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조관형의 '백두대간 그 길을 걷다'
미안하다 꽃들이여 - (성삼재 - 여원재 18.1km )

미안하다 꽃들이여 -
(성삼재 - 여원재 18.1km )
지리산 그늘에서 살았던 선인들은 사는 일이 왠지 허전하게 느껴 질 땐 성삼재에 올라 계곡아래서 피어오르는 안개와 노을에 취해보라 했다.
지리산 연하(煙霞)를 감상하기 좋은 절기로는 백중 전후가 좋고, 안개가 피어오르기에 알맞은 해발 1천여미터 근처, 8부 능선쯤이 좋다 했으니, 성삼재는 정령치와 함께 안개(煙)와 노을(霞)을 즐기기에 좋은 곳이다.
그 연하를 즐기다 보면 세상사 잊고 입산하는 사람도 생기게 마련, 혹시 아는가, 장생불사한다는 유하주(流霞酒)라도 한잔 할 수 있는 호사를 누릴 수 있을 런지...
버스에서 내린 시각이 새벽2시, 성삼재는 짙은 안개속이다.
불과 몇 미터 앞도 분간이 안 된다. 안개가 가득한 고갯마루엔 전국에서 몰려온 관광버스가 풀어놓은 등산객들이 산행준비를 하느라 시끌벅적, 시골장터 분위기다. 여기저기 후라쉬 불빛이 뒤엉키며 한바탕 소란을 피운다.
사방에서 자기 소속팀을 찾는 목소리가 불빛과 함께 어지럽게 날아다녔다.
대부분 지리산 종주하는 팀들인지, 만복대를 찾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대간팀은 우리뿐인 듯싶다. 오늘 구간 목적지 여원재까지는 18km, 실거리로는 50여리, 걸어 볼 만한 길이다.
삼한시대 각성받이 3명이 고갯마루를 지켰다 해서 붙여진 성삼재(性三峙)에서 재(峙)는 산(山)과 절(寺)이 만나는 곳이다.
오래 전 절(寺)은 관아 역할을 했던 탓으로 비교적 높은 곳에 지었으니, 재(峙)는 산처럼 우뚝 솟아있어(屹立) 높은 언덕(高丘)을 뜻하기도 했다. 노고단 아래 성삼재라 불리었으니 고갯마루 안부가 되었으리라.
성삼재에서 만복대(萬福臺)까진 십 여리길, 가을이 되면 억새꽃이 가장 아름다운 봉우리라 알려졌지만, 지금은 온통 어둠뿐, 야간산행임을 고려해도 2시간이상은 땀을 흘려야 할 것 같다.
산길을 들어서니 땀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초입부터 이슬에 젖은 옷이 몸을 휘감는다. 지독한 안개속이다. 안개가 짙어지니 는개가 되어 옷을 적신다.
오래된 전설이지만 섬진강 물이 넘쳐 배를 걸어 두었었다는 고리봉(1,248m)에 올라서니 좌측 계곡 아래로 희미한 불빛이 보인다.
‘어어 - 깊은 산중인데... 웬 불빛? 어디쯤일까’.
누군가 구례군 산동면 산동마을이라며 거든다. 산동은 예로부터 우리나라 산수유 총 소비량의 60%를 공급하는 최대 생산지다. 1천살이 넘는 시목(始木)도 있으며, 500년 이상 된 고목도 무려 2,500여주나 되는 산수유 마을이다.
시인 곽재구가 노래한 ‘산수유 꽃 섧게 피는 꽃길 칠 십리’를 노래한 산동마을이다. 봄이 되면 노오란 산수유 꽃무리가 마을전체에 드리우니 아름다운 꽃길 칠 십리가 되고도 남았으리라.
그러나 이렇게 깊은 산속에도 애석하게도 민족의 비극은 비껴가질 못했다.
