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기도가 모여 향기가 된 산
(도래기재 - 화방재 23.9)

사람들이 가슴속에 꿈을 안고 살아가듯 산은 길을 품고 산다.
산에 있어 길은 소통인 동시에 꿈이 된다. 길이 있음으로 산은 전설을 간직하게 되었고 그 전설로 산은 아름다움을 간직하게 되었다.
그렇게 경상도 북쪽 깊은 산중에 ‘숨겨놓은 산길’과도 같은 곳이 봉화다.
몇 해 전 타계한 고집쟁이 농부 전우익선생도 봉화에 있어선 ‘숨어있는 산길’과도 같은 어른이었다.
선생은 상운면 구천리 산골에서 홀로 농사지으며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더불어 살아가는 모습을 몸소 실천 한, 산 약초 같은 분이었다.
벌써 꽤 오래전 일이 되었는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쓴 유홍준 교수는 ‘나는 지금 봉화를 쓸 수 없다. 그것은 시간이 없어서도 아니고 지면이 모자라서도 아니다.’ 불천위종가(不遷位宗家)- 나라에 큰 공이 있거나 학덕이 높은 분에 대해서 위패를 ‘옮기지 않고’ 제사를 계속 모시는 것을 허락한 종가-가 일곱이나 되는 봉화는 옛 이끼까지 곱게 간직한 살아있는 민속촌이라며 ’봉화를 진짜 사랑하는 사람은 그곳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기를 바란다.’ 는 뜻으로 닭실 충재(沖齋)와 석천정사(石泉精舍), 복지리의 마애불 만, 돌아 봤을 뿐 다른 곳은 답사조차 포기하고 아껴두었던 곳이기도 하다.
택리지에도 ‘사람은 소백과 태백사이에서 구하라(求人種於兩白之間)’.
특히 봉화는 안동 내앞과 풍산 하회, 경주 양동마을과 더불어 삼남4대길지에 해당하는 안동권씨 집성촌 닭실마을과 함께 전쟁이나 천재지변이 일어나도 목숨을 구할 수 있다는 십승지로 택함을 받았다.
남한 땅에서는 정자(亭子)가 가장 많고, 은둔하기 좋은 고을로 알려졌으니, 봉화는 마치 ‘육지속의 섬’과도 같은 곳이었다.
산행기점인 도래기재(770m)는 경상북부 외딴 봉화의 끝자락이다.
도리기재 좌측 봉우리 옥돌봉(1,242m) 아래로 넘어가는 고갯마루가 우측 구룡산(1,345m)에 자락을 만나 서쪽하늘을 막고 서 있으니, 오랫동안 내륙 중에 오지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곳이다. 고개를 넘으면 영월 하동면 7번째 십승지 의풍계곡으로 이어진다.
도래기재에서 구룡산까지는 5km 남짓, 여름철인데다 고도차가 무려 600여 미터나 된다. 족히 두어 시간은 땀을 흘려야 했다.
출발 1시간여 만에 일제 강점기 영월 우금치리에서 발견된 금광으로 이어지는 금정임도(金井林道)라 표기된 전망대에서 잠시 숨을 돌렸다. ‘도래기’재라는 지명은 채굴한 광물을 운반하는 삭도를 ‘도래기’라 부른데서 유래 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봉화의 진산인 문수산(1,205m)을 중심으로 서벽리 일대는 우리나라 고유형질의 소나무(적송)인 춘양목 천연보호림 구역으로 지정된 곳이다.
대간산행을 하면서 느낀 새로운 사실 하나는, 산행이 봉화지역으로 접어들면서 소나무 생김새가 타지방과 다르다는 사실이다.
겨울철 적설량이 많기 때문에 눈이 쌓이면, 그 무게를 줄이고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이곳 적송(赤松)은 가지가 짧고 곧게 자라도록 수형이 진화 되었다. 그런 생육적인 조건으로 줄기는 곧고, 결은 치밀하며 키를 곧게 키웠으니 토종소나무 적송의 특징이 되었다.
