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조관형의 백두대간>27-2 남편인줄 알았더니 스님이었더라

백복령 - 삽당령(2) 17.0km

<연재-조관형의 백두대간>27-2 남편인줄 알았더니 스님이었더라

오래전부터 산길을 걸으면서 묻고 싶은 것이 하나있었다.


길에서 그런 궁금증이 생긴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건 다름 아닌 이렇게 높고 험한 산길을 최초에 걸어간 사람은 누구인가? 라는 원초적인 물음이다. 누구일까. 도대체 왜? 누가, 그 멀고도 힘든 길을 만들어 걸어갔을까.


그러나 길은 말이 없다. 그냥 걸어가게 할 뿐이다.


 


지금 내게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필자는 서슴없이 조선 후기 실학자요, 지리학자인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를 꼽을 것 같다.


그리고 백두대간을 종주하다 보니, 오래 전부터 품었던 의문 중 하나는 과연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김정호 혼자 만들었는가 하는 물음이다.


요즘처럼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은 상황에서, 함경북도 온성에서 제주도에 이르기까지의 거리를 남북으로 120리, 동서80리로 나누고 이를 22첩으로 구성, 10리마다 점을 찍고 부락, 관청, 교량, 산성 등 20여개 주요 지형지물을 표시함과 동시에 16만분지 1로 축첩하여 휴대가 가능하도록 만든 대동여지도를 일반 백성들도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김정호 혼자서는 도저히 불가능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부학자들의 주장처럼 그는 백두산도 수차례 오르내렸다는 것이 사실인가. 그러나 그것은 아마 덧붙인 얘기일 가능성이 많다.


필자가 이렇게 백두대간을 종주해보니 백두산 수차 등정은 불가능했을 것 이다. 그러나 대동여지도 제작 하나만으로도 그는 이미 개국 이래 가장 위대한 지리학자요 실학자였음이 증명되고도 남는다.


 


중국의 근대 사상가 노신(魯迅)은 희망을 얘기하면서 ‘그것은 마치 땅위의 길과 같다. 본래 땅위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길 위에 걸어간 사람이 없을 때 최초로 길을 낸 것은 누구였을까 싶다.


필자 나름대로의 산행 경험과 소견으로는, 산에서 최초로 길을 낸 것은 사람이 아니라, 산 짐승이 먼저 일 것이라는 생각이다.


어릴 적 산촌에서 성장한 필자의 경험에 비춰보면 산짐승들은 항상 일정하게 정해진 자기 구역을 반복해서 다니곤 한다. 그 때 짐승들의 발자국을 따라가 보면 그 발자국들이 자연스럽게 길이 되는 경우를 자주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런즉 산에서는, 사람의 길이나 짐승의 길이라는 것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다. 결국 그 길은 같은 길이다. 노신은 ‘희망’도 그 길과 같음을 얘기한 것 일게다.


 


산은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고개(嶺)를 열어 자신을 내놓았고, 백두산에서 시작된 산줄기는 또 다른 산줄기를 내어 끊임없이 이어져 지리산까지 내려 온 큰 산줄기가 지금의 백두대간(白頭大幹)이요, 대간에서 파생된 산줄기가 연결된 것은 정간(正幹)이요, 산줄기가 강을 따라 간 것을 정맥(正脈)으로 이름 했으리라.


그런 길 위에 무릎까지 빠지는 폭설이 내리니, 온 산의 길이란 길은 모두 지워지고 없다. 길이 사라지고 없으니 절망이다. 산행도 그렇게 눈 속에 갇히고 말았다.


그러나 눈 내린 풍경은 아름다운 한 폭의 산수화가 되었다. 그러나 예로부터 아름다운 풍경은 결코 노래(詩)가 되지 못했음을 얘기하기도 했다.


노동의 시인, 박노해는 출옥 후 인적이 끊겨버린 금강산에 올라 천하절경이 적막강산(寂寞江山)으로 변해버렸음을 깨닫고 오직 ‘사람만이 희망’임을, 사람의 흔적이 있어야 마침내 풍광이 되고, 시(詩)가 될 수 있음을 노래했다.


 


그 흔적이 끊긴지 얼마나 되었던가.


