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 꽃을 보려거든 원추리는 심지마라
(화방재 - 피재 (2) 20.4km)

산 하나를 놓고 보면 대간 길에서 금대봉 만큼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산도 드물 것이다
금대봉(1,418m) 정상에 표기된 또 다른 지명은 양강발원봉(兩江發源峯)이다. 금대봉 북쪽 산중턱엔 민족의 젖줄인 한강의 발원지 검용소(儉龍沼)가 있고, 남쪽 기슭엔 낙동강 시원지(始原地) 너덜샘이 있어 얻은 지명이다.
태백시내 황지는 낙동강의 발원지요, 금대봉 검룡소는 한강의 발원지가 되었으니 태백은 낙동강과 한강의 고향이 된 셈이다.
그리고 금대봉은 점봉산(곰배령), 대덕산(1,307m)과 함께 생태보전지역으로 지정되어 출입이 통제된 산이다. 우리나라 야생식물 종류는 약 4천여 종, 이곳에서 볼 수 있는 것 만해도 무려 2천여 종이나 된다하니, 야생화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것은 당연했으리라.
그런 보호구역에 눈을 피해 들어왔으니 우선 ‘꽃들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대간산행을 하다보면 출입이 통제된 장소는 호기심 탓인지 기를 쓰고, 걷고 싶었음을 고백하고 싶다.
사실 생태보전지역은 산을 아는 사람들이 솔선해서 보호해주어야 하는데 몰래 들어왔으니 부끄러운 일이 되고 말았다.
그뿐이랴, 1920년 일제 강점기 때 300여종을 채집해서 가져간 것도 부족해서 1980년대에는 무려 950여종을 반출해간 미국 국립수목원의 처사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 가운데 구상나무와 노각나무는 고급정원수로, 미스킴 라일락으로 명명된 수수꽃다리는 미국시장의 30%를 차지하고, 로열티를 주고 역수입되고 있기 때문에 그것도 부끄러운 일이 되었다는 것이다.
예로부터 정선은 ‘앞산과 뒷산을 이어서 빨래 줄을 맬 수 있는 곳이라 하늘도 세 뼘밖에 되지 않는다 ’ 첩첩산중임을 얘기 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정선은 산이 깊은 만큼 땅도 고달팠던 고장이다.
삶이 고달프면 노래도 구성지기 마련, 그러나 그 고달픔을 원망보다 달관(達觀)으로 승화시킨 사람들이 살아 온 땅이다.
그런 서글픈 ‘내 처지를 누가 알아 주리오’에서 연유된 아리랑은 여량리 아우라지에서 물길을 열고, 영월에서 서강(西江)을 만나 남한강(南漢江)으로 일백 번을 굽이치며 단양(丹陽)과 청풍의 기암괴석을 배경으로 단양팔경을 빚어놓고, 물 좋은 달천과 여주 신륵사 앞을 지나 양수리에서 한강의 최대지류인 북한강과 몸을 섞으니, 남한강은 비로소 한강으로 들어와 광나루, 뚝섬, 노량진, 마포나루까지 1,280리 뱃길을 열어 놓은 것이다.
1910년대 기록을 보면 한강을 통해 마포, 노량진 나루터로 운송(運送)되는 산물(産物)의 40%가 영월과 정선에서 나오는 임산물로, ‘떼돈 벌었다’는 말은 당시 군수월급이 20원일 때 뗏꾼 품삯으로 30원을 받았으니, 물이 많을 땐 열흘, 물이 적을 땐 마포나루까지 한 달 가까이 걸리는 뱃길에 황소 한 마리 정도의 삯을 받기도 했다. 그 당시로서는 ‘떼돈’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양 가는 뱃길을 따라 객주가 무려 1천여 개나 있었다 하니, 한강은 그들의 애환을 위로해주는 또 다른 삶터가 되었던 강이다.
금대봉(1,418m)에 올라서니 바람도 상쾌하고 조망이 좋다
뒤쪽으론 함백산과 태백산, 북쪽으로 가깝게는 비단봉(1,279M), 천의봉(매봉산), 멀리는 두타산과 청옥산이 달려오듯 가까이 조망된다.
은대봉, 금대봉에는 아름다운 봉우리 이름만큼이나 야생화들이 잔치를 벌이 고 있었다. 범의 꼬리, 참취, 오이풀꽃, 홀아비바람꽃, 노루삼, 구슬봉이, 원추리.....중국의 문호 임어당은 ‘꽃을 보려거든 원추리는 심지 말라’ 슬픈 꽃으로 보았지만, 그 나물을 먹으면 근심과 걱정을 없애 준다하여 망우초(忘憂草)요, 아녀자가 머리에 꽂으면 아들을 낳는다 했으니 의남화(宜男花), 합환화로도 불렸다.
흰색, 옅은 분홍빛, 노란색... 그러나 그 많은 꽃들의 이름을 모르니 불러줄 수도 없다. 산에서 야생화를 만날 때마다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관심을 갖긴 했어도 그냥 눈으로 공부한 것은 언제나 한계에 부딪치곤 한다. 작고 앙증맞은 야생화는 그냥 향기로 봐 달라며 손짓하고 있다.
