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밤비는 소리부터 내리고

(육십령- 빼재 29.2km)

6. 밤비는 소리부터 내리고

밤비는 소리부터 내리고


(육십령- 빼재 29.2km)


 



‘늙고 게을러 절로 세상과 멀어지니 / 초가집 문밖을 지팡이 나가 본지도 오래 / 만권의 책 둥지가 좌우를 에워싼 / 내 생애는 책 파먹는 좀벌레 신세’/


명종 때 시인 소세양(蘇世讓.)은 나이 들어 책 둥지(書巢)에 파묻혀 초연하게 지내다 보니, 문밖출입이 뜸해 오랜 만에 사립문밖으로 나가려는 자신의 심사를 지팡이로 완곡하게 표현한 아름다운 싯귀다.


 옛 선인들은 산에 가는 것을 오르거나(登山), 정복한다(登頂)하지 않고, ‘산에 든다(入山)’ 겸손한 표현을 했다. 세상사가 궁금해진 자신을 빗대어 ‘지팡이가 초가집 문밖을 나가 본지도 오래(杖覆何曾出草慮)’ 이 또한 얼마나 감칠 맛 나는 표현인가.


 우리도 일상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다시 한 달 후 지팡이(Stick)를 앞세우고 남덕유산 아래 합미봉 들머리로 모였다.


문득 반인반수(伴人伴獸)의 스핑크스가 신탁(神託)으로 아버지를 죽이고 고향으로 가던 오이디푸스(Oedipus)를 붙잡고 던진 수수께끼 생각이 난다.


‘아침에는 네 발로 걷고 점심에는 두 발로 걷다가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짐승이 무엇이더냐 ?’


만약 문제를 풀지 못하면 스핑크스한테 잡아먹혀야 할 처지였다.


우리도 지팡이를 앞세우고 다시 모였으니,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처럼 한 달사이 ‘세발로 걷는 짐승’이 되어 나타난 셈이다. 인간의 본질을 꿰뚫는 오이디프스의 답변에 깨달음을 얻은 스핑크스는 스스로를 잡아먹고 사라져 버렸다.


합미봉은 짙은 안개에 갇혀있다.


남덕유산은 물론 십여 미터 앞도 보이질 않는다. 길가 나무들은 이슬비를 잔뜩 머금고 있다. 건들기가 무섭게 투둑 툭, 차가운 물방울이 옷을 흠뻑 적신다. 몸에 닿은 물기가 차갑게 느껴진다. 팔뚝으로 소름이 돋았다.


이상하리만큼 그동안 대간산행 때마다 비를 만나던지, 짙은 안개로 고생 했었는데, 오늘도 어김없이 출발부터 발걸음을 힘들게 한다.


산에서 높은 산이 대접받는 이유는 간단하다. 높던지 크던지.... 남덕유산은 크고 높다. 높으니 산세가 가파르다. 숨이 가빠지고 이내 땀이 솟는다.


올라갈수록 안개는 굵은 빗방울로 바뀌며 땀과 뒤범벅이 된다. 비에 젖으나 땀에 젖으나 옷은 마치 물에 담긴 듯 몸에 휘감기고, 바람까지 거세어진다.


장수덕유산 아래 안부까지 무려 3시간 이상이나 소요된 힘든 코스였다.


그보다 허기가 몰려오며 발걸음을 자꾸 헛딛게 한다간신히 바위틈사이로 몸을 숨기고 식사를 했으나 비바람 탓인가, 도시락 안으로 물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며 뒤섞이니 비빔밥(?)이 된다.


추위 탓으로 몸이 덜덜 떨리는 건지,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인지 모르겠다.


동학민란 때 이곳 농민군들이 싸움터에서 밥과 찬을 섞어 급하게 비벼 먹다보니 비빔밥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우리도 어쩔 수 없이 우중식사를 했다. 식당은 장수덕유산 남쪽 안부바위틈이요, 메뉴는 비(雨)로 비빈 비빔밥이다. 비, 비빔밥(?).


 






아름다운 것은 언제나 가슴속에 있기 마련이다


덕유산 남쪽에 있으니 남덕유산(1,507m)이요, 서쪽으로 장수군 경계지에 또 하나의 봉우리를 올려놓았으니 장수덕유산(1,500m)이다.


육십령에서 거의 4시간 동안이나 안개비속을 걸어 온 셈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남쪽 하늘이 파란색으로 조금씩 열리고 있다는 점이다.