먼 산 바라기를 하다 돌아간 것이 벌써 한 달 전인데, 폭설로 갇힌 산은 아직도 길을 내놓지 않고 있다. 조심스럽게 발길을 떼어놓으니 앞서간 발자국이 간신히 눈길을 지탱해줄 뿐이다.


오늘 산행구간 삽답령까지는 오 십 여리가 채 안 되는 길이다.


생계령을 지나 석병산까지는 약12km, 다만 922봉우리를 올라서면 석병산까지는 완만한 오르막길이다. 그리고 석병산에서 두리봉을 거쳐 삽당령은 내리막길로 지도상으로는 비교적 쉬운 코스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 쉽다는 생각이 살아가는 일처럼 산행을 어렵게 한다.


 


노자는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 천지는 어질지 않아 만물을 짚으로 엮은 개처럼 다룬다(以萬物爲芻狗). 하늘이 요동을 치니 길이란 길은 모두 눈으로 덮히고 말았다. 그냥 눈을 퍼부은 꼴이다. 그런즉 요행을 바라지 말라한다.


이렇게 흰 눈으로 단장한 산은 극치미를 보여주지만, 아름다운 풍광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누가 만든 것이 아닌, ‘스스로 그러함’일 뿐이다.


길은 길 위에 갇히고, 산도 길을 품어주지 않는다. 길을 잃은 산은 너그럽지 않았고(不仁) 냉정했다. 우리들에게 그냥 집으로 돌아가라 속삭인다.


 


시작부터 무릎까지 빠지는 눈(雪)길에 눈(眼)길을 많이 주어선가.


카르스트(Carst) 지형에서 용해되기 쉬운 석회암의 주성분인 탄산칼슘이 빗물이나 지하수에 서서히 깎이면서 생긴 깔때기 모양의 구덩이를 ‘돌리네’라 했다. 그리고 돌리네 지하에는 통상 지하 석회동굴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때문에 돌리네로 빠진 물길은 지하 동굴로 이어져있다. 처음 보니 그 생김새부터가 신기했다.


절구모양의 원형크기가 수 미터에서, 크기로 따지면 수키로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것 까지 있다하니, 문득 현대판 지하 만리장성이라 불리는 베트남 ‘구치터널’ 옆에 있던 미군의 대형 포탄흔적과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치터널 주변도 석회성분이 많은 토질이라 수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떨어진 포탄흔적이 무너지지 않고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그 생김새는 속리산 갈령 삼거리 아래 ‘못제’와도 비슷하나, 깊이는 그 보다 더 깊고 인공적인 모습이다.


좀처럼 보기 힘든 지형인지라, 우르르 모여 기념사진 촬영도하고, 눈길을 주다 아무 생각 없이 앞사람의 발자국을 따라가다 보니, 엉뚱한 갈고개 이정표가 나타난다. 아차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그곳에서 곧장 42번 국도로 내려서면 가목리로 한 때 세상의 이목을 끌었던 젊은 여류 첼리스트와 학승의 로맨스가 ‘메주와 첼리스트’로 유명해진 골짜기다.


그들의 사랑은 지금 수 천 개의 항아리로 뜰 안을 가득 채웠고, 몇 해 전인가, 아내는 매일 3000개나 되는 된장항아리를 앞에 놓고 첼로를 연주하며 음악을 들려준다는 얘기를 책으로 펴냈었다.


‘남편인줄 알았더니 남편이 아니더라’.


남편인 돈연 스님은 평균기온이 40도가 넘는 여름, 부처님의 출생지 룸비니에서 열반한 쿠시나가라와 10대 성지까지, 무려 2000km나 되는 먼 구도행각을 떠났던 눈빛 푸른 학승이었다. 그녀는 스님을 만나 이렇게 시골 아낙네로 살아가는 얘기를 담담하게 풀어놓았다.


 


무릎까지 차오르는 눈길을 뚫고, 다시 대간 길을 회복하는데 만도 2시간여 소요되었다. 임계면 백봉령 휴게소로 이어지는 생계령에서 점심식사를 한 시간이 오후 2시였으니, 늦은 점심이다.


생계령에는 앉아 있어야할 간이 의자가 눈 속에 파묻히고 없다.


생각보다 대단한 적설량이다. 생계령 주변도 금강송 군락지다. 붉은색 수간과 추위로 더욱 빛나는 솔잎은 눈 덮인 겨울 산의 정수(精髓), 초록빛과 흰빛이 절묘하게 어울리는, 대칭미를 보여 주었다.


