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시방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
( 죽령 - 고치령 (2) 23.2km)

국망봉(國望峰)은 과연 마의태자의 한(恨)이 쌓여 산이 된 것일까.
또 다른 전설은 퇴계 이황의 죽음을 전해 듣고, 그 은혜를 잊지 못해 곡(哭)을 했다는 대장장이 사연과 선조가 승하하자, 대장장이 배순(裵純)이 삭망(朔望) 때마다 이곳에 올라 곡(哭)을 하는 바람에 얻어진 지명이라 했다.
배순은 본래 대장장이 이었으나 틈날 때마다 소수서원에 들러 퇴계의 강의를 듣다 퇴계의 제자가 되었다는 인물이다. 지금의 배점리라는 지명도 배순의 무쇠점(대장간)에서 유래되었다하니, 모두 전설 같은 얘기지만, 때론 기록이 없어도 역사가 되는 것이 전설이다.
국망봉은 오늘 산행구간의 중간지점이다.
남쪽 능선으로 내려가면 초암사와 죽계계곡으로 이어진다. 소백산 줄기에선 적어도 부석사와 같이 이름난 길지(吉地)로 알려진, 석륜암터 흔적이 봉바위(鳳頭岩)아래 깨진 기와 조각으로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고치령까진 아직도 10여 km, 족히 3-4시간은 소요 될 터... 상월봉으로 가는 길은 가슴까지 탁 트이게 하는 개활지요, 철쭉이 만개 할 쯤엔 천상의 화원이 되는 곳이다. 늦은맥이를 지나면서부터 높낮이가 거의 없는 부드러운 능선 길, 바람도 상쾌하고 발품팔기에 좋은 코스가 되었다.
소백산 철쭉하면 흔히 연화봉을 찾지만, 사실 국망봉이 더 유명하다.
소백은 지금 야생화 천지다. 연화봉 북쪽 능선으로 노랑제비꽃과 산괴불주머니, 노란 양지꽃들이 꽃밭을 이루었다.
국망봉으로 이어지는 능선 북사면으로 현호색 군락지가 펼쳐졌고, 꽃이 피면 아래를 처다 보지 말라는 처녀치마도 자주색 꽃잎으로 치마를 맞춰 입고 수줍게 서있다.
‘고양이 눈을 닮았다’는 노란 괭이눈 군락지도 눈에 띈다.
좀처럼 보기 힘든 꽃인데... 괭이눈은 노란색 꽃 크기가 2-3mm로 아주 작다. 그 크기로는 짧은 봄날, 제 때 수정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보름동안 잎으로 가짜 꽃(假花)을 만들어 곤충들 눈에 띄기 쉽게, 꽃과 같이 잎을 노란색으로 바꾼 다음, 수정이 끝나면 잎은 다시 초록색으로 돌아가는 꽃이다.
꽃도 아니면서 꽃 인 냥, 헛꽃(假花)을 피운 것이다.
그런 잎의 변신은 무죄이다. 꽃이 되고 싶었던 잎들... 어찌 보면 슬픈 사연 같지만 그들에게 있어 아름다움은 사치가 아니라 치열한 생존이다.
사찰근처에서 곧잘 눈에 띄는 산수국이나 육십령아래서 만난 산딸나무도, 헛꽃(假花)를 피우는 대표적인 식물들이다. 헛꽃은 종족보존을 위한 마지막 쾌락까지도 포기해야 하는 슬픈 운명을 지닌 꽃들이다.
헛꽃은 유혹을 위해 오로지 아름다워야 한다. 태어난 생은 화려하지만 어찌 보면 개화, 그 자체가 고통이다. 그러나 헛꽃은 진짜 꽃의 생을 대신 완성해준다. 꽃의 그림자와 같은 꽃이 헛꽃이다.
식물이름에 ‘참’ 자(字)가 붙으면 ‘진짜’라는 의미로 생김새나 맛이 좋거나 으뜸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새 중의 새가 ‘참새’요, 나무는 ‘참나무’, 꽃은 ‘참꽃’, 나물은 ‘참나물‘ 기름도 ‘참기름’이다. 반대로 ‘개’자가 붙으면 ‘개망초’ ‘개살구’ ‘개옻나무’ ‘개오동나무’처럼 모양도 시원찮고 맛도 떨어지는 것으로 인식되어있다.
지은 죄도 없으면서 태어나는 순간부터 ‘개’자를 달고 태어난 것이다.
모두가 인간들이 언어로 저지른 폭력의 흔적들이다. 그래도 꽃은 절망하지 않는다. 지구상 만물에게 주어진 삶은 어쩔 수 없는 공평함이지 선택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식물은 태어난 자리에서 단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다.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꽃을 피울 뿐... 생에 대한 불평, 불만이나 절망은 잘난 인간들의 전유물이다. 그런 역경 속에서도 아름답게 피어나는 꽃, 그 모습이 진정한 아름다움이리라.
국망봉에서 상월봉(1,394m)으로 이어지는 길섶으로 피기 시작한 철쭉은 진달래보다 개화는 늦었으나, 제 때 수분(受粉)을 위해선 색깔과 향이 더 짙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이유를 따지지 않고 진달래는 참꽃으로, 철쭉은 개꽃으로 부른다. 꽃이 생명체라면 색과 향은 꽃이 갖고 있는 유혹의 기술이다.
봄꽃의 유혹은 사치가 아니라 치열한 생존방식이다.