우선 멀리서 봐도 수간의 색깔이 붉고 키가 쭉 뻗었으니 ‘참 잘 생겼다’, ‘아름답다’는 느낌이 든다. 오죽하면 미인송(美人松)이라 했을까. 그리고 춘양은 근처에서 생산되는 소나무가 춘양역을 통해 기차로 운반 되는 바람에 이곳에서 생산되는 소나무를 ‘춘양목(春陽木)’이라 불렀다. 그 후 춘양목은 질 좋은 토종 소나무의 고유명사가 되었다.
모두 춘양목이라 우겨대니 ‘억지춘양’이 되었다
지금도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것을 일러 ‘억지춘양’이라 한다.
봉화는 납과 아연 그리고 세계유일의 백중석 광산이 있어 이를 탐낸 일제가 보국대(保國隊)라는 미명아래 철도건설을 시작, 6.25동란과 해방을 거쳐 우여곡절 끝에 철도가 개통 될 즈음, 애향심 높은 지역 국회의원이 영주와 철암을 잇는 영암선 철로를 억지로 춘양으로 돌아가게 하는 바람에 ‘억지춘양’이란 말까지 생기게 한 고장이다.
그리고 결이 고운 나뭇결에 송진이 스며든 춘양목은 궁궐이나 큰 사찰을 지으면 겉보기가 아름답고, 그 수명이 족히 천년을 지탱하는지라 ‘백목(百木)의 왕(王)’으로 값이 높아지자, 근처 벌목꾼들이 소나무라 생긴 것은 무조건 춘양목으로 우겨대는 바람에 ‘억지춘양’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그러나 이곳 소나무 종자도 타지에서 성장하면 유전학적 형질을 잃어버린다고 하니, 억지는 끝내 억지가 되는 셈인가.
그런 의미에서 멀리 전라도 남원고을 변 사또는 춘향에게 억지로 수청을 강요하니 그 또한 ‘억지춘향’이 되었다.
‘억지춘양, 억지춘향이라.’ 발음도 비슷하고, 뜻 또한 비슷하다.
산행출발 2시간여 만에 구룡산(1,346m)에 오르니, 멀리 태백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오늘 산행구간 종점인 화방재까지는 24km, 신선봉과 깃대배기봉을 지나 부소봉을 넘어서면 발길은 강원도 땅으로 넘어서게 된다.
호환(虎患)이 두려워 산신각까지 지었다는 고직령과 봉화 쪽 사람들이 태백산신제를 지내기 위해 다녔다는 곰넘이재를 넘어 신선봉(1,280m)까지는 5-6시간 정도 부지런히 발품을 팔았다.
경주 손씨의 묘가 정상표지를 대신하고 있는 신선봉에 오르니 더위에 시달인 몸은 갈증으로 물부터 먼저 찾는다.
물 물... 이럴 때 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것을 꼽으라면 단연 물이다. 물은 본래 맛이 없다. 맛이 없음이 아니라 물을 간절하게 원하는 몸이 찾고 있으니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것, 물이 되었으리라.
신선봉은 북서쪽으로 태백산 정상이 가깝게 조망되어 곧장 능선을 따라 가도 될 듯 착각하기 쉬운 봉우리다. 그러나 대간 길은 다시 동쪽 계곡을 따라 돌아가야 조선 5대사고지 중 하나인, 태백산 사고지(史庫地)가 있는 각화산(1,176M) 삼거리로 갈 수 있다.
몇 해 전 태풍으로 넘어진 나무들이 아직도 누운 채 길을 막아선다. 넘어간 나무의 상태를 보면 그 위력이 짐작이 된다. 직경이 족히 20센티는 될 듯한 상수리나무 허리가 꺾이어 넘어졌으니 대형 급 태풍이었으리라. 좁고 가파른 산길에 쓰러진 나무들이 발길을 힘들게 한다.
