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지아비 아홉명과 살다 죽고
(피재 - 댓재 (24km)

옛 선비들은 명산대찰이나 경승지를 그린 화첩(畵帖)을 보며 유람을 즐기곤 했다. 사대부 양반들이 방안에 앉아 즐겼다는 와유첩(臥遊帖)은 명승고적의 화첩을 놓고 즐기는 유람이었으니, 몸이 늙어 장거리 출타가 불가능한 옛 선비들은 ‘집에 앉아서 유람을 한다’는 와유(臥遊)를 즐겼던 것이다.
필자도 가끔 방안에서 산 지도를 펼쳐 놓고 혼자만의 등산을 즐기곤 한다. 앉아서 즐겼으니 ‘좌유(座遊)’라고 해도 될까. 계곡의 흐름과 산세를 살피고, 갈 길과 쉴 곳을 어림하며 지도를 보노라면, 마치 산행하는 냥 마음이 편해지고 맘껏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산행이 되곤 한다.
글쎄 지도를 놓고 삼매경에 빠진다면 쉽게 수긍이 가지 않겠지만,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 가운데 와유하듯 등산을 즐기는 사람도 꽤 있으리라.
그런 와유 등산을 즐기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이 있다.
와유를 즐길 때 지도(地圖)를 본다(視)해야 하나, 아니면 읽는다(讀)해야 하나. 겉으로 드러난 것을 그냥 보는(視)것 보다는 잘 살펴보거나(觀), 밝게 분별하여 본다(察)는 것이 옳을 듯, 그러나 소리 내어 읽을 필요는 없으니 독(讀)은 아니고, 시(視)보다는 마음으로 관(觀)이나 찰(察)을 해야 한다.
지도를 보며 와유(臥遊)에 빠지면, 화첩으로 풍류를 즐기는 선비들의 여유가 가늠된다. 괴테는 산을 한 권의 책이라 했다. 그러나 산은 발(踏)로 읽어야 한다.
산행출발점 피재는 삼척사람들이 난을 피해 넘었다하여 피재라는 설과 옛날 이곳에서 살던 화전민들이 나무껍질(皮)로 목숨을 연명했다 해서 얻어진 지명이라고도 했다.
또 다른 지명은 한강, 낙동강, 오십천의 발원지가 이곳에 있으니 삼수령(三水嶺)이다. 그리고 삼척 도계읍 미인폭포 위쪽 큰덕샘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오 십 번이나 굽이쳐 죽서루를 지나 동해로 흘러드니 그 물줄기가 150여리, 오십천(五十川)이다.
역사적인 기록으로 볼 때 13세기 중엽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진 죽서루(竹西樓)는 명기(名技) 죽죽선녀(竹竹仙女)의 집 서쪽에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오십천 절경에 풍류까지 곁들었으니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가 되었으리라.
노루메기와 새목이를 지나 건의령까지는 6km, 1천 미터가 안 되는 봉우리 두어 개 넘어가는 길이다. 대간 오른쪽은 멀리 동해바다가 병풍처럼 펼쳐졌고 삼척은 산 아래 지척간이다.
고려 말 삼척으로 귀양 온 고려의 마지막 공양왕이 근덕면 궁촌에서 살해되자, 망국의 유신들은 관모(巾), 관복(衣)을 걸어놓고 다시는 벼슬길로 나가지 않겠다하여 건의령(巾衣嶺)이요, 한 겨울 추위와 강풍에 아무리 옷을 껴입어도 얼어 죽을 만큼 추웠다하니 한의령(寒衣嶺)이다.
주능선에서 100여 미터 벗어난 푯대봉(1,009m)에 들러 산세를 가늠해보았다. 산봉우리보다 표지석이 더 크게 보이는 푯대봉은 자칫 엉뚱한 길로 착각 할 수 있는 길이 된다.
길이 아님에도 길로 잘못 알고 들락거린 푯대봉에는 그런 흔적들이 반질반질, ‘길’이 아닌 ‘질’이 되었다. 잠시나마 산행 ‘알바길’도 해보았다.
오른쪽 계곡은 도계읍이요, 왼쪽은 태백시 하장면으로 이제 구부시령에 서면 삼척 땅으로 접어드는 접경지다.