금강송 군락지를 지나, 922봉 안부에서 잠시 휴식을 취할 때 삽답령에서 출발한 다른 종주팀과 조우(遭遇)를 했다. 한계령에서 조침령 구간을 계획했으나 적설량 때문에 코스를 변경했단다. 속으로 걱정이 앞섰다.


‘어 어 울산서 왔네-‘ 눈에 익은 얼굴도 보인다.


 


922봉까지는 적설량이 코끝까지 닿을 급경사이고, 석병산까지는 완만한 능선길이지만 러셀을 해놓았단다. 그러나 산행을 해보니 능선에 쌓인 적설량은 산짐승 발자국을 가두어 놓기에도 충분했다.


이쯤 걸으면 골병(骨病)이 든다하여 붙여진 고병이재에서 뒤처지는 대원을 옥계석회동굴 방향으로 탈출시킬까 생각도 했으나, 적설량을 감안 하면 그것도 위험천만한 일, 늦더라도 함께 걷기로 했다.


그는 아프리카 초원에서 맹수한테 쫓기다 상처를 입고 무리에서 떨어진 임팔라처럼 스틱에 온몸을 지탱하며 절룩이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그의 모습은 겨울 산 풍경 속으로 몇 번이고 사라지길 반복했다.






ⓒ 뉴스울산/ 적설은 소리조차 쌓이게 한다.


 


폭설은 갈 길을 막아섰고, 산은 단 한 발짝도 비켜주지 않는다. 서산에 걸린 해는 바쁜 모습이다. 석양은 언제나 장엄해야 함에도 아름답지 않다.


인색하게 넘어가는 햇살을 노루꼬리라 했던가. 꼬리가 짧으니 뭔가 아쉽고 쓸쓸한 겨울풍광이다. 내일은 날씨가 더 추워질 것 같다.


아직도 삽당령까지는 7km, 지금 속도라면 적어도 4시간은 걸릴 텐데... 그러면 삽당령 도착은 밤11시다. 너무 늦다. 그러나 이미 넘어진 잔(盞)이요, 엎질러진 물이다. 어찌 해 볼 도리가 없다.


어둠을 짊어지고 힘들게 오른 산은 석병산(石屛山. 1,055m)이다. 석병산의 또 다른 이름은 ‘돌 병풍산’ 이다. 이 산에 오르면 정상 서쪽으로 아름다운 수직 암벽 풍경을 잘 살펴보라 했건만...보이는 것은 지천으로 널려있는 흰 눈과 어둠 뿐, 시간은 이미 밤8시를 넘어섰고 사위는 깜깜했다.


석병산은 동남쪽 ‘자줏빛 병풍산’으로 알려진 자병산(紫屛山)과 더불어 짝을 이룬 산으로 알려졌지만, 자병산 또한 어둠속이다. 두리봉(1,033m)을 지나면서 대원들도 서서히 지쳐갔다.






ⓒ 뉴스울산 겨울철 일몰은 장엄하지않고 인색하다.


제발 보름달만이라도 떠오르기를 간절히 바랬다.


도자기를 빚는 도공들이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작업이 달 항아리를 빚는 일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보름이 엊그제인데... 그렇게 휘영청 항아리 같은 보름달이라도 떠올랐으면 위로라도 될 것 같았다.


그러나 겨울나무 가지 사이로 짙은 달무리가 일었다. 길은 그 달무리에 갇혔다. 바람은 소리로 숲을 빠져 나가고, 싸락눈이 헤드랜턴 불빛사이로 거칠게 날라 가고 있었다.


 


어릴 적 선생님께선 함박눈은 뒷동산을 넘어왔지만, 싸락눈은 만주 벌판같이 아주 먼 곳에서 오느라 단단해졌다는 동화 같은 얘기를 들려주었다. 지금도 생각해도 그 말은 설득력이 있는 것 같았다.


두리봉을 넘어서면 산행이 쉽게 끝나리라 했던 예상은 여지없이 빗나가고 말았다. 현재시간이 저녁 8시경, 적어도 2시간은 더 걸어야 할 것 같다. 차가운 바람으로 싸락눈은 더 단단해진 느낌이고, 시간이 갈수록 몸은 서서히 감각조차 없어져 갔다. 사실 이쯤 되면 저체온 증을 염려해야 했다.