1948년 여순반란 사건 때 좌익에 협조했다는 죄목으로, 총살형을 앞둔 아버지와 오빠를 살리기 위해, 대신 죽어야 했던 열아홉 산골처녀가 끌려가면서 불렀다는 ‘산동애가(山洞哀歌)’는 지금도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
‘잘있거라, 산동아 산을 안고 나는 간다.
열아홉 꽃봉오리 피워보지 못한 채로
까마귀 우는 골에 병든 다리 절며절며
달비머리 풀어 얹고 원한의 넋이 되어
노고단 골짜기에 이름 없이 쓰러졌네 (산동애가 부분)
지리산 만 가지 복이 서려있다는 만복대도 동족상잔의 비극은 어쩔 수 없었던가. 능선에서 바라 본 안개 속 산동마을 불빛은 반가웠다. 그러나 오빠대신 죽음을 선택한 꽃다운 처녀의 애절한 목소리가 금방이라도 들려 올 것 같아 자꾸 눈길이 갔다.
시간상으로 보면 아마 일출 쯤 되었을 텐데... 길은 어디쯤일까.
성삼재에서 시작, 고리봉, 만복대, 정령치, 세걸산으로 이어지는 지리산 서부능선은 짙은 안개에 갇히었다. 얼마쯤 올랐을까. 안개 속임에도 정상인 듯 돌탑이 나타났다. 만복대(1,433m) 정상이 맞다. 본래 이곳에 올라서면 지리산 3대 주봉인 노고단과 반야봉, 천왕봉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유일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상은 안개에 잠기고... 눈길은 조망을 잃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밤새 걸었으니 허기까지 몰려온다.
지리산 만 가지 복이 이름 모를 야생화로 피어났는가. 돌탑주위로 꽃들이 오순도순 모여 있다. 노란 원추리꽃. 자주색 붓꽃. 범꼬리, 기린초, 아- 이 꽃은 어릴 적손에 넣고 비벼대면 오이냄새가 난다는 오이풀꽃이다. 산에서 사니 산오이풀 꽃일게다. 꽃도 때가되니 놓칠세라 서둘러 피어났으리.
여기저기 앙증맞은 꽃 손을 내밀며 이름을 불러 달란다.
생면부지의 사람도 이름을 불러주면 쉽게 친해지기 마련인데, 세상을 그렇게 뜨겁게 살아오지 못한 탓으로, 난 그대들 이름을 모두 불러줄 수가 없다. 아니 기억하지 못한다. 미안하다, 진정 미안하다 꽃들이여-.
삼한시대 진한과 변한에게 밀린 마한의 왕이 정씨 성(性)을 갖은 장군을 보내 성을 지켰다는 정령치(鄭嶺峙)에 도착하니 늦은 아침이다.
말 그대로 밤새 안녕이다. 모두들 물에 빠진 생쥐 꼴이요, 비에 젖은 오리 모습이다. 뒤뚱거리는 걸음조차 닮았고, 밤이슬이 스며든 등산화는 질퍽거린다. 신발이 그렇게 무거운 것인지 처음 알았다. 밤새 어둠을 짊어지고 만복대를 넘어 온 셈이니 어둠조차 짊이 되었다.
‘술을 지고는 못가도 마시고는 간다‘. 그러나 밥은 먹고 가야 하니 아침은 큰고리봉(1,304m)에 올라가서 하잖다. 이슬을 털어내며 큰고리봉에 올라서서 바라보았다. 안개에 잠긴 너른 운봉 뜰이 반긴다.
조선시대 최대 예언서 정감록은 운봉(雲峰) 동점촌(銅店村) 주변 100여리를 십승지(十勝地)중 다섯 번째 길지로 점지했다. 어진 정승과 용맹스런 장수가 많이 태어나고, 가난한 백성들은 몸을 온전히 보전 할 수 있다는, 지리산 자락 해발 400-500미터, 고원분지에 위치한 십승지다.
동쪽으론 남도 최대관문인 팔량치(八良峙)가 있고, 서쪽은 남원으로 넘어가는 여원재, 북으론 백두대간 줄기가 버티고 서 있으니, 가히 지리산 운해가 빗어놓은 천혜의 길지(吉地), 운봉(雲峰)이 되었으리라.