실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삼척은 예로부터 고성, 통천 다음으로 땅도 넓고 그 땅은 기름지다. 삼척은 논에 종자 한 말을 뿌리면 40말은 수확한다. (그 당시 40말이면 평균 수확량임)그러나 이 세 고을에선 인물이 나지 않는다... 잠시 머물기에 좋지만 오래 살 곳은 못된다.(三陟水田種一斗收四十斗然 三邑人物不産... 一時遊賞非久居處也)고 했다.
구부시령까진 잘 자란 참나무 군락지와 듬직한 태백송(太白松)이 눈길을 끈다. ‘일제가 도끼자루를 휘두르니 소나무들이 겁에 질려 산간오지로 숨어버렸다’는 귀한 나무다. 그런 적송(赤松)이 문경에선 황장목, 봉화에서는 춘양목, 그리고 울진지방은 그 강도가 금강석과 같다하여 금강송이요, 이제 태백을 지나왔으니 태백송이라 불린다. 그리고 백두산으로 가면 미인송이 된다.
그러나 잘 생긴 나무는 드물다. 굽고 비틀리고 ‘못생긴 나무가 선산(先山)을 지킨다’고 구부시령 아낙네 모습이 연상된다.
같이 살다 죽고, 살다 죽고, 살다죽고.....그렇게 부실한 지아비 아홉 명을 모시고 삼척시 도계읍 한내리에 살았던 아낙의 기구한 사연이 고개가 되었다. 그러나 구부시령(九父侍嶺)은 고개랄 것도 없는 아늑한 능선 안부(鞍部)일 뿐이다. 단지 신산(辛酸)스런 삶을 살아야 했던 아낙의 모습이 궁금해질 뿐이다.
이쯤에서 며느리밥풀 꽃이 자생한다는 곳인데... 제사상에 오를 쌀밥을 훔쳐 먹었다는 오해로 시달리다 죽은, 가난한 집 며느리 무덤가에 피어났다는, 며느리밥풀꽃이다. 그뿐이랴, 며느리밑씻개, 며느리배꼽, 며느리주머니... 시어머니와 대립각을 이루던 사이라서 그런지 며느리와 관련된 꽃 이름은 그 자체가 욕말이나 다름없다.
먹다 들킨 쌀밥 같은 꽃술 두 개를 들고 서 있는 모습이 마치 미운 며느리 같다는 꽃, 구부시령 아낙네도 그 꽃을 닮았을까. 그러나 색깔은 자주빛 진홍색으로 왠지 좀 서글퍼 보이는 꽃이다. 이름 때문일까.
오늘 구간 중 가장 아름다운 풍광을 갖고 있는 덕항산(1,070)이다.
‘가파른 산을 넘으면 화전 일구기가 좋은 편평한 땅이 있어 덕을 봤다’ 해서 ‘덕메기산’으로도 불렸다. 계곡아래 풍경을 살펴보니 이 구간에서는 ’동쪽으론 절대 내려서지 말라’ 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산 아래로는 천 길 낭떠러지, 헛딛기라도 하는 날엔 목욕하던 여인이 홀연히 사라졌다하여 붙여진 동양최대의 석회암 동굴인 환선굴 아래 계곡까지 단숨에 굴러 떨어질 형세이다.
실제로 그 아래 계곡 신기면 대이리는 6.25전쟁이 터진 것도 몇 개월이 지난 후에 알았을 정도로 첩첩산골이다. 아직도 굴피집이 있고, 사람이 살고 있는 너와집이나 물통에 물이 떨어지면 그 무게로 방아를 찧는 통방아도 남아있다는 곳이다.
설패바위, 촛대봉, 미륵봉 등 빼어난 절경과 깊고 깊은 계곡사이로 물들기 시작한 오색단풍까지 한국의 계림(桂林)으로 불릴만한 선경이다.
덕항산에서 산행종점인 댓재까지는 약12km, 가까이 큰재까지는 7km, 거리상으로 중간 쯤 왔으니, 아직도 족히 6시간은 발품을 팔아야 한다. 아직 9월하순인데도 바람은 벌써 한 겨울이고, 풍속까지 거세어 체감온도는 이미 영하권이다. 갑자기 불어 닥친 찬바람에 산은 울긋불긋 상처를 입기 시작했다. 바람에 한기(寒氣)까지 섞이니 땀은 몸으로 숨어들고, 몸은 그 바람으로 생기를 얻는다.
