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논개는 기생이 아니었다

5. 논개는 기생이 아니었다

논개는 기생이 아니었다.  


(중재 - 육십령 21.6km)




여름산행은 땀과의 전쟁이다
 중고개재를 올라서니 불쑥 몸을 키운 백운산이 앞을 가로 막는다.
 백운산은 절벽 같은 오르막길이다. 가파른 오르막에 대원들은 거친 숨을 토해내며 이내  얼굴 가득 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선두 천천히 천천히-‘
 더위에 지쳤는지 모두들 달팽이 걸음(蝸牛)이다. 생김새가 달과 팽이를 닮아 달팽이다. 둥글게 생겼으니 여차 하면 거꾸로 굴러 떨어질 형세다.
 이런 때 일수록 위쪽을 보지 말고 발밑을 보라했다. 발길을 옮길 때마다 굵은 땀방울이 뚝 뚝 떨어진다. 비탈길은 발길을 힘들게 잡는다. 아무리 급해도 건너 뛸 수가 없다. 오직 정직한 발걸음만이 능사다.
 그렇게 땀을 쏟으며 걷노라면 어느새 머릿속까지 맑아진다. 걷는 것 자체가 명상이 된다. 그 쯤 되면 몸도 명상을 한다.
 ‘뽀올래 뽀올래-’
 남아프리카 최고봉 킬리만자로 등정 시 가이드는 ‘뽀올래’를 반복한단다.
 뽀올래 ’천천히 오르라’는 말이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자기 체력만 믿고 서둘다 곧잘 고산병에 걸려 산행을 포기하는 경우가 있지만 노인들은 좀처럼 낙오하지 않는다.
 달팽이 걸음으로 걷는다고 땀조차 천천히 흐르지는 않는다. 한번 터진 땀은 걷는 속도와 상관없이 줄줄 흘러내린다. 대단한 더위다.


 왜 사서 이 고생인가, 그냥 묻고 싶었다.
 어떤 이유가 되었던 땀을 흘리며 묵묵히 걷는 대원들 뒷모습에서 순간, 엄숙함이 느껴진다. 문득 삶에 대해 좀 더 진지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여름산은 그 자체가 고행이다. 땀은 모자 끝에 소금기를 남긴다.
 중재를 출발한지 무려 3시간여 만에 백운산(1279m)정상에 올랐다.
 땀을 흘린 만큼 바람은 상쾌했고, 무엇보다 멀리 지리산 모습이 한눈으로 조망되었다.


 아- 지리산! 장엄한 마루금 풍광이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이조 명종 때 선비 갈천(葛川) 임훈(林薰)도 고향 뒷산인 덕유산에 올라 천왕봉을 바라 본 느낌이 이와 같았을까. 그가 남긴 산유기(山遊記)에 ‘지리산 천왕봉만이 구름 속에 몸을 반쯤 숨기고 있으니(而獨智異之天王峯, 半隱於雲中), 지리산이 뭇 산위로 높이 벗어나 있음이다(可知智異之高出於群山也). 지리산의 장엄함을 산유기로 남겼었다.
 ‘장엄하다’ 함은 쉽게 접근하기 힘든 풍광에 상서로움이 깃든 풍경이다. 그런 풍광이 운무(雲霧)에 갇히니, 마루금은 말 그대로 장엄함이 된다.
 마루금은 하늘길이다. 산 짐승이 흔적과 체취로 제 길을 만들 듯, 우리도 마루금에 땀과 발자국을 남기며 걷고 있다. 이제 마루금을 우리 영역으로 끌어 들인 셈이다. 하늘에 발자국을 남겼으니 실로 대단한 흔적 아닌가.


 오늘 산행구간 육십령까지는 22km, 오십 여리 길, 백운산을 올라왔으니 큰 짐을 벗은 느낌이다. 백운산 오르막은 소문대로 대단했다. 땀으로 목욕을 한 셈이다. 백운산을 올랐으니 가슴까지 시원했다.
 영취산까지는 식후답(食後踏)인지라 기운도 되찾았고. 더구나 평안한 능선길이다. 길이 편안해지니 힘든 오르막길이 언제 힘들었냐는 듯, 산길은 이내 왁자지껄 시끄러워진다. 지극히 일상적인 산길의 모습이다.
 영취산(1.076m)은 지리산을 마주한 전라북도 진산(眞山)이요, 또 다른 지명은 장안산이다. 그리고 ‘춤추는 용(舞龍)’, 무룡고개에서 분기되는 금남 호남정맥은 장수 팔공산을 거쳐 진안 주화산에서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으로 갈라선다. 그리고 이곳에 근거를 둔 금강 발원지는 장수군 신무산(896m) 뜬봉샘이요, 섬진강은 진안 백운산 데미샘이 발원지다.


 지도상에서 장안산(1,236m)과 백운산 사이 계곡은 6.25동란 전후 빨치산 활동이 극심해서 주민들을 소개시키기도 했던 지지계곡이다. 그 깊이만도 40여리요, 무룡고개 북쪽 계곡 윗쪽은 장수군 계남면 주촌리로 논개(論介)의 고향이다.
 작가 이병주는 그의 자전적 소설 ‘지리산’에서 하나의 사실이 ’태양에 바래지면 역사(歷史)가 되고, 달빛에 물들면 신화(神話)가 된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무령고개 남쪽 지지계곡의 전쟁실화는 역사가 되었고, 논개가 태어난 장수군 주촌 마을은 신화가 된 계곡이다.




산에서 마루금은 하늘이 남기 길이다.