거센 바람과 성근 빗방울은 기념촬영조차 쉽게 허락하질 않는다.


1/1 1/8...1/125 1/500 1/1000초. 짧은 셔터속도로 영원을 기억해 놓겠다는 부질없는 욕심을 부리는 내게 ‘그냥 바라보기만 하라‘ 한다. 그래도 된다, 바라보기만 해도 된다. 풍경도 마치 내 것인 냥 욕심 부려선 안 된다.


억겁(億劫)이라는 세월을 놓고 보면, 우리네 삶이라는 것이 한 여름 밤 반딧불보다 못하거늘, 그까짓 사진 몇 장보다 그냥 가슴속에 남겨두라는 말이 맞다.


절경은 결코 시(詩)가 되지 않는다. 다만 마음속 느낌으로 남을 뿐이다.


삿갓재 대피소 까지는 능선길이니 여유가 생긴다.


아마 이곳쯤 되었으리라. 라면을 칼로 잘라 먹었던 기억이 남은 곳이 삿갓재 앞 능선으로 기억되는데...30대 중반 쯤 되었던가, 아직은 젊다는 것 하나로 덕유산 왕복종주를 감행 한 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무모한 계획이었지만 산행을 하나의 기록갱신쯤으로 생각했던 때였다.


왕복종주라 함은 북덕유산에서 출발 남덕유산을 올랐다가 다시 향적봉 산장으로 돌아오는 당일 코스다. 그러나 문제는 저녁 식사 때 발생했다. 부식 맡았던 막내 대원이 저녁으로 챙겨 온 것은 고작 라면 한 개씩 뿐, 이미 허기로 후미에 처진 일행의 흔적은 보이질 않고, 그냥 놔두었을 경우 알량한 라면하나도 누구 입에 풀칠할지 모를 상황이었다.


‘라면을 칼로 잘라 먹었다’


얘기인 즉 후미에 쳐진 대원을 위해 라면을 코펠 안에서 잔뜩 불려 묵 처럼 굳힌 다음, 칼로 네 등분하여 자신의 정량만 먹게 했다.


너무 야박하다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르지만 배고픔 앞에선 부자(父子)도 없다는 말이 생각이 나서 했던 일이었는데, 훗날 산행 때 마다 ‘칼로 자른 라면’은 웃음으로 회자 되곤 했다. 그날 산행 실 거리는 대략 백 여리 길로 먼 거리였으나 먹거리 준비가 너무 소홀했던 것이다.


이튿날 무릎통증으로 도저히 앞으로는 걸을 수가 없어 설천봉 코스를 뒤로 걸어서 하산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나이 들수록 가을비는 함부로 맞는 것이 아니란다.’


어머님께서 곧잘 하시던 말씀이다. 봄비와는 달리 차가우니 자칫 병을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지 더 춥게 느껴졌다.


산길에서 걷는 맛이란, 사실 눈 맛이나 다름없는데 빗방울이 뜸해지니, 이번에는 짙은 안개가 덕유산 자락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능선은 안개에 갇히고 사라지고 없다.


산에서 풍경은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그러나 안개는 면벽(面壁)과도 같다. 보이질 않으니, 산을 가두며 발길을 힘들게 한다.


장수군 계북면과 거창군 북상면을 잇는 월성치를 지나 1시간여 발품을 팔아 삿갓재 대피소에 도착했다. 어둠도 이내 추녀 밑으로 따라 들어왔다.


대피소는 능선과 능선사이에 숨어있었다.


어둠이 유리창에 내리고 걱정처럼 빗소리가 굵어지는 저녁이었다. 목조건물 추녀 끝으로 떨어지는 빗소리에 문을 나서니, 어둠속에 묻힌 산들이 조용히 빗소리로 존재하고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시대(時代)의 기인(奇人), 소설가 이외수는 ‘비는 소리부터 내린다’ 했던가.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이 아니라, 있음을 없음으로 착각하는 어리석음을 비는 소리로 깨우쳐주고 있었다.


가을비다. 그것도 단풍이 가득한 깊은 산중에서 만나는 밤비다. 낭만이라도 있을 법 한데, 산행 중 내리는 가을비는 걱정만 태산으로 쌓인다.