때론 슬픔도 위로가 되듯 차가운 바람도 힘이 될 때가 있다.
자암재를 지나 1,056봉에 올라서니 삼척 쪽 비탈은 까마득한 낭떠러지지만 서쪽 광활한 경사지는 광동댐 이주자들이 모여 사는 귀네미골 고랭지 배추밭이다.
걸으면서 아래를 살펴보니 밭은 온통 자갈 뿐, 흙은 좀처럼 뵈질 않는다.
저 많은 자갈밭 속에서도 배추가 성장한다니... 그러나 언젠가 TV에 방영 된 내용을 보고서야, 그 의문을 풀렸던 기억이 새롭다.
이곳과 같은 고원지대에서는 낮과 밤의 온도차로 인해 생긴 이슬이 낮 동안 덥혀진 자갈 아래로 고이니, 자갈은 ‘물을 머금은 돌’이 되어 주변 흙을 적셔주므로 고도가 높은 산꼭대기 비탈 밭도 가뭄을 타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돌 밑으로 배추의 하얀 실뿌리가 뻗쳐있던 화면은 신비로움, 그 자체였다. 전혀 쓸모없을 것 같은 돌이 물을 머금으니 쓸모없음이 쓸모가 되는(無用之用), 자연의 오묘한 섭리를 보여 주었었다.
해발 1천 미터나 되는 고원지대에 40여만 평이나 되는 배추밭이라니... 수확은 끝났으나 못생긴 배추들은 밭에 그대로 버려져있다.
이유야 어찌되었던 선택 받지 못했다 함은 서글픈 일이다. 배추는 그렇게 혹독한 추위 속에 버려진 것이다. 닥쳐 올 겨울 추위를 위해 동물들이 몸에 지방을 비축하듯 배추는 당분을 저장하는 담금질(hardening)을 해온 것이다.
그 담금질 탓으로 봄배추와는 달리 맛이 들어 시원하고 달콤했다. 그건 서리 맞은 감처럼 죽음과도 같은 겨울을 나기위해 준비한 달콤한 맛이다.
가뜩이나 목이 말랐었는데 버려진 배추 잎을 입에 넣으니 시원하다. 이내 갈증이 가신다.
그 달콤한 맛이 강릉 안반덕, 평창 육 백마지기, 귀네미골, 매봉산 등 4대 고랭지 배추밭을 유명하게 했으리라. 지금도 가락동 농수산물 시장에서 고랭지 배추의 가치는 소비자가 먼저 알아주는 귀한 농산물이 되었다.
길가엔 구절초 몇 송이가 지친 발걸음을 반긴다. 소박한 시골아낙네 모습이다. 태초 생명체가 발견한 유혹의 기술은 색과 향이다. 종족보전을 위한 유혹은 숨기거나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는 당당함이다. 그런 이유로 험준한 절벽이나 외딴곳에 있는 꽃들은 색도, 향기도 더 짙다.
길가로 피어난 구절초가 흰색으로 변했다는 것은, 이미 유혹이 끝났다는 뜻이다. 죽음이 검은색이라면 그 죽음의 위로가 되는 색은 흰색이다.
꽃에서 ‘희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유전학적으로 흰 꽃은 일종의 돌연변이다. 흰 꽃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면 흰색조차 없어지고 물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을 위로하는 색은 무색(無色)이라는 말이 맞다.
그러나 세상적인 유혹은 색에서 출발한다. 그 유혹을 멀리하고 속세의 인연조차 끊고 외딴길을 걷는 스님들의 옷은 괴색(壞色), 회색(灰色)이다.
지금 길가에 서있는 흰 꽃은, 단오까지 5마디가 자라고, 음력 9월9일 중량절이 되면 아홉 마디로 성장하여 꽃이 핀다하여 구절초라 불렸다.
1,059m 무명봉에 올라 황장산을 찾았으나 정상표지석이 보이질 않았다.
