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꽃 진 자리 남은 향기가 더 짙더라

(빼재-부항령19.5km)

7. 꽃 진 자리 남은 향기가 더 짙더라

꽃 진 자리 남은 향기가 더 짙더라
(빼재-부항령19.5km)


 


산책(散策), 산(山)이라는 책(冊)을 읽는 것이다


 옛 선인들은 만물은 본래부터 이름이 있다고 믿어왔었다.
고개 이름이 ‘빼재’라 함은 무엇인지는 몰라도 ‘빼어났음’이니 수령(秀嶺)이라 불렸을 것이다. 김천 지례에서 빼재를 넘으면 무풍(茂豊)이다.
 현재 무주(茂朱)라는 지명은 이조 태종 때 무주와 주계가 합쳐진 이름이고 그 이전엔 신라 땅 무산현이었으니 이른바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 맞닿았던 요충지다.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던지 백제는 주계(朱溪)를 적천(赤川)이라 했고, 훗날 신라 땅이 되자 다시 단천(丹川)이라 불렸으니, 무주구천동 단풍도 그 지명에 한수 거들었을 법하다.
 한 때 신라 땅이었던 인연으로 지금도 그들은 덕산재를 넘어 김천, 지례와 밀접한 경상도 생활권과 가깝게 지내고 있고, 지리적으로는 덕유산 그늘이니 전쟁이나 민란 때 몸을 의탁하기 좋은 길지(吉地)가 되었다. ‘덕유산은 흙산으로 난리를 겪을 때에 숨어들면 적군이 찾지 못한다 하여 택리지에는 덕이 큰 산, ’덕산(德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정감록에도 ‘무주 무봉산 동쪽 동방 상동으로 피난 못할 곳이 없다.’
 무주의 무풍(茂豊) 북쪽 골짜기는 병란이 일어났을 때 몸을 보전할 수 있는 십승지(十勝地)중 여덟 번째로 선택받은 땅인지라,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때도 온전히 몸을 보전 할 수 있었고, 지금도 무주군 거주인 상당수가 그때 피란 온 후손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혹자는 산이 험하고 산적(山賊)들이 잡아먹은 짐승들의 뼈가 많이 쌓여있어 경상도 사투리발음으로 ‘뼈재’가 ‘빼재’가 되었다고 하나,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빼어나다(秀)하여, 수령(秀嶺)으로 불려왔다. 그렇다면 최근 추풍령(秋風嶺)을 본 딴 신풍령(新風嶺)은 또 무슨 의미인지 두고 볼 일다.


 다시 한 달여 만에 길 위에 섰다
 만산홍엽의 계절을 산 중턱에 남겨두고 떠났었는데... 돌아와 보니 칼로 잘라낸 듯한 빼재 고갯마루 사이로 찬바람이 사정없이 휘몰아친다.
 서있기 조차 힘들다. 바람은 차갑고 턱은 덜덜 떨려왔다. 시작부터 매서운 바람이 낯설고 싫었다. 게다가 두고 온 따뜻한 아랫목 생각이 발걸음을 무겁게 만든다.
 오늘 걸어야할 길 50여리는 갈등(葛藤)까지 불러일으킨다.
 칡(葛)은 오른쪽방향으로 나무를 타고 올라가고, 등(藤)은 왼쪽으로 감고 오르니 갈등(葛藤)이다. 그리고 둘은 서로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 밀고 당기고 눌려대니 불화(不和)가 된다. 갈등은 이미 길을 떠난 마음조차 칭칭 감아버리고 말았다. 이쯤 되면 발걸음조차 갈등이 되니 자꾸 헛딛게 된다. 길은 미끄러웠다.
 ‘이 추위에 꼭 길을 떠나야 해요?’
 현관문을 열어주며 등 뒤에서 아내가 건넨 말이다. 아내의 말대로 이 추위에 새벽같이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나. 내 삶에 있어 그렇게 절실한 산행이었나. 모를 일이다.