꽃은 자란 환경이 거칠고 열악할수록 색은 짙어지고, 향기는 매혹적으로 된다는 점이다. 식물들이 오랫동안 간직해 온 삶의 비밀이다.
여기서 피재까진 약 7km, 여유있게 잡아도 3시간이면 된다.
잠시 숨고르기를 한 다음 1250봉과 1233봉을 넘었다. 길은 평탄하고 쑤아밭령, 비단봉, 매봉산까지는 표고차이도 200미터 수준이니, 말 그대로 편안하게 발길을 잡아준다. 아직 가을이 아님에도 하늘은 높게만 느껴졌다.
논이 부족한 정선 땅에 벼를 밭에 심었으니 쑤아밭령(水禾田嶺)이다. 밭 이름이 고개가 되었으니, 잠시 쉬어가잖다. 그러나 산은 쉬지 않는다.
산은 감춰두었던 꼬리로 능선을 일으키며 40여 만 평이나 되는 광활한 고원지대 배추밭을 펼쳐 놓는다. 가슴이 탁 트인다. 우리나라에서 ‘배추 맛이 가장 좋다’는 매봉산 고랭지 배추밭이다.
비단봉(1,279m)정상에 서니, 몇 년 전만하더라도 없었던 이국적인 풍경이 눈에 띈다. 매봉산 광활한 고랭지 배추밭위로 산보다 더 크게 보이는 풍력발전기 날개가 마치 하늘을 움직일 듯 돌고 있다.
‘스륵 스륵 스르륵-’ 멀리서도 바람소리가 들려온다. 문득 어릴 적 갖고 놀았던 바람개비 생각이 났다. 바람개비를 손에 들고 빨리 달려야했다. 빨리 달릴수록 빨리 돌아가던 바람개비... 그러나 이곳 바람개비는 급할 것도 없는, 아주 느긋한 몸짓이다.
몸조차 곧추세우기 힘든 매봉산 비탈 밭이랑엔 배추보다 돌이 더 많다.
이곳은 본래 거센 바람으로 일반 작물재배가 불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들은 비탈 밭에서 돌을 고르고 골라 고랭지배추밭으로 탈바꿈시킨 후, 여름 한철 고된 삶을 이곳에 모여 돌처럼 살고 있다.
발밑을 바라보니 밭은 온통 자갈천지다. 언 듯 보면 배추가 심어질 공간이 없을 정도로 밭은 자갈투성이다. 그러나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것 같은 자갈은 강원도 비탈 밭의 토양유실을 방지하고, 햇빛으로 제 몸을 달구어, 심야시간대 대기기온 급강하로 발생하는 지온(地溫)의 저하를 억제함과 동시에 기온차로 인한 자갈표면의 결로현상은 메마른 배추밭을 적셔주어 가뭄을 예방하는 역할까지 한다 하니, 배추밭 자갈은 혹독한 여름이면 ‘몹쓸 가라지’에서 ‘알곡’으로 그 역할을 바꾸기도 한다.
이 또한 자연의 오묘한 섭리가 느껴지는 부분이다.
매봉산(1,303m)의 주인은 바람이다.
매봉산의 또 다른 이름은 ‘바람의 언덕’으로 불린다. 지명에 걸맞게 풍력발전기의 커다란 은빛날개(길이가 무려 40여 미터)가 바람에 실려 고랭지 배추밭위로 제 그림자를 이끌며 천천히 돌아가고 있다.
바람이 없으면 작은 능선하나도 넘을 수없는 구름처럼, 풍차는 바람을 안고 운명인 냥 돌아간다. 어찌 보면 참으로 무료한, 하릴없는 회전이다.
한번, 두 번, 세 번, 네 번 ....종일 그렇게 바람이 부는 대로 저 혼자 돌아갈 뿐이다. 살다보면 그런 것이 어디 비단 풍차뿐이랴.
‘파도는 하루에 70만 번씩 철썩이고, / 종달새는 하루에 3000번씩 우짖으며 자신을 지킵니다./ 용설란은 100년에 한 번 꽃을 피우고 / (중략) / 일생에 단 한번 우는 새도 있고 / 울대가 없어 울지 못하는 새도 있습니다 / 누가 운명을 거절할 수 있을까요 (천양희 ’운명이라는 것’ 부분)
詩人 천양희는 그것을 ‘운명(運命)’이라 했고, 장자(莊子)는 ‘안명(安命)’이라 하여, 명(命)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니 기꺼이 받아들이라 했으며, 혹자(或者)는 우주의 ‘섭리(攝理)’를 얘기하기도 했다.
우리네 삶도 풍력발전기 날개처럼 누군가에 의해 저렇게 돌려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운명이란 알 수 없기에 유사 이래 삶은 늘 초월을 꿈꾸어 왔는가 보다.