옆으로 돌아가고, 밑으로 기어들고 땀은 온 몸을 적시고... 길에 누운 나무는 하나같이 수관(樹冠)이 큼직하다. 수관이 크다 함은 가진 것이 많았다는, 그 큰 수관 때문에 쓰러진 것 일터... 길을 떠나기 위해 가볍게 하라(爲路一損). 꼭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경구가 아닌 듯싶다.
깃대배기봉(1,340m)그늘에서 잠시 쉬었다. 여기서 천제단까지는 4km는 마치 평지와도 같은 편안한 길이다. 짙은 그늘이 숲을 시원하게 한다.
고치령에서 이곳 부소봉까지 거리는 40여km, 1백 여리 길이다. 그 길섶을 멧돼지는 뒤집듯 파헤쳐 놓았다. 땅속에 묻혀있는 도토리를 찾겠다는 것이다. 한 때는 가난한 백성들의 구황식물이었는데, 이젠 배고픈 산돼지 먹이가 되고 있다. 굶주린 산돼지의 무모함에 기가 질릴 정도다. 먹고 사는 일이 저렇게 질기고 힘든 일일까.
질긴 나무뿌리도, 탄탄한 돌도 비껴가지 않았다. 땅이란 땅은 모두 파헤쳤다. 멧돼지는 제 배 하나 채우려 거대한 숲길을 몽땅 뒤엎은 것이다.
홧김에 그랬나, 배가고파서 그랬을 거다. 오죽하면 고치령에서 이곳까지 무려 100여리나 되는 길섶을 파헤쳤으랴. 그 파헤쳐진 곳, 군데군데 주황색 동자꽃 몇 송이가 목숨을 부지하고 간신히 꽃을 피웠다.
한 겨울 깊은 산속 암자에서 탁발나선 스님을 기다리던 동자승이 스님을 기다리가 굶어죽은 자리에서 피어났다는 전설의 꽃이다.
배고픈 멧돼지가 온 산길을 파헤친 것처럼 현실은 힘들어도 전설은 아름답다는 듯, 꽃말은 기다림이다. 그 느낌 때문인지 동자꽃은 아름다웠지만 처연한 모습이다.
오후 2시, 예정보다 늦게 태백산 정상 천제단(1,566m)에 도착했다.
구름조차 하늘 한 쪽으로 비켜 서 있었다. 먼 길을 달려온 산들은 숨고르기를 하고 있는 듯 운무에 잠겨있다. 태백산은 언제나 여여(如如)한 모습이다. ‘골짝을 들면 선계(禪界)요, 능선에 올라서면 선계(仙界)라’.
잠시 땀을 식히고 있는 우리에게 태백은 잠시 생각을 쉬고 그냥 보기만 하라(喩須息見), 그냥 내 버려두라(Let it be )한다.
겨울과는 달리 여름 천제단은 텅 비어있었다.
유사 이래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간절한 기도와 발원이 쌓인 민족의 영산(靈山)이다. 지리적으로도 태백산은 백두대간 허리에 해당하는, 남한 땅 산경도(山徑圖)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산이다.
그리고 태백은 오랫동안 눈(雪)과 거센 바람(風)에 시달려 온 산이다.
조선조 후기 선비 이인상(李麟祥)은 90여명의 승려로 하여금 일행들의 가마를 매고, 각화산 사고지(史庫地)를 경유 태백산을 올랐던 산유기를 남겼었다. 눈 속에 덮여 형체가 희미하게 서있는 나무는 억센 바람과 싸우느라 그 소리가 허공에 가득하다(而雪積糢糊 植者方鬪勁風 其聲滿空), 소리가 허공에 가득하다 함은, 천년을 견딘 세월의 소리이리라.
‘살아 천년 죽어 천년’(生千死千)을 산다는 주목(朱木)은 태백의 상징이다. 그 거센 북풍 속에서 천년을 살아왔으니, 나무는 극도로 괴이하여(而其木極怪), 큰 나무는 울부짖듯 분노하였고(巨大吼怒) 작은 나무는 슬피 울었다(小木哀鳴). 굽고 휘어지고 부러지고 눕은 나무의 모습을 글로 남겼다.
