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취했다 깨어나니 여름이 가고 없더라

취했다 깨어나니 여름이 가고 없더라
(우두령 - 궤방령16.5km)
애초부터 땅위에 길은 없었다. 걸어간 사람이 많다보니 길이 된 것이다. 때론 잘못 걸어 간 길이 지도(地圖)를 만들기도 했다.
물론 지도가 있기 전에도, 이곳 질매재는 있었다. 무주구천동과 영동군 외딴지역을 김천으로 이어주는 질매재는 잘못 간 길이 아님에도, 지도가 된 느낌이 드는 고개다. 그만큼 외지고 한적한 곳이다. 넘나들던 짐승들조차 외로웠겠다.
다시 질매재(720m)에 서다.
오늘 산행구간의 맏형격인 황학산(黃鶴山)이 삼성산(985m)과 여정봉(1.030m)을 앞세워 질매재를 내놓고, 노랑과 빨간색 시그널로 어서 오라 손짓을 한다. 그 시그널 하나에 출발부터 발걸음도 가볍게 느껴진다.
하늘은 맑고 바람은 겨울답잖게 시원했다. 금방이라도 봄이 다가 올 것 같다. 대원들도 상쾌한 기분인지 수런수런 산길을 깨우며 걷는다.
십 오리나 되는 산길을 조금도 힘들이지 않고 바람재까지 올라서니, 지명 그대로 차가운 바람조차 시원한 느낌이다.
고개 이름은 바람재다. 특별히 고개라 할 것도 없는 작은 능선 오름이다.
지명조차 독특하다. 바람재, 바람재라 하니...
해맞이, 달맞이, 바람맞이 ... 해맞이, 달맞이는 들어 보았어도 바람맞이는 생소하다. 물론 대관령 큰바람이나 소백산 비로봉과 태백산 거센 겨울바람은 중독성이 있어, 때가 되면 그 산에 가서 ‘바람맞이’를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곳 바람은 맞아보지 않았으니 모르겠다. 사통팔달, 멀리 덕유산에서 김천지례까지 산마루가 휑하니 뚫어졌으니, 역설적으로 바람이 모여 살기 좋은 곳이 되었으리라.
여름산은 그냥 있어도 웅장하지만 낙엽이 모두 떠난 겨울산은 왠지 왜소하고 초라한 모습이다. 모두를 훌훌 털고 제 키를 낮춘 나무들 사이로, 형제봉(1.020m)이나 황학산(1.111m)이 한눈에 들어오고, 그 뒤편으론 추풍령 고갯길도 시원스럽게 조망된다.
내 키가 작은 것을 깨닫지 못하고 세상이 잘 보이지 않는다며, 까치발을 딛고 불평하던 자신을 부끄럽게 하는 것이 겨울 산이다. 그냥 서 있어도 잘 보이니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비워내고 비워내 텅텅 비게 하라’ 노자의 치허극(致虛極)은 꼭 산을 두고 한 말은 아닐 터... 그런 이유로 사람들은 텅 비어 있음으로 존재하는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산, 겨울 산을 좋아하는가 보다.
황학산, 황악산? 지형으로 보아선 악(岳)은 아닐 터, 그러나 기록상으론 학(鶴)보다는 악(岳)이 많다.
끝내 세속과 이별하지 못한 속리산에서 몸을 낮추어 오던 대간은 추풍령을 가로지르고 몸을 일으켜 황악산이 되었으니(俗離山南走大斷於秋風嶺起爲黃澗黃岳山). 택리지에도 황악산으로 기록되어있다.
낙엽이 수런수런, 잔설은 뽀드득 뽀드득 얘길하자한다
백두대간에서 유일한 서출동류형(西出東流形) 산세가 산수동거(山水同去)하여 풀어지는 명당으로, 신라 눌지왕 2년 아도화상이 창건한 직지사(直指寺)라는 명찰(名刹)이 들어섰으며, 예로부터 서쪽에서 나와 동쪽으로 흐르는 물엔 이끼가 끼지 않는다하여, 귀 할 뿐더러 좋은 물로 대접을 받았다.
그 귀한 물이 직지사 경내를 흘러 직지천이 되었고, 대덕산에 발원지를 둔 감천(甘川)과 함께 물 좋은 김천의 토속주(土俗酒), 발효주와 소주의 장점만을 취한 과하주(過夏酒)라는 명주를 빗어냈다.
황악산에서 등산로를 따라 곧장 내려다보면 황악산은 너른 산자락으로 직지사를 품었으며, 그 아래 쪽 탁 트인 들판위로 고속도로가 시원스럽고, 김천시 오른쪽으론 골기가 강한 금오산에 우뚝 솟구쳐 오른 모습이다.