그런 탓일까, 봄이 되면 여인들의 입술도 짙어지고 옷도 현란해진다. 봄에 피는 꽃은, 그 색깔도 원색적이다. 해서 봄은 여인의 계절이 되었으리라.
그리고 소백에서 가장 바쁜 봄날을 보내는 것은 길가에 피어난 작고 앙증맞은 꽃들이다. 키 큰 나무들이 잎을 내어 햇살을 차단, 그늘이 생기기 전에 빨리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하니 서성거릴 여유가 없다.
당송8대가로 이름이 알려진 시인 소동파(蘇東坡)가 ‘봄밤의 한 시각은 천금과 같다(春削一刻値千金)’고 읊은 것처럼, 작은 꽃들에게 있어 봄날은 아주 짧다. 그러나 키 큰 나무들 입장에서 보면 급할 것이 없다. 봄이 깊어 갈수록 햇살은 자기들 차지가 되니 느긋하게 살아도 된다.
사람들은 그런 것을 운명이라 세상 탓으로 돌리지만, 그것을 핑계로 자리 탓을 하지 않는 것이 꽃과 나무들이다. 그런 꽃과 나무를 볼 때는 낮은 자세로 눈높이를 맞추고 천천히 살펴보는 것이 예의라 했다.
늦은맥이재(1,272m)에 도착하니 그늘도 바람도 산을 닮아 시원하다.
북쪽 능선을 따라가면 바둑판 바위가 있는 신선봉에서 민봉을 거쳐 단양 가곡면과 영춘면으로 이어지는 구봉팔문(九峰八門) 기슭으로 태고종 대찰(大刹) 구인사(救人寺)가 있는 계곡이다. 구인사까지는 4-5시간여 거리,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전설이 있는 온달성도 그곳에서 지척간이다.
‘시방 앉은자리가 꽃자리니라’
그런 꽃길을 걷고 있는 우리는 축복받은 사람들이다. 향긋한 풀냄새가 후각을 자극한다. 누군가 당귀냄새라 했다. 당귀라, 사방을 살펴보니 야생당귀가 널려있다. 잎을 뜯어 입에 넣으니 상긋한 향기가 입 안 가득 번진다. 향기는 오래간다. 적어도 2시간이상 입속에 남아 있었다.
후미 대원들은 힘겨운지 거리가 자꾸 벌어진다.
잡목지대를 지나 1,060봉과 연결되는 북쪽 사면에도 얼레지군락지가 눈에 띄었다. 마귀할멈 모자를 연상시키는 자주색 꽃잎이 앙증맞다. 자리 탓을 많이 하는 꽃인데... 아직 잎이 피어나지 못한 키 큰 잡목들도 봄맞이에 바쁜 모습이다. 마당치를 지나 1032봉에 도착하니 형제봉 갈림길이 나타난다.
이쯤 되면 거리상으로 대원들도 봄빛에 지칠 때가 되었다.
이제 형제봉을 넘어서면 영월 땅이다.
영월은 정선 어라연 계곡에서 내려오는 동강이 청령포를 돌아 서강을 만나 남한강 큰 물줄기를 이루니 굽이굽이 경승지가 숨어있는 곳이다.
풍경이 지극하면 애잔함이 깃든다 했던가, 어린 단종의 한 맺힌 죽음도 그렇고, 세조의 탐욕에 반기를 들었던 금성대군의 단종복위 거사가 실패로 끝나자 소백산 남쪽 고을인 이곳, 순흥까지 피로 물들여야 했던 참혹한 역사도 그러하다.
형제봉 갈림길에서 내리막 끄트머리가 구간 목적지 고치령(760m)이다.
어릴 적 시골 같으면 소몰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 갈 해거름이다. 멀리 저녁연기가 피어오르던 시골집과, 금방이라도 들려 올 듯한 어머님 목소리가 그리워지는 시각이다.
살다보면 시간은 흘러가고 기억으로 쌓이기 마련, 사람들은 그 흘러간 시간에 대한 기억이나 그리움을 향수라 정의했다. 살아가면서 생에 대한 기억을 가장 직접적으로 일깨워주는 것은 언제나 고향이다.
그런 이유로 사람들은 힘들어 질 때마다 고향을 그리워한다. 그리워 할 대상이 있다는 것은 삶에 대한 감사요, 기쁨이다.
저녁 때 / 돌아 갈 집이 있다는 것 /
힘들 때 /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이 있다는 것 /
외로울 때 / 혼자서 부를 노래가 있다는 것 (나태주. 행복2. 전문)
길이 끝나는 곳엔 집이 있다. 떠난 곳도 집이요, 돌아 갈 곳 역시 집이다. 일상에 지친 삶은 집을 떠나려 하지만, 길에서 지친 몸은 다시 집을 그리워한다.
고치령 고갯마루에 몸을 눕히고 하늘을 바라본다. 문득 고향이 간절해진다. 돌아 갈 곳이 있는 자, 행복하여라 이 또한 길 떠난 자들이 느끼는 평안함이요, 축복이리라.
미네소타 쑤우족 출신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평원을 달리다가도, 잠깐씩 멈춰 서서 자기가 달려 온 쪽 길을 돌아보며, 자신의 영혼이 제대로 따라 오는지를 기다렸다고 한다.
그렇게 되돌아 볼 때마다 우리들 몸은 길 위에 있었고, 길은 인디언 영혼처럼 따라와서 몸에 흔적을 남기곤 했다.
그것이 산행이고 길 떠남이리라. ( 07. 5. 5 )
글/조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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