 길머리에서 수정봉(1,050m)까지는 된비알이다.
 지난 번 산행 때 산 중턱에 남겨진 가을을 놓고 갔었는데... 어느새 찬바람이 나뭇가지를 쉼 없이 흔들어 대고 있다. 대단히 추운 날씨였다. 흘러야할 땀이 얼굴에서 그냥 얼어붙는다. 이마에 얼어붙은 땀을 닦아내니 얼음이 떨어져 내린다.
 된새미기재와 호미기재를 지나 삼봉산(1,264m)에 올랐다. 그 제서야 등 쪽으로 땀이 흐르면서 몸이 추위에 적응 되었다. 이제야 갈등(葛藤)이 손을 내밀어 화해를 청해온 것이다.
 산경표(山徑標)에는 덕유삼봉산으로 표기 되어있으니 덕유산의 시작이요, 그 끝은 무룡산이라 했다. 산은 아직도 덕유산 그늘이다. 멀리 북덕유 향적봉(香積峰)능선이 선명하게 하늘금을 긋고 있다. 날씨가 추울수록 높이를 키우는 것이 겨울 산의 속성이다.


 ‘아침마다 산을 오르내리는 나의/ 산책(散策)은 /산(山)이라는 책(冊)을 읽는 일이다 / 손과 발과 가슴이 흥건히 땀으로 젖고’/


 시인 고진하는 산에 오르는 일을 ‘산이라는 책읽기’라 노래했다.
 독경(讀經), 사경(寫經), 묵경(黙經)... 산을 읽되 발로 읽는 것이니, 답경(踏經)이라 해도 될까. 겨울산은 읽기가 편해서 좋다. 겨울산은 모두를 버렸으니 굳이 까치발을 딛고 애쓰지 않아도 잘 보이고, 숨길 것이 없으니 정직한 모습이다.
 텅 비어 있음으로 비로소 존재가 되는 진공묘유의 산, 그래서 사람들은 겨울 산을 더 좋아하게 되는가 보다. 그래서 일까, 선인들은 그 길(路)을 걸어가노라면, 걷는 일 조차 행선(行禪)이 됨을 얘기했다.


 ‘걸어서 / 만 리길은 가본 자만이 / 겨우 알 수 있으리 /
발바닥이 곧 날개이자/ 한 자루 필생의 붓이었다는 것을.
(이원규의 '足筆’ 부분.)


 지리산에 몸을 의탁하고, 최근 생명평화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시인은 백두대간1700리, 낙동강 1300리, 지리산 850리 둘레 길을 걸으며 발로 글을 쓰고 있다.
 시인의 ‘발바닥은 날개’가 되었다. 귀뚜라미는 귀가 앞발에 달려있어 발로 소리를 듣는다. 지금 우리도 발에 밟히는 낙엽소리로 산이라는 경전(經典)을 읽어가고 있는 중이다. 산은 그렇게 몸으로 읽으라 한다. 잎이 크면 소리도 크고, 작으면 소리 또한 작게 소곤거리는, 산이라는 책이다.


 소사재(690m)까지는 내리막길이다
 나이가 들수록 내리막길이 더 힘들다. 오르막길이 힘든 이유는 젊었을 땐 서두름 때문이지만, 내리막은 중심잡기가 더 힘들어진다. 그런 이유로 살아가는 일이 산을 걷는 일과 크게 다름이 없음을 깨닫게 된다.
 다시 삼도봉(1,250m)까지는 끈기를 요구하는 오르막이다. 표고차이가 500여 미터이니, 내려온 만큼 다시 올라야 한다. 벌써 몇 번째 오르내리고 있는지... 산행도 결국 올라간 만큼 내려와야 하는 제로섬게임(Zero-sum game)이 아닌가 싶다.