  산고수장(山高水長)의 고장, 장수에서 태어난 논개의 사주에는 개 술(戌)자가 네 개나 들어있다. 갑술년 갑술월 갑술일 술(戌)시에 태어났다. 사주만 놓고 보면 ‘개를 낳았다’ 놀림을 받을 만도 하다. 이름조차 논개, 주논개(朱論介)다. 그러나 그녀는 나뭇가지(支)를 들고 교태를 부리는 여자(女), 기생(妓生)이 아니다.
 서당 훈장이었던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시자 숙부는 호구지책을 빙자, 민며느리로 시집보낼 궁리를 했다. 그런 사정을 알았던 장수현감은 부인 병수발로 논개를 거두어 주었고, 부인과 사별한 후 논개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
 그러나 진주성 싸움에서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로 참전했던 현감이 패전하여 자결하자, 논개는 승전연회장에 기생으로 변복하고 들어가 왜장(倭將)‘게야무라 로구스케’를 끌어안고, 장맛비로 넘실대는 남강으로 뛰어 들었다.
 논개의 최후는 비장했다. 왜장의 주먹질에 목이 부러지고 코와 입에서 피를 쏟으며, 죽어서도 왜장을 놓치지 않기 위해 열손가락에 가락지를 끼고, 필사적으로 탈출하려 몸부림치는 왜장의 허리를 두 팔로 묶고 물속에서 최후를 마친 것이다.
 ‘내 몸 사슬을 풀어봐라-’
 아주 오랜 시간, 무려 500년이나 지난 후에 여류작가 김별아는 논개를 그렇게 그렸고, 시인 변영로(卞榮魯)는 열정적인 어조로 논개를 추모했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양귀비꽃보다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훗날 그녀의 죽음은 시(詩)가 되었고, 역사(歷史)가 되었다.
 사람들은 시기(詩妓)로는 ‘북 황진이’ ‘남 매창(梅窓)’이요, 의기(義妓)로는 ‘남 論介‘ ’북 桂月香‘이라, 칭송했지만 그런 명분이 논개로 하여금 강물로 뛰어들게 한 것은 아니다. 논개는 자기를 거두어준 지아비에 대한 헌신적 사랑과 신분차별이 분명했던 시대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용기있는 여인이었다. 그리고 그 죽음조차 역사가 외면하지 못하게 만든 여성이었다.

 한때 우리와는 연(緣)이 없어 전혀 모른다고, 고개를 좌우로 젓던 사람들도 진주(晉州)는 논개(論介)가 죽은 곳이 남강(南江)이므로, 장수(長壽)는 태어난 고향이고, 함양(咸陽)은 죽어 묻힌 곳이니, 이젠 서로 자기네 고장과 연고(緣故)가 있다며, 앞 다투어 길가에 커다란 입간판을 세우고, 상업적 계산을 하고 있는 것이 요즘 세태이다.
 논개는 한 사람이었으나 죽음은 셋이서 나눈 셈이다. 수 백 년이나 된 죽음도 팔고 사는 세상이니, 굳이 누굴 탓 하랴마는. 왠지 그냥 쓸쓸해지는 이유를 묻고 싶다.
 
 그리고 무령고개 남쪽 지지계곡엔 동상이 걸려 빈사상태로 붙잡힌 처녀 빨치산과 그녀를 돌봐준 토벌대 김대위와 이루어 질 수없는 순애보가 아직도 전설처럼 구전되는 곳이다.
 토벌대 장교는 처녀 빨치산을 몰래 자기 고향으로 돌려보내 치료한 죄로 끝내 사형선고를 받았고, 치죄(治罪)에 시달리던 빨치산 처녀는 자신을 사랑한 김 대위 결백을 주장하며 자결하고 만다.
 훗날 송요찬 장군은 김대위를 복권시켜주었지만, 빨치산 처녀는 ‘북에서 버림받고 남에선 외면당한’ 신화가 되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두 여인의 나이는 꽃다운 19세였다.
 논개는 죽어서까지 집안 어른들이 왜놈들 눈치를 보느라 그랬는지, 힘센 장정60명이 없어 육십령을 넘지 못했는지, 아니면 안의현에서 장수까지 옛길 육십 리가 너무 멀었던지, 끝내 육십령 넘어 고향으로 가지 못하고 함양군 서상면 금당리 방지마을 양지바른 곳에 묻히고 말았다.
 저기 저 고개를 넘으면 꿈속에서 조차 그렇게 그리워했던 고향인데... 논개는 죽어서도 고향땅에서 외면을 받았던 것이다.

 영취산에서 깃대봉(1,014m)까지는 암릉과 조릿대가 산행을 가로막는 능선길이다. 민령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좌측 계곡으로 내려서면 논개 생가지(生家地)로 갈 수 있다. 크게 힘들여 오르내리는 코스는 없지만 산은 서서히 키를 높인다. 덕유산 줄기에 가까이 왔음이리라.
 ‘아 - 그래요 그럼 한 시간이면 됩니다.’
 한 시간이라- 벌써 영취산에서 5시간 가까이 능선 길을 지치도록 걸어왔는데... 어찌되었던 전화 속으로 들려오는 금당리 석식 예약 집 아주머니 목소리는 반갑다. 이내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다.

 한 시간이면 된다는 아줌마 대답은 펼치면 십리요, 접으면 오리길인 것이 산길인지라, 산은 자꾸 몸을 일으키며 가로 막아선다. 내 몸이 지쳤음이다.
그것이 산길이다.  ( 06. 9. 3) 

 


여름산행은 물과의 싸움이다


 


글, 사진 / 조관형


dutha5454@naver.com

뉴스울산 (newsulsan@hanmail.net)

저작권자 ⓒ 뉴스울산(nunnews.kr) 무단복제-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