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조관형의 '백두대간 그 길을 걷다'

흥부마을에서 하룻밤을
(여원재 - 중재 31.8km)
한 여름 더위가 땅바닥을 후끈 달아오르게 한다.
여원재에 중재까지는 32km, 80여리 길이다. 절기도 8월 초순이니 무엇보다 더위가 걱정이 되어, 복성이재에서 민박을 계획했다.
흥부마을에서 하루를 유숙하는 것도 좋으리라 한껏 기대도 되었다.
산행은 들머리부터 비산비야(非山非野)산세이다. 멀리 보이는 고남산(864m)만이 홀로 우뚝 솟아 힘찬 산세가 느껴진다.
왜구가 쳐들어오자 이성계는 무학대사와 함께 고남산에서 3일간 치성을 드린 후 운봉 뜰 황산(荒山)에서 왜군 2천 여 명과 일전을 겨뤘다. 왜장 아지발도는 불과 15세로 어린나이임에도 그 용맹이 뛰어났었는지 관군들이 두려워했던 것 같다.
훗날 사가(史家)들은 이곳 황산전투 승리를 놓고, 이성계가 역성혁명의 빌미를 얻은 전투라 평가했고, 황산전투에서 패한 일본군들은 분풀이로 지리산에 올라 천왕봉 성모(聖母)석상을 부셨다하니, 애궂은 천왕봉만 따귀 맞은 꼴이 되었는가. 아무튼 이곳 사람들은 이곳 황산전투 승리를 기려 고남산을 태조봉이라 불러주었다. 고려 우왕6년의 일이다.
풍수지리에선 산줄기를 용(龍)이라했다. ‘좌청룡 우백호’하는 식으로 큰 산줄기를 살아 움직이는 간용(幹龍)이라 했으니, 신라시대 남원의 옛 지명은 고룡(古龍)이다. 우리는 그 용머리를 타고 장교리에서 고남산을 올라 유치재를 지나 매요리 마을까지 11km, 족히 4시간 이상을 산도 아니요, 들도 아닌 길로 숨은 그림 찾기 하듯 대간을 걸었다.
매요리의 옛 지명은 지세(地勢)가 말허리를 닮았다고 마요리(馬腰里)라 했다. 임란 후 사명대사가 이곳에서 매화의 품격과 같은 분위기를 느끼고 매요리(梅要里)로 바꾸었지만, 지금도 마을 노인들은 애들이 뜀박질만 잘해도 지명 때문이라 여겼으니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 땅의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다.
오래된 시골교회도 백두대간 언덕위에 서 있고, 길머리가 마을 고샅으로 들어서니 점심은 동네구판장에서 라면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게다가 시원한 막걸리까지... 산길만 생각했던 산행에 세상재미까지 숨어있는 구간, 말 그대로 금상첨화다.
취우는 부종일이라 운봉뜰엔 스콜이 짙게 드리우고...
산행에서 술은 도수가 높고 량이 적은 소주가 제격인데, 매요마을에서 시원하다는 유혹에 맘 놓고 마신 막걸리가 몸을 힘들게 한다.
몸은 무거워지고 걸음은 늘어진다. 88고속도로가 내려다보이는 능선 그늘아래서 몸을 뉘이니, 누가먼저랄 것도 없이 코를 골아댄다. 갈 길은 아직 먼데... 모르겠다. 땅 냄새(?)를 맡은 몸은 주체 할 수 없이 이내 깊은 잠속으로 빠져 들었다. 아주 달콤한 단잠이다.
발효된 술독에서 약주를 떠낸 다음 물을 붓고 ‘막걸렀다’하여 막걸리이다.
그 막걸리가 시원하니 술술 잘도 넘어간다. 세상을 너무 입에 맞춰 살다보면 고생은 몸이 하는 이치가 이와 같을까.
군대에서 유격훈련 중 도피 및 탈출이라는 과목이 있다.
그렇게 유격훈련 하듯 88고속도로를 지하로 가로질러서 시치재에 올라서니 베트남에서 보았던 열대지방 ‘스콜’같은 소나기가 지리산 반야봉에서 운봉 뜰 위로 몰려오고 있었다.
‘가자가자 도망가자 비가 처 들어온다-‘
배낭을 짊어지고 도피하는 무장공비처럼 시치재를 넘어 백제군 4만 여명이 신라군에게 전멸 당했다는 아막산성((阿莫山城)쪽으로 급히 올랐지만, 몇 발자국 못가 소낙비가 후드득 소리로 따라 붙는다.
배낭을 멘 등이 공연히 간지러웠다. 한바탕 퍼붓듯 쏟아지는 장대비속을 걸었다. 빗물이 모자 끝으로 줄줄 흘러내린다. 피하려 했던 소나기가 오히려 덥혀진 대지와 심란했던 마음까지 후련하게 씻어준다.
수천 마리의 말이 대지를 질주하는 모습같이 쏟아진다는 소낙비는 종일 내리지 않는다(驟雨不終日)‘. 하늘 일도 그럴 진 데 사람일이야, 불편하다고 피하지 마라. 내릴 것은 내리고, 올 것은 오게 되어있다. 그게 세상일이다.
