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 무릉선원 두타동천이라 (피재 - 백봉령 (2) 27.5km)

이렇게 겨울 산중에 서 있으면 산의 주인은 누구일까 묻고 싶어질 때가 있다. 바람, 별, 하늘, 햇빛, 아니면 추운 겨울을 산속에서 숨어 지내는 짐승들인가. 그러나 이 산의 주인은 누가 뭐래도 듬직한 나무들이 아닌가 싶다.
특히 이곳에 많이 분포된 자작나무는 그 아름다운 자태로 등산객들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생태학적으로 ‘겨울에도 줄기가 죽지 않는 식물을 나무’라 정의했다.
그리고 시인 타고르는 나무를 ‘땅이 하늘에 말하는 언어’라 했으며, 지금도 북방 유목민족들은 자작나무를 ‘하늘로 가는 사다리(宇宙木, Cosmic tree)‘라 하여 신령스런 정령이 오르내리는 통로로 믿었다.
북구를 대표하는 러시아는 자작나무를 국목(國木)으로 선정했다.
그런 이유가 아니라도 겨울산길을 걷다보면 줄기가 하얗게 빛나는 자작나무가 가장 좋아 보인다. 왠지 친근한 느낌이고 마냥 순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자작나무 숲은 그냥 한번 걸어보고 싶어지는 길이기도 하다.
껍질을 태울 때 ‘자작자작’ 소리가 난다 하여 ‘자작나무’다.
빛날 화(華)에 나무목을 붙으니, 희게 빛나는 백화(白樺)가 되었다. 자작은 단풍과 수간이 아름다운 나무로, 햇빛을 좋아하는 극양성(極陽性)수종이다. 그런 탓으로 양지바른 곳에 뿌리를 내리니 멀리서도 곧잘 쉽게 눈에 띄는 나무다.
옛 시인 묵객들은 그 은백색 껍질(樺皮)에 싯귀(詩句)를 주고받으며 풍류를 즐겼으며, 껍질엔 기름기가 많아 불이 잘 붙는 바람에 양초가 없던 시절, 그 껍질을 태워 어둠을 밝히고, 숯으로는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결혼식을 화혼(華婚), 혼사 때 밝히는 불을 화촉(華燭)은 자작나무를 일컫는 ‘화(樺)’자에서 유래했다. 눈 내린 숲속에서 흰빛으로 치장한 자작나무는 ‘숲속의 가인(佳人)’으로 불리기도 하며 귀족적인 자태가 느껴진다.
그들은 지금도 죽은 자의 영혼이 자작나무 숲에 머문다고 믿고 있다.
신라인들도 썩지 않는 자작나무 껍질 70여 매를 겹쳐 벽에 붙인 후 그 위에 죽은 자의 영혼을 실어 나르는 천마도(天馬圖)를 그렸으니, 지금의 천마총이다. 무려 1500여 년 이상 보존되어 온 그림이다.
갈미봉(1,260m)아래쪽, 자작나무 군락지가 보고 싶으나 지금으로선 난망이다. 어둠이 허락하지 않을 테니 지금 잘 봐두라 한다.
한 때 한양으로 가는 고개였다는 연칠성령을 지나 망군대를 넘어 의상대사 수도처였다는 고적대(1,353m)를 넘어서니, 어느새 짧은 겨울 해는 서산에 걸쳐있다. 살짝 내린 싸락눈이 길을 미끄럽게 한다. 공연히 마음만 다급해진다. 아직도 갈 길은 사십 여리, 어느새 반갑지 않은 어둠이 길 위로 내려 왔다.
길은 어두워지고 발길을 재촉해야 했다. 산행도 이젠 화촉을 켤 때가 되었는가. 헤드랜턴을 착용하고 아이젠을 고쳐 신으며 야간산행 준비를 서둘렀다. 생각보다 산행속도가 상당히 늦어진다. 살짝 얼어붙은 길은 미끄럽기 그지없다. 동절기 산행에서 어둠은 꼭 추위를 동행하고 찾아온다. 그런 느낌 때문인가, 어둠속 공기는 더 차가워졌다.
대간 산행 중 삼척구간에서는 ‘절대 동쪽으로 내려서지 말라’했다.
고도차가 너무 높기 때문이다. 삼척과 무릉계곡이 해발 100여 미터 수준이라면 덕항산에서 갈미봉(1,260m)을 지나 이곳 이기령까진 고도차이가 거의 1,000미터이상, 비탈의 경사도가 마치 까마득한 절벽과도 같다.
오늘은 너무 늦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이 이기령에서 동쪽으로 탈출을 해야 한다. 그러나 이기령 아랫마을까지는 너무 멀다. 몸이 지쳤는지 발길을 헛딛게 한다. 그 때마다 미끄러지고 넘어지고... 얼마쯤 되었을까. 어둠만큼이나 깊어진 계곡마을에 도착하니 밤 10시가 훌쩍 넘었다.
