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 별들이 내려와 꽃이 된 고개
(화방재-피재(1) 20.4km)

산행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대원들은 톰슨가젤이 된다.
아프리카 초원의 톰슨가젤은 치타 보다 더 빨라야 한다. 빨라야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셔날지오그래픽에서 본 가젤은 모태에서 태어나서 발이 땅에 닿는 순간부터 달리는 것이었다.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걷지도 못하는데 어찌 저럴 수가 있을까.
가젤은 그렇게 걷는 것 보다 뛰는 것을 먼저 몸으로 익힌 동물이다. 달리지 않으면 잡혀 먹힌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태어난 슬픈 짐승이다.
오늘도 밤을 뒤척이며 도착한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수리봉을 향해 달리듯 오르는 대원들 뒷모습이 어쩜 톰슨가젤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간종주라는 산행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치타와 톰슨가젤......그들은 살기위해 목숨 걸고 뛰어야 했고, 우리는 종주를 위해 목숨 걸 일도 아닌데, 톰슨가젤처럼 뛰듯 걸어야 했다.
화방재(花房峙)의 다른 지명은 어평재(御坪峙)이다.
어평재는 태백산 망경사와 함께 단종의 혼이 어린 고개다.
열일 곱 꽃다운 나이에 억울한 죽음을 받아들여야 했던 단종의 슬픔을 백성들이 외면하지 못했던 역사가 어평재로 불렸을 것이다. ‘이곳부터 내 땅이라(御坪)’ 어라연 물고기조차 단종의 죽음을 애통해 했단다.
꽃이 많이 피었다하여 화방재, 그러나 꽃은 지고 향기만 남아있다. 여름 숲은 그늘조차 푸르다. 새벽 숲에는 은은한 향기가 숨어있었다.
숲 속 오르막길로 들어서기 무섭게 숨소리가 거칠어진다. 몸속으로 길이 들어오고 나가기를 반복하며 몸은 땀방울을 털어낸다. 길은 걷기의 통로가 되고, 몸은 들어오는 길을 품어주며, 그 길에 적응하기 시작한다.
그럴 때마다 걷기의 무료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밑으로 떨어지는 땀방울을 헤아리는 버릇이 생겼다. 하나 둘 셋 넷...스물, 그러나 셀 수가 없다. 참으로 부질없는 일이다. 그렇게 어이없는 짓을 하는 곳도 산이다.
산을 오르며 나타나는 또 다른 변화는 땀이 흘러내리는 순간부터 말수가 적어진다는 점이다. 그리고 걸어갈수록 혼자라는 생각으로 묵언에 빠져든다. 땀방울이 굵어질수록 묵언은 깊어지며, 가슴으로는 뿌듯한 희열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산행에서 땀은 몸이 몸을 위해 만드는 묘약이다.
태어 난지 4-5분이면 달리기를 익힌 톰슨가젤처럼 걷기에 적응 될 즈음, 수리봉(1,214m)과 창옥봉(1,238m)을 거쳐 들꽃이 아름답다는 만항재에 올랐다.
이곳저곳 만개한 들꽃 탓인가, 만항재(1,330m)는 불어오는 바람조차 달게 느껴진다. 흘린 땀이 바람이 된 것일까. 산에서 바람과 땀은 언제나 서로 보완관계를 유지한다. 차가우면 덥히고 더우면 차갑게 식혀주고, 막힌 가슴까지 탁 트이게 열어준다.
오늘은 멀리 함백산이 산 그림을 잘 그렸다. 맑고 높은 하늘, 발아래로는 흰 구름이 두둥실 펼쳐졌다. 그쯤 되면 만항재는 활짝 핀 꽃들과 나무, 푸른 풀밭 잘 그린 한 폭의 풍경화가 된다. 셔터를 누르는 것으로 요즘들어 자꾸만 짧아지는 기억력을 대신해 놓았다.
동쪽으론 태백산과 선달산...서쪽으론 은대봉, 금대봉, 매봉산까지, 조망이 좋은 고개다. 대원들 얼굴엔 두어 시간 흘린 땀으로 붉은 꽃이 피어났다.
