대로 입적하였다고 한다. 나라에서는 대사가 입적한 뒤에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라는 시호를 내렸다.
 
표충비는 영조18년에 대사의 6대 법손(法孫)인 남붕(南鵬)선사가 경북 경산(慶山)에서 벌석(伐石)한 흑납석으로 건립하였는데 이 표충비는 나라의 큰 일이 생길 때 마다 땀을 뻘뻘 흘리는 신비한 비석으로 유명한데 현재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사명대사의 생가 터는 현재 대문체와 사랑채, 안채가 三자 형태로 복원되어 있으며 현대식 건물로 사명대사의 기념관까지 겸비하여 임진왜란 때 대사의 항일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사명대사 생가 앞에서 울산 시인협회 회원들...
이 기념관을 둘러보던 울산 시인협회 회원들은 기념관과 광장의 규모가 만만치 않아 밀양시가 의로운 선인들을 기리며 후대에 그 정신을 알려주려는 모범적인 정신을 느낄 수 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었다.
 
시간에 쫒기면서도 일행은 돌아오는 길에 변계량 비각(卞季良 碑閣)을 방문하였다. 조선초기의 학자인 춘정(春亭)변계량 (1369~1430)은 거의 20년간 대제학(大提學)을 맡을 정도로 문장이 뛰어났으며 시관(試官)이 되어서는 지극히 공정하게 선비를 뽑았다고 전해진다.


이곳은 선생의 육대조(六代組)인 태학진사(太學進士) 변고적(卞高迪)이 입향(入鄕)한 곳으로 선생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1946년 문중과 유림에서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이곳에 유허비(遺墟碑)를 세웠다.


저녁 6시 경에 밀양을 떠난 일행은 도중 간이 휴게소에서 준비해간 술잔을 비우며 문화답사에 느낀 이야기들을 나누며 늦은 봄날의 휴일을 즐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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