 


그리고 산행에서 몸이 지치면 쓸데없이 거리를 계산하는 버릇이 생긴다. 마치 세상적인 지식에만 매달려 살아 온 증거라도 되듯, 머릿속으로는 하지 말아야 할 계산을 산행시간과 잔여거리로 역산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 따위 더는 말자 , 이 늙은이야, 그냥 이대로 가는 거야 난관이 닥치면 형편대로 맞서보는 거라고-’


뜬금없이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에서 거대한 고래를 잡아서 끌고 오다 지친 노인이 혼자 중얼거리던 말이 생각나기도 했다.


그래 더 이상 생각을 하지말자. 지금도 앞으로 또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조차 내려놓자. 다만 지금은 걸어갈 뿐이다. 걸으면 길이 된다. 걷는 만큼 내가 길 위에 있을 시간을 줄여갈 것이다.


 


오늘 산행시작은 08시 30분, 벌써 12시간이상 눈길 만 걷다보니 오랜만에 내린 폭설이 만들어 낸 아름다운 풍경도, 대원 들 간에 주고받던 정담도 덤덤해졌다.


왜 걷는가. 단지 같이 가는 대원들이 걸어가니깐 그냥 걷는 것인가.


지금처럼 더 이상 어떤 생각도 하기 힘든 상황에선 단지 습관적으로 발걸음을 떼어놓을 뿐이다. 그나마 숲속에 어둠이 내린 것은 천만다행이다. 산길에서 만난 어둠은 허튼 생각을 허락하지 않는다.


단지 잘 보이지 않는다고, 어둠의 역할이 끝나지 않는다. 걷다보면 왠지 짧다 싶을 정도로 산행거리를 줄여 주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노련한 등산 리더들은 주행거리가 긴 코스 일수록 곧잘 야간산행을 이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어둠속에선 말을 아낀다. 누구하나 그 힘듦을 겉으로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몸이 시키는 대로 묵묵히 걸을 뿐이다. 마음도 몸을 떠나서는 자유로울 수 없는 것처럼, 이럴 때는 생각조차 몸이 한다.


온몸으로 느끼고 경험한 것들이 생각이 된다. 그렇게 몸으로 체득한 기억은 단순한 서술기억과는 달리 쉽게 잊혀 지질 않는다.


산에서는 언제나 몸이 주인이다. 몸으로 부딪히고 익힌 것만이 삶이 된다.



싸늘한 공기 탓인가. 시간이 지날수록 머릿속은 맑아지고, 가슴속으론 뜨거운 기운이 솟구치며 종일 지속된 무상(無償)의 행위, 산행에 대한 감흥이 몰려왔다. 자신에 대한 소박한 성취감이다.


그건 마치 자신의 존재조차 잊은 채 반복적으로 걸어가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상태와 닮았다. 그렇게 물 흐르듯 무의식적 상황 속으로 빠져들며 시간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상황을, 헝가리 출신 미국의 심리학자 칙센트미하이(Csikszentmihalyi)는 ‘몰입(flow)‘이라 정의했다.


그는 자신의 저서 ‘몰입의 즐거움’에서 인간의 재능(Talent)도 몰입할 때 온전히 발현된다고 했다. 몰입(沒入)이란 자신이 맡은 일에 온전히 즐기는 것이다. ‘즐기는 자를 이길 수는 없다’ 일을 즐기는 자만이 몰입에 이를 수 있음을 얘기했다.


오늘 집을 나선 시간은 새벽 4시, 종일 눈길에서 힘들었다. 산행 때마다 늘 자신에게 가혹 하리 만큼 힘든 산행을 택한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다. 산에서 겪는 고통이나 힘듦은 당당하게 마주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지금 나도 걷는 일을 즐기고 있는 것인가.


 


행여 여여(如如)한 산을 닮아가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출가 수행승처럼 걷는 것도 기도가 될 수 있음을 믿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렇게 진정 한 순간, 몰입을 했었음인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적어도 대간산행을 하는 사람들은 그런 ‘한 순간’을 기대하며 걷고 있는 사람들이다.


 


드디어 삽당령 가까이 온 것일까. 그러나 어둠 탓으로 확신이 서질 않는다.