김천은 예로부터 삼산이수(三山二水)의 고장이다. 진산(鎭山)인 황악산과 금오산, 고성산이 삼산(三山)이요, 감천과 직지천이 이수(二水)가 된다.
그런 이유로 글깨나 쓴다하는 문필가도 많이 배출되었고 - 사실 근래 들어 김천 출신 젊은 작가들의 왕성한 창작 활동은 이와 전혀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 여자가 고향이 김천이면 미인 소릴 들었다.
그리고 낙동강 지류인 감천을 끼고 수운(水運)까지 발달되어, 조선의 5대 시장 중 하나로 꼽힌 김천 장은 적어도 추풍령이 뚫리기 전까지는 그 유명세를 치루기도 했었다.
김천의 명주 과하주(過夏酒)도 그렇게 태어난 것이리라. ‘취했다 깨어나니 곁에 있던 여름이 가고 없더라-’ 이름만큼이나 좋은 술을 얻은 것이다.
황악산 정상 앞에 우뚝 선 형제봉은 이름대로 형제간의 정을 자랑이라도 하듯 우리를 반긴다. 바람도 잠시 정상에서 숨고르기를 한다.
식념망려(食念忘慮)라, 생각도 잠시 쉬게 하고, 품고 있는 마음이라도 내려놓으라 한다. 산 계곡 아래쪽에서는 맑은 종소리가 명징하게 울려왔다.
귀뚜라미는 움직일 때 소리를 듣지 못한다 했던가. 우리도 낙엽 밟히는 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 않던 종소리가 걸음을 멈추고 나니 골짜기를 타고 올라왔다. 멀리 계곡 끝자리로 아담한 산사가 눈에 들어온다. 외딴 산중에서 울려 온 탓인가. 종소리는 맑고 정답게 들려왔다.
종은 절에 있지만 소리는 밖에서 울리더라(鍾在寺 聲在外).
울 밖을 넘어가는 종소리를 숨길 수 없듯, 감추어 둔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니 세상일을 놓고 스스로를 속이지 않으면, 살아가는 일 역시 종소리처럼 맑게 된다는 뜻인가.
외딴 산사의 종소리라 그런지 청량감이 더 할 나위없다. 빈자리에서 울리기 때문일까. 그 소리는 누굴 탓하거나 꾸짖는 소리가 아니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언제 들어도 종소리가 정답게 느껴지는가 보다.
비어있어야(虛) 비로써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듯(用), 비어있음으로 쓰임이 되는 것은 깨달음(覺)의 차이 일터, 지금 내 귀에 들리는 산사의 종소리가 체(體)라면, 그 소리를 받아들이는 귀는 용(用)이 되리라.
그러나 울림(用)이 없는 세상은 앙상한 체(體)만 남아 시끄럽고, 스님의 목탁소리는 계곡아래 홀로 울려 퍼지고 있으니, 왠지 허전한 느낌이다.
소리는 혼자 울린다 해도 듣는 이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말없는 산은 멀리 앉아서 듣고, 나무는 흔들리더라도 서서 들으며, 풀은 몸을 낮춰 누워 듣고, 새는 허공을 헤치는 날개 짓으로 듣는다. 구름이 두둥실 제 몸에 소릴 실으면 발 없는 말이 천리가 듯 바람은 산 너머 멀리까지 종소리를 날라준다.
‘뎅 데엥 뎅- 데엥 뎅 -’
종소리는 오래 전부터 산을 위로 해왔다. 그 소리는 깊고 여운이 길게 남았다. 그리고 산은 절이 앉을 자리를 내주었듯이 종소리도 품어 주었다.
그렇게 산과 절은 이웃하여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이어왔다. 그리고 종소리는 절에서 태어났으니 산에서 울려야 잘 제격이다. 산을 떠난 종소리는 쇳조각 울림일 뿐이다.
‘나무아비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비타불 -’
종소리가 사라진 공간으로 스님의 독경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귀로 듣지 말고(無廳之以耳) 마음으로 들으라(而聽之以心)했던가. 산사에서 울려오던 종소리는 그쳤으나, 울림은 여전히 산속에 머물러 있는 느낌이다. 그럴 때마다 산은 소리를 담는 커다란 그릇이 되곤 했다.
소리를 머금은 산은 바람이 불 때마다 그 소리를 조금씩 들려 줄 듯도 한데 내가 아둔한 탓인지 들리지가 않는다. 그렇게 울리던 종소리도 산으로 숨어 버리니 산은 우두커니 홀로 외로운 모습이다.
그렇게 소리가 멈춘 상태를 정(靜)이라 한다면 움직임이 없는 상태를 적(寂)이라 했던가. 종소리가 멈춘 산은 온갖 소리를 모두 받아줄 것 같은 고요 속으로 빠져든다. 바람소리조차 산기슭에 잠들고 없다.