삶을 아낀 나무는 죽음조차 더디게 오는가. 죽어서도 천년이란다.
노자는 곡즉전(曲則全)이면 왕즉직(枉則直)이라. 형체가 기이하게 굽어있어 온전히 생을 부지할 수 있었으며, 장자(莊子)도 지지리도 못생긴 지리소(支離疏)는 그 덕에 천수를 누렸다 하여, 쓸모없음의 쓸모가 되는 묘용(妙用)을 얘기했다.
태백산 주목은 거센 바람과 혹한을 견디고, 바람을 피하느라 가지란 가지는 모두 뒤틀렸다. 성한 놈이 없다. 꺾이고 굽은 줄기로 눈(雪)과 바람(風)이 깃들었으니 천년의 소리가 되었으리라. 산 꾼들은 지금도 겨울만 되면, 그 소리가 듣고 싶어 태백을 찾아 간다.
‘크고 밝은 뫼’ 태백산 천제단에서 무사산행 기원제(祈願祭)를 올렸다.
천제단은 이 땅에서 가장 오래된 제단이다. 지금도 하늘 문이 열린다는 자시(子時)와 인시(寅時)에 공양을 올리며 제를 지내기도 하고, ‘한배검’이라는 비석과 수시로 꽂혀있는 깃발을 보면 대종교 사람들이나 무속인들의 기도소리가 끊이지 않는 곳이다. 천제단 아래 망경사는 신라 진덕여왕 때 자장율사에 의한 창건되었다 하니, 실로 오래된 기도처가 된 것이었으리라.
그리고 가깝게는 청령포에서 애달픈 삶을 마감한 단종이 태백천신이 되었다는 이곳 사람들의 믿음이 천제단 아래 있는 망경사 입구에 단종비각을 세웠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 입장에서 보면 지리산을 출발한지도 벌써 세 번째 여름이 되었다는 점이다.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느낌이다. 그런 이유로, 그냥 엎드려 감사드리고 싶을 뿐이다.
화방재까지는 4 km, 내리막이라 해도 한 시간 이상 소요되는 거리다.
지친 몸으로 사길령 산신각에 도착하니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해는 함백산 정상에서 붉은 기운을 길 위로 토해 놓았다.
풍수적으로 태백은 천년병화불입지지(天年病禍不入之地)로 알려진 길지인지라, 이 길을 따라 단양 영춘과 봉화 춘양에서 태백으로 넘나들던 봇짐장수들이 이곳 사길령 산신각에 도착하면 소원을 빌었을 것이다.
저녁 공양시간인지, 갓 피워 올린 향내가 은은하게 숲속에 그윽했다.
향(香)이란 본래 심신을 치유하고 삿(邪)된 것을 쫓는 능력이 있어, 그 향기가 하늘까지 뻗치니, 사람들은 천지신명과도 통하는 매개체가 되고 있음을 믿었다.
미륵불은 석가모니불이 이루지 못한 극락을 이루기 위해 도솔천에 머물고 있는 부처다. 그 미륵세상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질 좋은 향목(香木)을 바닷가에 묻고(埋香) ‘두드리면 쇳소리가 나고 태우면 깊은 바다냄새’가 나는 침향(浸香)을, 1000년이나 기다려 왔던 것이다.
그리고 심신을 단정히 하고 물소리, 새소리처럼 그 향을 듣는다 하여 ‘문향(聞香)’이라 했으니, 태백산은 그런 천년의 기도가 향(香)이 되어 民族의 영산(靈山)이 된 것이리라.
그런 이유로 태백은 언제나 사람들의 기도가 끊이지 않는 산이다.
‘발 없는 향이 천리를 가고 천년을 남는다’ 했던가. 오로지 무릎으로 올린 간절한 기도는 땅에 떨어지지 않고, 향이 되어 지금도 바람이 불면 천년의 소리가 가득한 태백산 산이 되었으리라.
( 07. 6. 16.)
글/조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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