산은 이미 흰 눈을 이불 삼아 달빛아래 고요히 잠든 모습이다.


적막은 어둠의 산물이며 산은 침묵의 근원이니, 그 적막 속에서 들려오는 바람소리는 ‘대지의 숨소리’라 하여 온갖 구멍에서 저(己)로 말미암아 나는 소리(地籟則衆窮是己)요, 어둠속에도 만물이 있음을 알려주는 소리다.


장자(莊子)는 그런 소리를 땅의 피리 소리(地籟)라 하여, 온갖 욕심과 시비가 들 끊는 인간의 소리(人籟)와 구분했으며, 그 소리는 진정 자기를 버린(坐忘) 사람만이 들을 수 있는 하늘의 소리(天籟)로 정의하기도 했다.


그리고 독일의 카돌릭 수도사인 에카르트는 그 땅의 소리(地籟)를 무심(無心)이라 하여, 어떤 상황에도 연연하지 않는 초탈(超脫)의 경지를 얘기했다.


그 무심은 평상심(平常心)이요, 평상심이 무엇이냐는 조주(趙州)스님의 질문에 스승인 남천선사(南泉禪師)는, 평상심이 바로 도(平常心是道)임을 넌지시 일러 주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그 하늘의 소리(天籟)를 듣기위해 귀에 근사한 고리까지 달고 살아 왔으나, 귀고리는 끝내 그 소리를 전해주지 못하고, 온갖 악 행에 물든 인간들은 하늘의 소리를 외면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고대(신석기시대)로부터 착용해왔던 귀걸이는 조선조에 이르러 선조임금이 금지령을 내리기 전까지 남자들도 달고 다녔던 것으로 전해져 왔다. 그러나 귀고리는 차츰 그 본래 의미가 퇴색되었고 목걸이와 더불어 여인들의 세속적인 장식품으로 전락했으니 평생을 두고 영혼의 목마름에 시달리게 되었단다.


한편의 전설같이 슬픈 일이다.


 


삽당령(680m)에는 그런 땅의 소리, 무심(無心)을 짊어지고, 종일 눈 속을 헤쳐 온 선두 대원들이 배낭을 내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들 지쳐있었다. 그러나 주고받는 목소리는 맑았으며, 어둠속에서도 눈빛은 형형하게 빛났다. 아무 말하지 않아도 대원들은 그 무심의 상황을 눈빛으로 말하고 있었다. 어깨라도 끌안아 주고 싶었다. 순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충만함(fullness)이 가슴 가득 차올랐다.


늦은 밤 10시 50분, 무려 14시간이상 눈길을 헤치고 걸어 온 셈이다.


그러나 우린 밤을 새워 다시 천리 길을 달려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 땅의 샐러리맨들이다.


아 - 길은 언제 끝이 날 것인가. (08. 2. 21 )


 


후기 첨언 ;


이 날 산행에서 참으로 위험한 행동을 했다. 후미에 처진 대원과 같이 걸으면서 대원의 걸음걸이가 힘들어짐을 느낀 나머지 차가운 소주를 권했다. 늘 아무런 의식없이 평소 산에서 술을 가까이 하는 버릇대로 술을 권한 것이었는데 훗날 관계되는 참고서적을 살펴보니 참으로 위험한 행동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적어도 당시 체감온도가 적어도 영하 10도 이하였는데, 그런 혹한에서 술을 마신다는 것은 자살행위와 다름없다는 의학적인 기록을 살펴본 후에야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체온 하나만 놓고 볼 때 생존허용 온도는 불과 2-3도 뿐이다. 평상시 체온이 36.5도에서 불과 1.5도 낮은 35도 수준에서 장시간 노출되기만 해도 자칫 충분히 저 체온 증으로 빠질 수 가 있다는 얘기다.


그날도 우리는 저 체온 증 영향권에 충분히 놓여있었음에도 문제가 안 된 것은 운이 좋았던 것일까. 아니면 지속적으로 몸을 움직이며 이동했기 때문이리라. 어찌 되었던 지금 뒤돌아보면 지나고 보면 아찔한 순간이었지만 이래저래 삶은 감사할 일이 생겨 좋다.


아-그래서 때론 모르는 것이 약이라 했나?


 

뉴스울산 (newsulsa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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