정적은 깊이가 깊은 호수와도 같다. 산도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봄 햇살의 그지없이 맑고 싸늘한 바람까지... 상쾌함이 더해 간다.
오늘은 힘들고 멀게만 느껴지는 대간산행이 아니라 마치 가벼운 뒷산을 올라 온 모습들이다. 그동안 사실 대간산행 말 만 꺼내도 힘들다는 생각이 앞서는 바람에 주눅이 들곤 했었다.
춥고 긴 겨울을 빠져나온 바람도 봄기운에 힘을 얻었는지 상큼한 느낌이다. 대원들도 모두 하나같이 맑고 밝은 얼굴들이다. 주고받는 목소리도 정이 그득 담겨있다.
출발 할 때 만해도 이런 저런 일로 마음이 심란 했었는데 이렇게 산하나 올라서는 것으로 언제 그랬냐는 듯 기분조차 상쾌하다. 그것도 산의 일이다.
선종(禪宗)의 개조(開祖) 달마(達磨)대사도 마음이 근본이니 모든 현상은 마음에서 일어나고(直指人心), 마음으로 깨달으면 누구나 부처가 된다(見性成佛)‘. 때문에 직지사의 절 이름도 마음을 잘 다스리는 것이 근본이라는 직지인심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다른 창건설화로는 고려 능여대사가 중창할 때 손가락을 자(尺)로 삼아 지었다는 설과 창건주 아도화상이 선산 도리사에서 절을 짓고, 멀리 황악산을 바라보니 그 아래 길상지지(吉祥之地)가 있음을 손으로 가르쳤다(直指)하여 얻었다는 설도 있지만, 직지사 창건설화의 직지와 선종(禪宗)의 직지는 둘이 아니고 하나로 보는, 불교의 본질을 절 이름으로 삼았으리라.
능여 계곡이나 절 뒤 고개로 1시간 정도 내려서면 곧바로 직지사 경내이다. 그러나 정상에서 내려서는 길은 자칫 길을 놓칠 수 있는 곳인지라 발길을 잘 살펴봐야 한다.
운수봉(680m)을 지나 여우가 자주 나타났다는 여시골산을 넘어 시골길을 닮은 작은 봉우리 두어 개를 넘어 잠시 내려오니, 오늘 산행 구간 목적지 괘방령(掛榜嶺)이다. 김천시 대항면과 충북 영동군 매곡면을 이어주는 한적한 고갯마루이니 오늘은 비교적 가벼운 산행이 되었다.
예로부터 영남대로라 불리던 문경새재 길에 비하면, 그 이름 때문에 소외까지 되었던 추풍령(秋風嶺)을 곁에 둔 탓으로 괘방령은 쓸쓸한 길이었다.
추풍령은 관로(管路)인데, 괘방령은 오리(五利)를 위해 십리(十里) 걷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등짐장수들이 넘나들던 상로(商路)였으니, 멀리 포졸들 그림자만 봐도 주눅이 들어 굽신거려야 했던 길이다.
만물은 본래 제자리가 있었으니(萬物階有位), 길 역시 제 역할이 따로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일까.
임진란 때 왜군들이 한양으로 쳐들어 올 땐, 추풍령을 넘어왔지만, 퇴각로는 괘방령이었다. 이상하리만큼 6,25 동란 때도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인민군이 낙동강으로 진격 할 땐 추풍령을 넘었지만, 패잔병(敗殘兵)들이 슬금슬금 도망가듯 넘어간 길은 괘방령이다.
그나마 괘방령은 목민관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선비들이 넘나들던 과거길 이었으니 추풍령보다는 대접을 받았던 길이다.
그리고 방(傍)이란 통행이 잦은 곳에 내걸리는지라, 과거 길에 오른 선비들이 죽죽 미끄러진다는 죽령이나, 추풍낙엽(秋風落葉)처럼 떨어진다는 추풍령보다, 방(傍)이 내걸리는 괘방령(掛榜嶺)을 선호해서 넘나들었으니, 만물은 본래 제 이름을 갖고 태어난다(萬物階有名)했던가, 괘방령은 선비들의 과거 길로 오래 전부터 제 이름값을 받아 온 고개가 된 셈이다.
괘방령에 내려서서 어둠속 주위를 살펴보니 웬 장정 서넛이 어둠속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알고 보니 사람크기 만한 장승들이 누굴 기다리기라도 한 듯 우릴 반갑게 맞이한다.
장승들은 하나같이 가난한 민초(民草)들 모습이었고, 법 없이도 살아갈 모습들이다. 종일 추위로 지쳐 피곤했지만 그래도 반가움을 숨길 수 없어 다가가서 꼬옥 끌안아 주고 싶었다. (06. 1. 21일 )
글, 사진 / 조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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