사실 그건 사람 일이 아니다. 산도 아니고, 하늘 몫인데....그러나 끝내 사람의 일이 되니, 그 걱정을 끌안고 잠을 자야했다. 그러나 잠은 토막이 나서 창밖으로 도망가고, 난 밤새 쫓아다니고, 그랬던 것 같다.


아침에 눈을 뜨니 온몸이 누구한테 흠씬 얻어맞은 것처럼 무겁고 피곤했다.






산길은 가을비에 젖고 길도 단풍도 젖고...


새벽잠을 털어내고 부지런을 떨어 봐도 오늘 산행거리는 빼재까지 약20여km, 오십 여리 길이다.


혹시나 했던 무룡산(1,492m) 일출은 안개속이고, 안성면 용추계곡으로 이어지는 동엽령(1,260m)을 거쳐 백암봉 앞 능선에 올라서니 안개가 걷히며 늦은 아침시간이 된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내려서면 일곱 개 연못사이 일곱 개의 폭포가 있다는(七淵七瀑)계곡으로 그 아름답기와 신비로움으로 누구나 진리를 찾게 된다는 심진동(尋眞洞)으로 알려진 칠연계곡이요, 남쪽으로 첫 발길 닿는 곳은 거창군 북상면이다.


북상 모리(某里), 북상면 ‘아무개리’라는 뜻이다. 굳이 지명을 밝히고 싶지 않거나, 모르거나 없다는 곳이다. 이미 죽어버린 몸이니 고향으로 돌아 와 이름조차 숨긴 선비 한분이 노후의 절개를 의탁했던 곳이다.


한 때 같이 근무했던 직장동료의 선대 어른이었다.


병자호란 때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대표적인 척화파(斥和派) 선비로 알려진 동계(桐溪) 정온(鄭蘊)은 인조임금이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하자, 그 치욕을 신하로서 차마 견디지 못하고 할복을 도모했으나, 목숨이 모질어서 끊지 못하고 낙향하여 남덕유산으로 들어갔다.


훗날 세상 사람들이 어디 갔냐고 물으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부끄러워 이름조차 지을 수 없고, 그냥 아무개 동네라며(某里鳩巢記),’ 은신했던 곳이 북상면 농산리 모리산 중턱, 거창모리(巨創某里)다.


안개는 아직도 미명이고 이슬비까지...산행은 갈수록 첩첩산중이다.


이제 대간 길은 백암봉에서 덕유산과 헤어져 동쪽 능선 길로 돌아가야 한다. 곧장 북쪽 능선을 따라 덕유평전과 중봉(1,594m)을 오르면 남한에서 네 번째로 높은 덕유산 정상 향적봉(1,614m)이다. 정상으로 가는 길은 가슴까지 시원해지는 능선 길로 1시간 남짓 소요된다.


정감록에서 호남의 첫째 길지로 꼽은 산은 무주의 덕유산이다. 택리지는 덕유산을 지리산과 더불어 가장 살기 좋은 길지로 보았으며, 남사고는 무풍 북쪽을, 그리고 택리지를 쓴 이중환은 설천을 최고의 피장처로 꼽았다.



사람살이에서 만남과 헤어짐을 인연(因緣)이라 했다.


산세도 이어짐이 있으면 갈라섬이 있게 마련, 꽃이 져야 열매가 맺히듯, 그 모두가 자연의 순리니 서러워 말라한다.


헤어져 봐야 안다. 같이 있을 땐 잘 보이지 않지만, 산도 사람일과 다름이 아닐 터, 덕유산과 헤어지니 덕유산이 더 잘 보이는 이치와 같다.


산도 떠나봐야 산을 제대로 볼 수 있다. 그 거리(距離)가 아름다움이다.


귀봉(1,400m)을 넘어 횡경재를 지나 지봉(1,302m)에 올라서니, 중봉너머 북덕유산 정상 향적봉(香積峯)이 한 눈으로 들어온다. 과연 장엄한 산세가 큰 산임이 웅변해주는 실로 대단한 풍광이다.


예로부터 덕유산에는 암행어사 마패를 새기던 주목이 많았고, 그 주목의 은은한 향기 때문에 향적봉이라는 이름까지 얻게 되었다.


그곳에서 북쪽으로 마루금을 따라가면 조선왕조실록 5대 사고지(史庫地)중 한 곳으로 단풍 아름답기가 여인의 붉은 치맛자락 같다는 적상산(赤裳山)이 가을 정취를 더해간다. 사고(史庫)는 비어있다. 6,25동란 때 사라진 후 지금은 북한의 김일성대학에 있다는 설이 있을 뿐이다.


