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손 크루소

로빈손 크루소가 4년간 무인도에 갇혀 사람을 만날 수 없었지만 파도에 떠밀려온 배구공 하나를
주워 사람 얼굴을 그리고 윌슨이라 이름을 붙여 줍니다.
그리고는 작업을 할 때나 심심할 때 그 배구공에게 말을 건넵니다.
화가나면 자신을 무시한다고 그 공을 던져버리고 다시 미안하다고 어디 갔느냐고 울면서 공(윌슨)
을 찾습니다.
4년 만에 무인도에서 뗏목을 타고 탈출을 하는데 파도에 휩쓸려 그 배구공이 떠내려갈 때 ‘윌슨’ ‘윌
슨’....하며 애처롭게 부르는 장면에선 가슴이 찡해 옵니다.
외로움의 압권이죠. 그게 곧 사람입니다.
상처도 사람을 통해 받지만 위로도 결국 사람을 통해 받더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누구를 그리
워 합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아주고 몸과 마음을 바라보고 감탄해주는 대상을 그리워할 것입
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런 욕구를 아주 잠시 채워 줄수는 있습니다. ‘잠시’ 입니다.
그 잠시가 영원히~ 아니 오래도록 지속되길 바라는 마음 때문에 상처도 받고 분노 때문에 싸우고
배신감도 느끼는 것이겠지요. 사람 중독에 빠지기도 합니다.
결론적으로 사람이 근원적인 외로움을 해결해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케엘케골이 갈파했듯 외로움은 단독자로서 태어나 살다 가는 인간의 운명입니다.
그러한 불치의 외로움을 늘 징징거리고 끊임없이 보호자 역을 강요하고 누군가에게 의존하려들고
어느 자리에서건 좌장이 되지 않으면 못 견디고 죽을때까지 추구하는 권력 중독도 속내를 들여다
보면 무리에서 벗어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대한 외로움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 것도 궁극적인 답이 될 수 없습니다.
어떤 관계도 강력 접착제 일수 없고 무리의 중심을 추구하는 이들은 이기고 지는 위험 부담을 숙명
처럼 지고 살 수 밖에 없습니다. 패배하는 순간 다들 등돌려 버립니다. 배신감이 찾아 올수 밖에.
쓰라린 패배의 맛입니다.
따라서 외로움은 인간의 숙명입니다. 그래서 사람에 실망한 이들은 반려 동물을 키우기도 합니다.
하지만 궁극적인 외로움 극복의 열쇠는 자신의 내면에서 찾아내야 합니다.
하고 싶은 일, 스스로 미쳐서 몰두할 만한 일. 그 분께서 천지 창조를 하시고 보니 너무 기쁘고 보람
이 있어서 분신인 인간 개개인에게도 창조 능력을 골고루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현명한 인간은 이것을 잘도 찾아내어 활용하지만 미욱한 이들은 ‘ 나는 아무 것도 할줄 모
른다’며 자신의 내면에 잠자고 있는 지하자원을 캐낼 엄두조차 내지 않고 그냥저냥 살다가 일생을
마감합니다.
즉 , 문화예술입니다.
글쓰기, 미술그리기, 악기 다루기, 노래부르기, 시낭송, 목공예, 조각, 판화, 하다못해 흙을 주물러 공
작을 하는 능력이라도 다들 주어져 있습니다.
몰두할 때만이 외로움도 눈 삭듯 삭고 진정한 보람과 기쁨이 뻐근하게 찾아옵니다.
문화예술이 결코 특별한 소수의 전유물일수 만은 없습니다.
매우 고상한 것,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특별한 범주라는 인식의 틀을 깰 필요가 있습니다.
그럴 때만이 비로소 외로움이라는 관계의 사슬에서 벗어날 해답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문화예술의 문을 두드리십시오. 용기를 내어 두드리는 자에게 문은 환하게 열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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