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아침의 나라의 여명은 한지 창으로

류윤모(시인)
고요한 아침의 나라의 여명은 한지 창으로 온다. 눈을 부비며 희끄무레한 여명이 밝아오는 한지 창
을 보면 거기 동트는 새벽이 이미 와 있곤 했다.
동창이 밝았느냐 /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이놈은 /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 너머 사래 긴 밭은 / 언제 갈려 하나니!
당시 아이들이 즐겨 음송하곤 했던 고 시조처럼, 하루의 출발은 동창에서 시작되곤 했다.
닥종이를 붙인 한지 문門은 조요롭다. 맑고 정결한 아침의 서기와 이따금 장죽을 치는 정중동의 명
상과 다듬이 소리가 서려있다. 한지 창문은 빛을 품어 새벽의 서기를 투과시킨다.
한지 문에는 지난날의 근심과 얼룩을 지워버리고 새 아침, 새 기분으로 여는 맑음이 서린다. 은근하
며 눈부시지 않고 환한, 마음속으로 차분하게 젖어드는 심상을 갖게 한다.
한지 문은 빛을 투과시키되 눈부시지 않게 걸러 담담하게 절제한다.
한지 문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 , 조선의 혈통 같은 은근한 지혜의 산물이 아닌가 싶다.
가을밤 亞자 한지 창에 달빛이 치는 묵죽 한 폭은 잠 못 이루는 사내의 심상을 비감에 젖게 한다. 달
빛을 희롱하는 온갖 풀벌레들의 언어가 사방팔방 모스 부호로 풀려 대숲을 스산하게 흔들면 열린
귀는 창을 통해 느끼고 교감하게 된다.
한지 문은 차단과 밀폐가 아닌 교감을 위한 소통의 문이다.
닫혀있음이 아니라 열려있음이며 바깥을 봄이 아니라 내면을 보는 마음의 창이다. 무채색이지만 삼
라만상의 모든 빛깔을 머금어 백자처럼 함축하고 있으며 걸러서 정화된 빛이기에 생명은 그 안에
서 안식을 얻는다.
봄, 가을이면 때 묻은 한지 문을 떼 내 풀을 쑤어 새로 말끔히 갈아붙이는 작업을 했다.
아이의 장난질에 구멍이 나고 찢기고, 누렇게 바래 보기 흉한 한지 문을 물을 머금어 뿜어서는 말
끔히 떼 내고 겨우내 창틀에 쌓인 먼지를 꼼꼼히 닦아낸다. 그런 후 풀을 뭉근히 쑤어서 새 창호를
바른다. 두루마리 한지를 펴서 두 사람이 양쪽 끝 모서리를 팽팽히 잡고 골고루 풀칠을 하여 닥나
무 창호지 위를 붓으로 쓸어가며 붙인다.
자주 손이 닿는 문고리 부근에는 찢어지지 않도록 배려하여 심심파적으로 봄이면 댓잎 두어 개
쯤 , 가을이면 국화 꽃잎 몇 개나 맨드라미를 붙여서 여백의 미를 완성한 후 마무리를 한다. 일에 찌
든 고단한 농부들도 그 정도 미적 감각 쯤은 간직하고 있었다
채광, 통풍을 위하여 홑창호지를 바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창살 문양의 종류가 다양하였다. 전통
한옥의 창은 닥나무 창호지를 사용하였고 또 문풍지가 있어 따로 환기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기능적으로 장지문, 분합문 등으로 분류하기도 했다.
한국의 전통가옥에서 문과 창은 격자무늬를 비롯한 여러 가지 무늬의 나무 창살을 만든 후 그 위에
한지를 발라 채광과 통풍을 고려하였다.
한지를 통해 비쳐 들어오는 햇살은 지나치게 강렬하지 않고 은은하여 방안 분위기를 한층 아늑하
게 해준다.
한지는 채광뿐 아니라 통풍에도 과학적이어서 조금씩이나마 방안의 탁한 공기가 빠져나가고 밖의
신선한 공기가 들어오기 때문에 에어컨이 아니라도 에어 컨디셔닝 역할을 훌륭히 해내고 공기의 순
환을 시켜준다.
이렇게 공기를 순환시켜줌으로써 뜨거운 구들바닥으로 인해서 건조해지기 쉬운 방안 공기의 온,습
도를 적절히 유지 시켜 주는 것이다.
겨울이 오면 북풍에 문풍지가 울고 추위에 떨 한 데를 생각하며 이글거리는 화롯불 끌어안고 안온
한 정서에 젖어 들었다. 한지창 너머 장독대 위에도 지붕 위에도 고요한 눈발이 내려앉고 화롯불에
고구마나 군밤을 구워 먹기도 했다
한국적인 그 안온한 정서, 정결한 마음, 심오한 사상의 한지창이 요즘은 드물다. 모두 유리창으로
창문을 갈아 끼우게 된 후에는 닥나무의 은근한 끈기를 찾아보기 힘든, 조급하고 강팍하며 표피적
인 국민성으로 대치된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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