이튿날 다시 지팡이를 앞세워 올라가니 이기령(耳基嶺)이다.
동해와 임계주민들이 장보기 위해 넘나들던 고개였으나 ‘넘기가 힘들다’는 뜻의 강원도 방언, ‘더바지’로 불렸다. 그러나 올라보니 고개라기보다는 넓은 개활지를 연상케 하는 곳이다. 엊저녁 하산길이 마치 꿈속만 같다.
눈 대신 낙엽이 쌓인 하산 길에서 미끄러지고 넘어지길 3시간여, 지칠대로 지친 몸을 지팡이에 의지하다보니 어깨까지 통증이 몰려왔다. 그때마다 지팡이는 또 다른 내가 되어 나를 지탱해주곤 했다.
옛 선인들은 자신이 쓰는 물건하나에도 마음을 담은 기물명(器物銘)을 새겨 넣길 좋아했다.
실학자 성호 이익의 조카이자 18세기를 대표하던 문인 이용휴(李用休)는 ‘나무가 잘못 자라면, 사람이 바로 잡아준다. 사람이 비틀거리면 나무가 부축해준다(木倒生 人行之 人行危 木支之),’는 기물명(器物銘)을 지팡이에 새겨 넣고 다니기도 했다.
그뿐이랴 조선조 초기 방외인(方外人)으로 널리 알려진 김시습은 그의 나이 50대 초, 관동지방을 떠돌다 쓴 시집 동봉육가(東峯六歌) 첫 구절에서 정처 없이 떠도는 자신을 ‘나그네여 나그네여’ 부르다가, 둘째 수에서는 ‘지팡이여 지팡이여’ 지팡이를 반생의 반려자로 불렀다
‘삼척구간에선 절대 동쪽으로 내려서지 마라’했던 대간꾼들의 경고는 그냥 떠돈 말이 아니었다. 이튿날 아침 다시 이기령을 오르는 고통을 감당해준 지팡이는 도반(道伴)과도 같다. 엎드려 절을 해도 부족하다. 그렇게 지팡이 하나로도 겸손을 일깨워주는 곳이 산이다.
이기령에서 상월산(970m)까진 십 여리길, 비교적 완만한 오르막이다.
엊저녁 이기령 아랫마을에 도착한 시간은 밤10시경, 고작 하룻밤을 묵고 올라왔으나 12시간 이상 눈길에서 시달린 몸은 밤새도록 나를 깨우며 신음소릴 내곤했다.
고통도 분에 넘치면 감당이 안 되는지, 걷기는커녕 일어서기조차 힘들게 다리가 후들 거렸다. 무릎엔 힘도 없고, 통증까지 몰려온다.
갓 태어난 새끼가 일어서지 못하면 어미 소가 무릎을 핥아주어 힘을 내게 한다. 그러나 내 무릎을 쓰다듬어 줄, 그 무엇도 없다. 나이가 들면 삶도, 다리도 힘들어 진다. 비록 내 몸이지만 주인을 잘못 만나 고생한다는 생각에 몸이 불쌍하기까지 했다.
원방재(730m)를 지나 1,022봉에서 잠시 숨을 돌린다는 핑계로 오늘 산행 끝점을 가늠해 보았다. 백복령까지는 아직 8km여, 이 십 여리가 남았다.
산행대장은 그럴 때마다 자신 있게 단정적으로 잘라 말한다.
‘오후 2시면 필히 백봉령에 도착 한다 걱정마라-‘
무조건 도착한다하니 이만하면 사기꾼도 고수에 속한다. 그러나 누구하나 산행대장이 지금 사기를 친다고 생각하질 않는다. 대장은 지금 시간으로 거리를 역산하는 무모함을 저 혼자 즐기고 있는 중이다.
멀리 동해에서 정선군 임계면으로 넘어가는 42번 도로가 커다란 구렁이처럼 산중턱을 타고 넘어가고 있는 모습이다. 비록 구간 목적지 백봉령은 보이지 않으나 길이라도 보이니 무엇보다 반가웠다. 앞으로 오르막이 심하지 않은 좌측능선을 따라 2-3km 정도 걸으면 백봉령(780m)에 도착하리라.
산행대장은 조금 전 백봉령을 넘어 가는 길을 보고 큰소리를 친 것이다.
이번 구간 산행거리는 도상으로는 27km이다. 그러나 중간 숙박지 이기령 아랫마을 까지 탈출한 거리까지 감안하면, 구간 거리는 족히 80여리가 되고도 남는다. 출발부터 벌써 15시간 이상을 길에서 서성이다보니 모두들 산행을 빨리 끝내고 싶었던 마음이 간절했던 것이다.