멀리 삼척시 하장면과 미로면을 잇는 고갯길이 산중턱으로 보이고, 그 앞 봉우리가 황장산이리라. 그리고 이곳에서 삼척방향으로 내려서면 미로면 활기리 절골로, 태조 이성계 5대조인 목조(穆祖)의 아버지인 고려 이양무 장군묘소인 준경묘와 그의 부인 영경묘가 있는 골짜기로 운치 있는 금강송 군락지가 있어 2005년도에는 ‘가장 아름다운 숲’으로 선정되기도 한 곳이다.
전주의 지방 호족출신인 목조 이안사는 이곳에 묘를 쓰면 5대후손이 왕이 될 것이라는 고승의 대화를 엿듣고, 흰 소(白牛) 대신 소 백 마리(百牛)로, 금관 대신 황금색 귀리 짚으로 만든, 백우금관(百牛金冠)을 빌어 천하명당을 얻었다는 곳이다.
삼척의 옛 지명은 척주(陟州)다.
조선시대엔 왜구의 침범을 막기 위한 수군 기지요, 동해의 중심 항 이었으며 땅덩어리와 인구도 가장 넓고 많았던 곳이었으나, 80년대 북평읍을 동해시에 떼어주고, 이듬해 장성읍은 태백시로 편입하고 나니 초라한 시골항구가 된 곳이다.
조선조 현종2년, 예송논쟁에서 송시열에 밀려난 미수(眉搜)허목(許穆)은 이곳 삼척부사로 내려와 있을 때, 심한 폭풍과 해일로 이곳이 물에 잠기자 동해를 예찬하는 비(碑)를 세우니 바다가 잠잠해지고 바닷물이 비를 넘지 못한지라, 그 비가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로 남아있다.
미수 허목은 당대 제일가는 서예가였다.
그 당시 미로면(眉路面) 지명도 허목의 공덕을 칭송하여 호를 따서 ‘눈썹 미(眉)’를 썼었지만, 훗날 반대편 정파 출신 부사가 부임해서 ‘아닐 미(未)’로 바꾸었다하니, 역사는 언제나 승자의 기록이다.
산행 10시간여 산행 끝에 댓재에 도착하니, 고갯마루는 거센 바람이 난리를 피우고 있었다. 땀을 흘린 만큼 추위가 엄습해 왔다.
대승적 삶을 온몸으로 살아 온 전설적인 부설거사는 자신의 법문을 듣고 말문이 터진 벙어리 소녀, 묘화(妙花)의 간절한 청을 거절하지 않고 ‘중생이 앓고 있으므로 나도 앓는다,’ 는 유마(維摩)의 선언대로 묘화와 살았다. 그는 묘화와 살면서도 성(聖)과 속(俗)의 경계에 빠지는 법이 없었다.
‘아프지 않는 삶이 어디 있으랴‘ 자연계의 생태적 관점에서 볼 때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닌 과정이다. 그리고 아픔은 삶의 또 다른 모습일 뿐이다.
아프니까 살아있다는 말이 되고, 살아있으니 아프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같은 설익은 중생들의 삶은 내가 아프면 세상이 귀찮아 진다.
바람하나만 차갑게 불어와도 몸은 꼼짝도 하길 싫어한다. 그런 이기적인 육신을 짊어지고 가야 하는 중생들의 삶은 고될 수밖에 없을 터, 그나마 다행인 것은 끝없이 넓고 푸른 동해바다가 가슴을 탁 트이게 한다는 점이다.
고갯마루에서 현(峴)이라 함은 산(山)이 드러나는(見)곳이니, 산을 훤히 볼 수 있는 ‘탁트인 고갯마루(嶺上平)’를 뜻한다.
동해 일출명소로는 강릉 정동진보다 더 유명하다는 고개, 댓재(竹峴)다.
댓재는 차갑고 거센 바람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난리를 피웠다.
하늘 높이 걸린 초고압 전선에 목을 베인 바람은 ‘휘이잉 이-잉’ 긴 휘파람소리로 하늘가에서 울어댔고, 제 풀에 지쳐 쓰러진 몸은 엄살을 피우며 신음소리를 냈다.
아 - 야 야. 아 야-. (07. 10. 27 )
글/조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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