시치재에서 복성이재까지는 밋밋한 오르막능선 길 9km, 약 3시간 갖고는 빠듯한 코스이다. 복성이재(602m)를 넘어 흥부가 살았었다는, 치재 아래 성리마을로 숨어드니 어스름 저녁이다.
인상 좋은 민박집 아주머니가 아이구 -반갑게 맞아준다. 대간산행 중 편한 잠자리를 얻는 것은 복된 일이다. 아주머니 얼굴을 보니 하룻밤 묵어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같은 길을 걷는 사람들은 표정도 같아진다 했던가, 밤늦도록 이어진 술좌석은 얼굴조차 정겹다. 이곳 성리마을이 흥부마을인 것도 잊고 술만 마신 것 이다. 알고 보면 역사적인 마을인데... 어쨌든 미안함이 남는다.
판소리 흥부가에 ‘경상도는 함양이요 전라도는 운봉인데, 운봉 함양 얼품에 흥부가 사는지라...’
팔량치 아래 인월면 성산리는 흥부의 고향이요, 이곳 아영면 성리는 흥부가 쫏겨 나와 살았었다는, 전설이 지금도 ‘허기재’ ‘화초장바위‘ ’고둔터‘지명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가난하고 무능력한 흥부에 대해 그냥 전래 동화쯤으로 생각할 뿐, 이제는 마음은 흥부지만, 아끼기는 놀부 같은 사람이 잘사는 세상임을 어린애들도 알고 있는 시절이다.
전설도 반쯤은 묻혀있어야 제 멋인데... 흥부에게 제비가 오지 않았다면 과연 살아 볼만한 세상이라 할 수 있을까
봉화산(919m)은 자신의 모습을 좀처럼 밖으로 내놓지 않는 은둔의 산이다.
맘껏 자란 철쭉은 손을 내밀어 길을 막고 하늘을 가린다.
철쭉에 갇힌 봉화산은 보이질 않는다. 1시간여 만에 정상에 올라서니 잔뜩 덥혀진 바람이 억새밭을 흔들고 지나간다. 아침햇살이 벌써 따갑다. 오늘 하루도 땀과의 전쟁을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철쭉이 훌쩍 자란 철쭉밭을 따라 봉화산으로 이어지는 능선 길은 초록바다를 연상케 했다. 꽃피는 5월이면 철쭉으로 유명해진 바래봉한테 형님 소릴 들어도 될 만큼 철쭉꽃이 아름답지만, 꽃이 지고 나니 마치 소박맞은 시골아낙의 모습이다.
꽃도 모여 있어야 봉화산 철쭉처럼 대접을 받는 세상이다.
‘그러타면 붙잡지나 말일이지-’
길섶으로 손을 내밀은 나뭇가지 끝에 걸린 옷깃을 뿌리치며 무심결에 내뱉은 말이다.
초록은 상쾌하고 능선은 장쾌하다
봉화산에서 월경산(982m)을 지나 중재까지는 7km, 완만한 능선 길이다. 대간 좌측은 빨치산 전투로 유명했던 장수군 번암면 백운산 지지계곡이요, 우측은 함양군 백전면이다.
이제 대간 길 남쪽은 전라도에서 경상도 땅으로 넘어 온 셈이다.
마지막으로 넘어야 할 월경산 하나를 남겨두고 있지만, 이번 구간도 무려 15여개나 되는 봉우리를 16시간동안 줄 곳 오르내렸으니, 몸은 벌써부터 신음소리를 내고 있다. 소리도 품고 있으면, 병이된다 했던가.
몸이 지치니 산은 제키를 키우고, 길은 거리를 늘린다. 이쯤이면 가벼워야 할 배낭도 어깨를 잡고 늘어진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했던 불교의 화엄사상과 마조스님의 색심불이(色心不二)는, 적어도 이렇게 힘든 산길에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마음의 영역이 아닐 터...차라리 일체유신조(一切唯身造)라 하고 싶다.
몸(身)을 부딪치며 살아가는 중생들 입장에서 보면 마음(妄心)보다 몸이 더 절실 해진다. 오죽하면 몸 이외는 아무것도 없다. 신외무물(身外無物)이라 했을까. 마음은 허황되기 쉬우나 몸은 허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산에서 몸은 단순하고 정직하다. 몸이 시키는 대로 걸으면 된다.
눈치 빠른 산행대장이 월경산은 옆으로 돌아서 넘어 간다 하니, 와- 몸이 더 좋아 한다. 몸에서 농익은 과일 냄새가 난다. 분명 내 몸 냄새임에도 역겹다. 땀도 몸에 오래 머물면 타인처럼 낯설게 되는가 보다.
그늘아래 숨어있던 여름조차 가쁜 숨을 몰아쉬는 한 낮, 가까스로 중재에 도착했다. 누가먼저 랄 것도 없이 덥디 더운 여름을 끌안고 계곡 물속으로 풍-덩 빠져 들었다.
‘아 - 시원타‘
바람이 소릴 지르며 멀리 달아난다.
글, 사진/ 조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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