적어도 10년은 젊게 보인다. 누가 뭐래도 등산은 회춘의 첩경이다.
만항재는 우리나라에서 자동차가 통행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고개다. 지리산의 정령치(1172m), 평창과 홍천을 넘어가는 운두령(1089m)보다 높다. 그렇다고 오르기가 힘들다는 뜻이 아니다.
힘들기로 말하면 새들도 넘기 힘들다는 조령도, 구름도 쉬어가는 추풍령도 있고, 울고 넘는 박달재도 있다. 쉽게 오르려면 화방재에서 고한으로 넘어가는 지방도(414번)를 이용해도 되는 고개다.
그리고 만항재는 ‘가장 아름다운 별밤’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수많은 별들이 내려와 꽃이 된 곳이다. 노루오줌, 엉겅퀴, 흰구절초, 용담, 초롱꽃 기린초.....아- 호랑무늬를 닮은 꽃은 어릴 적부터 보아 온 나리꽃이다. 꽃이 아래를 바라본 것은 참나리, 하늘로 향하니 하늘나리, 옆으로 피면 중나리라 불리는 꽃이다.
저 아름다운 꽃들에게도 한 때는 등급이 있었다면 사람들은 과연 믿을까.
반상(班常)의 구분이 분명했던 조선조 만 해도, 양반이 아닌 자가 매화나 난 같은 사군자를 키우다 들키면 관청에 끌려가 곤장까지 맞아야 했다.
그러나 지금 만항재에 피어난 꽃들은 공평하다. 귀천이 없으니 모두가 앙증맞고 소박한 이름의 주인공들이 되었다. 작지만 당당한 모습들이다.
봄꽃이 그렇게 향기로 피어난다면 여름 꽃은 빛깔로 피어난다. 그리고 가을꽃은... 피어나기 바쁘게 열매를 맺고 진다.
함백산(1,573m)까진 2.5km, 편안한 능선 길이다.
산경표에는 대박산(大朴山)으로 표기되어있다. ‘크게 밝은 산’이라, 태백산과 같은 뜻이다.
1926년 태백산 문수봉아래 비만 내리면 ‘거무스름한 물’이 흘렀다는 금천(黑川)에서 석탄이 발견된 후, 55년 태백선이 개통되면서 전국 석탄생산량의 15%을 담당하기도 했고, 한 때는 동네 개까지 만 원 짜리 지폐를 물고 다녔다는 호황을 40년 가까이 누리기도 했던 곳이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기 마련, 그 빛이라는 것이 수백 미터 지하막장에서 걷어 올린 것이었기에 ‘사북사태‘같은 어둠도 있었지만, 이젠 ’크게 밝은 땅‘ 태백이라는 본래 이름을 찾아가고 있는 고원도시이다.
태백산이 이상향(理想鄕)을 찾는 기도처라면 함백산은 수많은 탄광을 옆구리에 끼고 있어 굽이굽이 이승의 삶터가 되어준 산이다.
중함백(1,505m)으로 이어지는 능선 길은 안개에 잠겨있다. 바람조차 없으니 땅에서 올라오는 후끈한 열기로 숨이 턱턱 막힌다.
산은 안개에 잠기고, 우리는 능선에 갇히고, 길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그냥 걸으라며 재촉을 한다. 은대봉 안부 사거리에서 중식을 했다.
이곳에서 남쪽 능선 아래는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창건한 천년고찰 정암사가 있다.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돌아 올 때 가져 온 마노석으로 쌓은 수마노탑에는 부처님진신사리가 봉안되어있는 5대 적멸보궁에 속한다.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대사가 꽂아놓은 지팡이는 ‘잎이 피거나 지는 일이 없는’ 비선화수(飛仙花樹)로 살아있으나, 이곳 자장율사 짚고 다니던 지팡이가 자란 주목, 선장단(禪丈壇)은 이미 오래전에 고사목(枯死木)이 되었단다.