대간 길도 사람을 닮았음인가, 산도 가끔 그런 초월을 꿈꾼다.
매봉산(1,303m)의 다른 지명은 하늘 봉우리, 천의봉(天衣峰)이다. 산은 이제 매봉산과 피재사이 1145봉에서 낙동강을 따라가는 또 다른 산줄기, 정맥으로 탈출을 꿈꾼다.
강을 따라 가는 정맥은 구봉산을 넘어, 부산 다대포 몰운대까지 1,300리 남쪽 줄기로 갈라서는 낙동정맥(洛東正脈) 370km의 분기점(分岐點)이 되는 곳이다.
그리고 태백을 둘러싼 높은 준령에서 흘러든 물이 시내 중심가에서 용출되어 낙동강 물길의 발원지가 되었으니, 옛 이름은 ‘하늘 못‘(天潢), 황지(潢池)다.
그곳은 주위가 수 천 평이나 되는 질펀한 늪지로 황부자네 집터였다.
어느 날 탁발 왔다가 소똥을 뒤집어 쓴 스님은 시아버지 몰래 시주를 한 며느리에게 ‘살려거든 나를 따라오라 그러나 절대 뒤돌아보지 마라,’ 신신당부를 했다. 그러나 사람이 착하면 성글지가 못하다고, 며느리는 도계읍 구사리 산등성에서 미륵바위가 되었고, 황부자 집은 순식간에 세 개의 늪으로 변했단다. 지금의 황지(潢池)다.
조선 중기 실학자 여암(旅菴) 신경준(申景濬)은 그의 저서 산경표(山徑表)에서 산경이란 산과 산을 이어주는 능선의 종적인 흐름이라 정의하고, 분수계(分水界)는 물 가름이 되는 산줄기를 ‘1대간 1정간 10정맥,’ 백두대간으로 체계화하여 산경표(1770년경)를 만들었다.
그러나 대간(大幹)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문헌은 1751년 이중환의 택리지다. 백두대간과 정간이 고유명사로 등장한 것은 이보다 십여 년 늦은, 이익의 성호사설(1760년)에 의해서였지만, 일제는 1903년 한반도 지하자원 조사를 핑계로 대간과 정간이라는 단어자체를 없애고 산맥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이라, 산은 스스로 물을 가르지만 산은 물을 넘지 못하고, 물 또한 산을 놓고 가지 않으니, 여암을 비롯한 실학자들은 전혀 이질적인 산과 물의 개념을, 산은 곧 물(山是水)이라는, 동시성으로 이해하려 한 것이다.
그리고 동시대 실학자 다산 정약용은 산경의 대칭적 개념으로 물줄기(水經)의 계통과 이에 관련된 문화, 역사, 지리 등 사실적 기록인 대동수경(大同水經, 1814년)을 저술하면서 산줄기와 물줄기를 ‘흐름’이라는 시각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그리고 대동여지도를 작성한 고산자(古山子)김정호(金正浩)는 ‘천하의 형세는 산천에서 볼 수 있다’(天下地形勢視乎山), 산의 형세를 중요시했다.
본디 산은 하나의 뿌리로부터 수없이 갈라져 나가니(山主分而脈本同其間), 산은 사람을 흩어지게 하고, 물은 본디 다른 근원으로부터 하나로 합쳐져서(水主合分而源各異其間), 산과는 달리 사람을 모은다고 했다.
그런 이유로 ‘다른 물을 마시면 생각도 달라지고(異水異想) 같은 물을 마시면 생각도 같게 되니(同水同想)’ 그 산이 품어 준 삶의 터전을 ‘물이 같다’ 하여 동(洞)이라 이름 지었다
낙동강 발원지는 태백시 ‘황지동(潢池洞)‘이다.
이번 산행구간 종점인 피재의 또 다른 이름은 삼수령(三水領)이다. 속리산 천황봉에서 갈라진 물은 금강과 낙동강, 남한강으로 흘러가니 삼파수(三派水)요, 피재는 한강과 낙동강, 삼척의 오십천으로 물이 갈라져 흘러가니 삼수령(三水嶺)이 되었다.
후백제 견훤을 미워한 왕건은 훈요십조(訓要十條)8조에 ‘차령(車嶺)이남의 물은 모두 산세(山勢)와 어울리지 않고 엇갈리게 흐르니, 차령이남(車嶺以南)사람은 등용치 말라.’ 무엇보다 물길을 중요시 했다.
반면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낙동강은 그 동쪽을 경상 좌도(左道), 서쪽을 우도(右道)로 나눠, 같은 물로 삶터(洞)를 이루는 바람에 비교적 조화를 이룬 삶을 살아간다는 평가를 했다.
그러나 실학자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호남의 금강과 만경강은 서해로, 영산강은 서남해로, 섬진강은 남해로, 모두 제각각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는 산발사하(散髮四下) 물길 인지라, 상황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땅이라는 말로 폄하(貶下)하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옛 사람들은 산과 물을 떼어서 논하지 않았다.
(07. 10. 26일.)
글/조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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