이곳에서 동쪽 능선을 따라 내려서면 세걸산을 지나 철쭉으로 유명한 바래봉이요, 바래봉 동쪽아래는 태조 이성계가 왜구와 싸울 때 ‘달빛을 끌어들였다’는 인월이다.
팔량치는 지리산 북쪽 운봉현에 있어 경상도와 전라도를 이어주는 관문이라(雲峰縣 在智異北 八良峙 上卽全慶通行之大路). 擇里志의 기록이다.
그 고개를 넘으면 경상도 함양 땅이다.
그러나 대간은 서북능선을 따라 운봉읍 고촌리로 내려서야 한다.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이라, 산은 물(광천)을 건너지 못하고 물 또한 산을 넘지 못하니, 길은 노치마을로 우회해야한다. 좌우로 정갈하게 자란 소나무 숲길이 인상적이다.
수간이 붉은 빛을 띠는 적송과 검은색의 곰솔(黑松)은 원산지가 모두 우리나라임에도 해송은 추위에 약한 탓으로 해안가를 중심으로 널리 일본까지 분포가 되어있어 자칫 일본산으로 알기 쉽다.
몇 해 전 출장 중 일본 황궁에서 보았던 흑송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황궁 내 곰솔은 정원수라 그런지, 뭉툭하게 잘라낸(剪枝) 가지와 검은 수간에 짙은 눈썹의 솔잎까지, 당차고 험악한 모습의 ‘사무라이’를 연상케 했다. 그러나 이곳 곰솔은 자연스럽게 내버려두니 보기에도 좋다. 길조차 편한 느낌이 든다. 그것이 자연이다.
대간(大幹)은 ‘물 가름’ 분수령(分水嶺)이다.
지방도까지 내려온 대간 길이 물을 가르니 동쪽으로 흘러내린 물은 곡성, 구례를 거쳐 섬진강으로 몸을 섞고. 서쪽으로 흐른 물은 마천과 산청을 거쳐 남강으로 흘러들어 진주를 거쳐 남해로 스며든다.
고촌리에서 노치마을 까지는 백두대간도 세상소식이 궁금한지, 포장된 지방도(737번)로 내려 온 셈이다. 꼭 높다고 대간 줄기가 되는 것이 아님을 길은 보여주고 있다.
길은 산에서 태어나서 산으로 간다. 그 길 위에 살고 있는 사람도 그와 같다. 그 길을 걷고, 또 그 길을 닮아 산으로 돌아간다.
이곳 마을 지명이 갈대 노(盧)자를 써서 노치마을이 된 것을 보면, 오래전 이곳도 바닷가였던 것 같다. 발음상 갈대가 ‘갈재’로 불렸던 마을의 행정구역은 남원군 주천면 덕치리로, 남쪽으로는 고리봉을 거쳐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대간능선 상에 위치한 유일한 마을이 이곳 노치마을이다.
일제는 노치마을을 풍수지리상으로 지리산 줄기의 시점으로 보았다.
노치마을은 백두산에서 시작한 대간 줄기가 덕유산을 거쳐 지리산을 일으켜 세운 시점으로 판단하고, 혈(穴)을 끊기 위해 합방되던 해에는 그 자리에 커다란 ‘돌침’을 박았다는 것이다.
얘긴즉슨 고리봉으로 올라가는 대간줄기에 폭 20여 미터, 길이가 무려 100여 미터나 되는, 커다란 구덩이를 파낸 후 사람으로 치면 목울대 쯤 되는 곳에 돌로 만든 아귀식 잠금장치 7개를 설치했다. 지금도 그 돌들이 마을 군데군데 정원석으로 남아있는지라, 주민들이 갖고 있는 백두대간에 대한 자긍심을 남달랐던 것 같다.