모두 믿기 어려운 전설같은 얘기 일 뿐이다. 그러나 그런 전설이 산을 친근하고 풍성하게 한다. 문수보살을 친견한 자장율사는 함백산 동쪽 기슭에 자리를 잡은 정암사에 진신사리를 모신 후 ‘이곳에 하얀 세상이 열릴 것’임을 예언했었다.
지금에 와서 고한사람들은 함백산 정상에서 보이는 백운산 하이원 스키장을 두고, 1300년 전 ‘하얀 세상이 열릴 것’을 예언한 자장율사의 신통력을 입에 올리고 있다. 그리고 자장율사의 선단장 잎도 그렇게 피어날 것이라 믿고 있다. 그런 믿음이 이렇게 궁벽한 산골에 절을 짓게 했을 것이다.
두문동은 본래 북녘땅 개풍군의 지명이다.
두문동재(1,268m)는 금대봉(1,418m)과 은대봉(1,442m)사이의 준령으로 정선고한읍과 태백을 연결시켜주는 고개다. 사람들이 넘나드는 고개로는 이 땅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싸리재’로도 불린다.
두문동재는 고려가 망했을 때 두문동으로 들어가서 나오지 않은(杜門不出) 72현 충신 중 불길가운데 살아남은 칠현(七賢)의 기상이 살아있는 곳이다
그러나 지금 두문동재는 몇 년 전 터널이 뚫린 후 인적조차 끊기니 오갈 사람이 없는 고개가 되었다. 고개는 있되 스스로 문을 닫아버린(杜門) 고개가 되었으니, 말 그대로 두문동이 된 셈이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가 질라나. /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 (중략)
조선중기 택리지를 쓴 이중환은 ‘무릇 나흘 동안 길을 걸었음에도 하늘을 볼 수 없었다’ 며 정선이 깊고 험한 산세를 얘기하기도 했다.
그 탓인지 송도 두문동에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신으로 살아남은 고려 유민들 중 이곳 정선 거칠현동(居七賢洞)으로 숨어든 칠현(七賢)은 구전되어 내려오던 정선아라리에 가사를 붙여 구성진 가락으로 노래한 것이 정선아리랑의 시원이 되었다.
만수산 검은 구름만 모여들어도, 그들은 싸리골 올동박이 떨어지기 전에 자신들의 처지가 바뀌길 간절히 바랬고, ‘꽃은 왜 피며 새는 왜 우냐’고 자신들의 슬픈 현실을 노래 가락으로 달래곤 했었다.
정선은 그런 슬픈 사연조차 아름다운 가락이 되어 강처럼 흐르는 고장이다. 특히 대원군이 경복궁을 복원할 때 1천3백리 물길을 따라 운반하던 뗏목꾼들에 의해, 그 슬픈 가락이 한강을 따라 한양까지 구전되었으니, 정선아리랑의 뿌리가 되었던 것이다.
실제로 정선 땅에 살면 누구나 소리꾼이 된다. 아니 소리꾼이 아니면 정선사람이 아니다. 그들이 흥얼거리는 아라리가락은 대부분 가난한 백성들의 숱한 애환과 고달픔을 노래한 가락으로, 채집된 노랫말 만해도 3천여 수 이상 된다. 단일 민요로는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가사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이제는 어엿한 한국문화를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그렇다고 정선아리랑이 마냥 슬프기만 한 가락은 아니다.
‘소리에 그늘이 졌다‘는 말은 소리꾼들에 있어 최고의 찬사가 되었듯 ’기쁨보다 슬픔을 담은 소리가 더 달게 느껴진다,‘ 함은 정선아리랑을 두고 한 얘기리라.다른 지방 진도나 밀양 아리랑처럼 질펀한 해학이나 현란한 가락이 없다. 대부분 독백처럼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세상살이 온갖 시름을 삭혀내는 삶의 질항아리와도 소리가 정선아리랑이다.
그러나 정선아리랑은 슬퍼하되 비탄에 빠지지 않는(哀而不悲), 한(恨)이 삶 속으로 스며들어 가난한 백성들의 상처를 달래 준 소리가 되었으니, 팔도아리랑 중 가장 충실한 민요적 가락으로 중요 무형문화재가 되었으리라. ....(계속)
글/조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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