‘이 추운 날 먼 길을 꼭 떠나야 해요-’
등 뒤에서 넌지시 물어오던 아내에게 ‘어찌되었던 산으로 가야한다’ 배낭을 고쳐 메고 현관을 나설 때 들던 자괴감과 돌아와서 아프다는, 신음소리조차 속으로 삼켜야 했던 날 들이 이젠 뱁새눈처럼 눈치만 늘게 했다.
산행에 대한 그런 몰입이 때론 일상에서 느끼는 소소한 즐거움은 물론 가족에 대한 소중함까지 포기해야 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남들이 보면 미쳐도 한참 미친 짓이었으리라. 그런 집착이 지나쳐 도저히 이성적으로 억제할 수 없는 상태를 벽(癖)이라 정의했다.
때문에 벽(廦)이란 단순히 어떤 것을 즐기는 것이 지나친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즐김이 한쪽으로 치우쳐 다른 것을 돌아보지 못하는 상태를 말함이요, 치(癡)는 어리석은 정도가 지나쳐 멍청함이 바보와 같음을 얘기했다.
조선 후기 선비 홍한주(洪翰周)는 남이 즐기지 않는 것을 지나치게 즐기는 벽은 ‘제 몸 죽는 것도 미처 깨닫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 병’이라 했으며, 명나라 오종선(吳從善)은 소창자기(小窓自紀)에서 ‘평생을 팔았어도 이 멍청함(癡)은 다 못 팔았고, 평생을 고쳤어도 이 고질(癖)은 고치지 못했음’을 고백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조차 아둔해서 깨닫지 못하고, 벽(癖)과 치(癡)사이에 빠져 든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행위, 그것이 백두대간 종주라면 궤변이 될까.
누구나 한 번 쯤은 벽과 치 사이를 오가며 살아가는 것이 삶이다.
그런즉 대간을 종주하는 산악인들이여 기운들 내시라-. 정조가 그의 박학을 총애하여 서얼출신임에도 규장각 검서관 벼슬까지 주었던 이덕무(李德懋)의 별호(別號)는 간서치(看書癡), 책만 읽는 멍청이요. 동시대 문인 심노숭(沈魯崇)은 감을 얼마나 좋아했던지 시치(柿癡)라 했고, 돌만 보면 벼루를 깎자고 대들었던 정철은 석치(石癡)라 불렸다.
그렇다면 남들이 볼 때 우리를 뭐라 부를까.
‘산행치(山行癡)’. 세상물정에 어둡고 아둔하게 산만 걷는 바보라 할까.
필자 역시 산을 조금씩 알기 시작한 30대 중반부터는 단거리 산행 보다, 극한 상황 속으로 쉽게 자신을 몰입 시킬 수 있는 장거리 종주산행을 선호했다. 장거리 산행은 다양한 산행 경험과 지리는 물론 역사적인 지식까지 얻을 수 있을뿐더러, 그 기록을 산행일기로 남겨 놓기도 했다.
북덕유 향적봉에서 남덕유산까지 당일 왕복종주를 시작으로, 소백산 희방사에서 단양 구인사까지의 종주산행이나, 거창 수도산(1,317m)과 합천 가야산(1,430m)을 잇는 능선 종주, 지리산(1,915m) 주능선과 남부능선 종주, 내 외설악산 종주, 치악산(1,288m) 남북능선 종주, 속리산(1,058m) 주능선 종주, 운문산(1,108m)에서 가지산(1,240m) 능선종주, 영남의 알프스(7개 봉우리) 종주는 물론, 가지산(1,240m) 1백번, 소백산(1,439m) 40회, 신불산(1,159m) 60여회, 영취산(1,081m) 50회, 두타산(1,353m) 청옥산(1,403m)연속 등정 10여회 등, 등산을 마치 그 산행거리와 횟수의 기록 갱신쯤으로 생각하는 무모한 산행을 즐기기도 했다.
그런 산행에 대한 집착은 비단 나뿐만 아니라, 일부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자신이 갖고 있는 기록에 대한 도전 또는 갱신에 대한 전형적인 집착의 한 형태일 뿐이다.
한편으로 보면 어리석은 산행이었지만, 지금도 그런 기록을 위해 하나뿐인 목숨까지 담보하는 것이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 또한 산행 벽(癖)이 만들어낸 미친 짓(癡)들이다.
남들은 하기 쉬운 말로 ‘왜 사서 고생이냐-’ 했지만 고생을 산(買)것인지 아니면 살아서(生)인지는 모른다.
어차피 사서(買)하던, 살아서 하든, 겪어내야 하는 것이 삶이라면, 생에 있어 고난(苦難)의 무게를 칭량(稱量)해 볼 때, 고난은 만족(滿足)과 등가량(等價量)을 이룬다 해야 할까.
그러나 그 또한 고생을 사서 하는, 산행치(山行癡)들의 궤변(詭辯)이다.
(07. 12.15- 16 )
저작권자 ⓒ 뉴스울산(nunnews.kr) 무단복제-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