‘노치마을 소낭구 당산 하나씨한티 절허지 않고 참 샘물을 마시지 않은 사람은 대간을 지나갔다 헐 수 없제-’
마을 노인어른의 말씀대로 노치마을 물맛은 시원하고 좋았다.
적어도 2백년은 됨직한, 잘 생긴 소나무 세 그루가 서있는 노치마을은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형세이다. 소나무조차 명당을 얻었으니 천수를 누리게 되었으리라. 시원한 솔바람과 푸른 들판이 더위를 식혀준다.
한 때 수정을 캤었다는 수정봉(804m)은 가파른 오르막이다. 한 여름 열기로 달구어진 오르막에 얼굴은 온통 땀으로 뒤범벅이다. 나뭇잎도 땀을 많이 흘리면 말라 버리는가, 끝이 모두 도르르 말려 올라갔다.
중국 자금성 안에는 나무가 없다. 성(城)안(口)에 나무(木)가 있으면 곤란(困)한 일이 생긴다 하여 나무를 심지 않았다. 수정봉도 높은 성벽에 갇힌 자금성처럼 나무에 갇혀있다. 조망이 안 되니 바람도 멈추고 더위까지 갇혔다. 말라버린 나뭇잎처럼 갈증이 타올랐다.
여름산행은 늘 그랬지만 오늘따라 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얼굴 가득 흘러내린 땀이 발길을 헛딛게 만든다. 그나마 너른 운봉 뜰이 시원한 눈길을 잡아준다. 고원지대에 이렇게 넓은 들판이라니... 운봉은 ‘천석꾼이 디글디글혔고 조선 팔도가 알아주는 만석꾼도 있었는디-’ 먹고 살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산간 곡창지대, 십승지가 되었으리라.
그리고 운봉은 지리산을 닮아 선이 굵고 소리가 호방한 동편제의 고장이다. 화수리 비전마을은 동편제 가왕(歌王) 송홍록과 손자 송만갑의 출생지요, ‘수궁가’의 명창 박초월 생가도 있으며, 그가 소리를 얻은(得音)곳으로 판소리의 고향이 된 셈이다.
여원재는 김개남의 한이 서린고개다
수정봉에서 입망치를 지나 여원재(女院峙)까지는 십 여리, 평탄한 뒷동산 같은 능선길이다. 바람도 상쾌하고 구석구석 깔린 그늘도 짙다.
운봉에서 여원재를 넘어가면 곧바로 남원 땅이다. 여원재는 고려 말 왜군에게 농락당한 여인이 스스로 가슴을 도려내고 원신(怨神)이 되었다는 전설과 태조 이성계가 왜장 아지발도와 일전을 앞두고, 여원재를 넘을 때 백발의 여인으로부터 왜군을 물리치고, 대승을 거둔다는 길몽을 얻은 고개다.
그러나 동학의 2인자, 남원접주 김개남(金開男)은 관군 외눈박이장군(一目將軍)에게 만 여 명의 부하를 잃고, 통한의 눈물을 흘린 곳이기도 하다.
1895년 5월7일자 일본 시사신보(時事新報)는 당시 서울특파원 다카미(高見龜)기자가 녹취한 동학혁명 재판 방청기사를 보도했다.
‘이미 짐작은 한 바이나 사형선고를 받으면 대개 혼비백산하고, 사지가 떨리며 그냥 주저앉는데 이상하게도 조선 사람은 배짱이 좋다. 사형선고를 받고도 당당하게 걸어 나가는 동학의 거두로 자임하는 네 사람(全, 孫, 崔, 成)은 실로 담대했다.’
훗날 사람들은 ‘천지개벽의 동학세계’를 이루기 위해 조선의 남녘을 열어젖히겠다며 이름조차 개남(開南)으로 고친, 미완의 동학혁명전사(東學革命戰士). 김개남을 기억하고 싶었던지, 사람들은 연꽃이 만발한 전주 덕진공원 한 구석에 그 이름 석자를 돌에 새겨놓고 낮은 소리로 불러 보곤 했다.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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