 길이 쉽다고 좋아할 것도, 오른다고 힘들어 할 것도 없는, 내리막이 새콤달콤한 세상맛이라면, 소태나무처럼 입에 쓴 것은 오르막이다.
 ‘얘야-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쓴 법이란다-‘ 
 어릴 적 구충제를 먹을 때마다 몇 번씩 토하고 눈물까지 쏟던 내게 어머님께선 등을 두드리며 젊어 고생은 사서라도 하는 것이라며 위로하곤 했다.
 어머님 말씀대로 젊었을 때 고생은 언젠가 따뜻한 위로가 될 것이라 믿으며 살아왔다.
 그러나 고생은 아직도 낯설기만 하고... 세상에 쉬운 산이란 하나도 없다. 쉬운 인생도 없으니 생이 되었던, 산이던 그 오르막의 끝은 어디쯤일까.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은 내 몸이다


 삼도봉에서 늦은 점심을 했다. 산행에서 몸이 지치면 우선 물이나 술같이 쉽게 허기를 채울 먹거리부터 찾는다.
 산은 또 다시 오르라 한다. 대덕산(1,290m)은 결코 낮은 산이 아니다.
 차가운 바람을 옆에 놓고, 술로 몸을 달래니 취기가 후끈 달아오른다.


 산에서는 몸도 말을 하고, 생각을 한다.
 그리고 몸이 갖고 있는 무게감을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은 몸이 갖는 고유권한이다. 주인이 마셔대면 고생은 몸이 대신 한다. 그럴 때마다 몸은 과유불급(過猶不及)을 터득한 선사(禪師)와도 같다. 세상에서 내 몸보다 무겁고 힘겨운 것이 무엇이더냐, 묻곤 한다.


 대덕산 정상은 헬기장이다.
 정상 표지석을 놓고 술 마다않는 산행대장은 그냥 가기 싫은지 잔을 권한다. 또 정상주(頂上酒)란다. 그런 정상을 몇 번이나 넘어왔던가. 12번 아니 14번, 헷갈린다. 술잔(盃)이 그릇이 아닌(不皿)작은 잔이라 해도, 부항령까진 몇 잔을 더 마셔야 하는가.
 물이 좋은 샘이 있어 김천(金泉)이라 했다. 정상에서 10여분 내려서서 물맛 좋은 샘이 있다니 모두들 줄을 선다. 물맛은 흘린 땀에 비례 하니 좋을 수밖에 ... 해발 640m인 덕산재까지 내려오니 모두들 지친표정이다. 다시 올라야 하는 길이 남아있다.


 ‘더는 못간데이-‘
 컨디션이 좋지 않은 대원이 포기를 하고 만다. 일어 설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부산에서 올라온 다른 종주팀은 오늘 구간이 덕산재까지라 했다. 한없이 부럽게 보인다. 입맛을 다시며 그들이 끊여 온 오뎅국에 소주 몇 잔을 염치도 없이 얻어 마셨다.
 술은 말 그대로 수-울 술, 잘도 넘어간다.
 그러나 술의 옛말은 ‘수울’이 아니라, 술이 익을 때 나오는 술기운에 가끔씩 ‘난데없이 물에 불이 붙었다’ 하여 ‘수불’이다. 때문에 ‘천 불 난다’며 죄 없는 제 가슴팍을 쥐어박던 가난한 백성들 마음속 ‘천불’도 다스렸으리라.


 아직도 남겨진 길은 7km여, 3시간 거리이다.
 해떨어질 시각이 가까워졌음인가, 나무는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며 길을 열어준다. 덕산재에서 부항령까진 비교적 편안한 능선길이다.
 길섶으로 떨어진 낙엽에 발길이 푹푹 파묻힌다. 석양 탓인가, 잎은 떠났지만 숲엔 아직 낙엽 타는 냄새가 은은히 깔려 있다. 벌써 늦가을인가.


 ‘꽃은 졌지만 향기는 남아 있더라(花下有餘香)’.


 때론 그 꽃 진 자리에 남아있는 향기처럼 머물던 자리, 그 흔적이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다면, 가을은 그런 사람이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겨울해가 산등성을 넘어서니 어둠도 놓칠세라 산그늘을 따라 내려온다.
몸은 천근이 되고 피로가 온 몸을 그림자처럼 붙잡는다. 산행거리와 시간을 놓고 보면 마음 속 갈등(葛藤)은 몸의 고통(苦痛)이 될 시간이다.


그 고통을 부항령(釜項嶺)에 부려놓고 부항(附缸)으로 살 살 달래 볼 요량이다.
(05, 12. 3일. )


 


글, 사진 / 조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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