조선중기 학자 이만부(李萬敷)는 무풍의 상산(裳山)에서 덕유산 동쪽을 유람한 후 덕유산기(德裕山記)를 남겼었다.


‘칠봉(七峰)위는 향적(香積)인데 이것이 절정이다. 봉우리 위에는 깊은 못이 푸르고 깨끗하며, 좌우에는 흰모래가 깔려있다. 그 나무는 몸통이 붉은색이고 잎은 삼나무와 같으며 기이한 향이 난다’


상산(裳山)이라 함은 아마 적상산(赤裳山)을 얘기한 것 같다. 그러나 깊은 못이 있다는 표현은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다.(적상산 상부에 양수발전소 댐이 있으나 그건 아주 훗날 일이다) 몸통이 붉고 기이한 향이 난다는 나무는 천년을 산다는 주목(朱木)이다. 지금 덕유산을 대표하는 나무는 주목과 활엽수들이다.


지봉(1,302m)에서 대봉을 넘어 오늘 산행 목적지 빼재까지는 약3시간 거리, 지봉에 올라서니 덕유산의 웅자(雄姿)가 온 산을 압도하고도 남는다.


조선조 숙종 때 선비 미수 허목(許穆)도 덕유산에 올라 ‘남방 명산(名山)의 절정으로 덕유산이 가장 기이(奇異)하다. 향적봉(香積峯) 남쪽으로 운봉(雲峰)이 천왕산(天王山) 절정과 맞서 있으며, 열 지은 봉우리와 안개노을이 300리에 걸쳐 뻗어있다‘. 산유기를 남겼다.


덕유산(德裕山)은 지리산과 이어진 큰 산이요, 덕유산의 또 다른 지명은 어느 곳이던지 난리를 피할 수 있는 산이라 하여 ‘덕산(德山)‘으로도 불렸다.


산 아래 사는 사람 산을 닮고, 바다 곁에 사는 사람 바다를 닮듯, 큰 산 아래 살아가면 자신도 모르게 지리산이 되고 덕유산이 된다.


그러나 고개 하나만 넘어도 물맛이 다르고, 십리길만 떨어져도 말투가 달라지는 것이 산이다. 같은 산 아래임에도 전라도 사람, 경상도 사람으로 구분 하듯, 우리네 삶에도 선을 긋고 있다.


하늘에는 경계가 없듯 산도 둘이 아니다(不二). 그리고 산은 본래 색(色)이 없다. 무색이다. 그러나 골짜기 마다 선을 긋고 색칠을 한 것은 인간들이 저지른 일이다.


대봉을 올라서니 보랏빛 투구 꽃 하나가 색 바랜 잎으로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 졌어야 할 꽃인데...차가운 늦 가을비에 흠씬 젖어있다.


보랏빛과 가을비, 비록 남루(襤褸)하지만 여운 있는 색감이다.


투구꽃 뿌리를 달인 것이 중죄인을 다스리는 사약(死藥)으로 쓰였던 생부자(生附子)다. 영화 서편제에서 여주인공 송화의 눈을 멀게 한 것도 생부자로, 식물 중 그 독성이 동서양을 통틀어 가장 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독이 깊을수록 꽃은 아름다워지는가, 저렇게 아름다운 꽃 속에 맹독(猛毒)이 숨겨져 있다니, 마시면 독이 되고 품으면 한이 되는 아름다움, 가시가 없다면 장미가 아름답게 보일까.


투구 꽃에 독이 없었다면 저렇게 고혹적으로 느껴졌을까. 아닐 것이다.


아름다움(美)의 상대적 반의어는 추(醜)가 아니라, 그 속에 숨어있는 살(煞)일지도 모른다. 역사는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늘 그래왔다.


이제 갈미봉(1,210m)을 넘어서면 내리막길이다.


길이 끝나는 곳이 무주군 무풍면과 거창군 고제면을 잇는 빼재(秀嶺)로 이번 산행 구간 종점이다. 덕유산이 이웃한 깊은 산속이라 짐승들의 뼈가 많이 묻혔는지, 아니면 무엇이 빼어났는지-


‘뼈재’ ‘빼재’ 빼어나다(?)





글, 사진 / 조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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