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꽃소식은 죽령을 넘어가고

(죽령 - 고치령 (1) 23.2km)

21-1.꽃소식은 죽령을 넘어가고




▲ 노랑제비꽃, 아끼듯 피었다.

ⓒ 뉴스울산

화사한 꽃소식은 이미 죽령(685m)을 넘어가고 있었다.


부지깽이를 꽂아둬도 싹이 튼다는 봄이다. 죽죽(竹竹)이라는 사람이 최초로 넘었다는 설과 노승 한분이 60여리 고갯길을 넘다 짚고 가던 지팡이를 꽂아 놓았더니 잎이 났다하여 얻어진 지명이라 했다.


고개란 피할 수 없는 길목이다. 그리고 고개가 높다함은 험준하여 넘기도 힘들었겠지만 무엇보다 산적들의 출몰이 잦았던 곳이기도 하다.


죽령 역시 예외가 아니었듯, 두 아들을 산적한테 잃은 노파의 기지로 산적을 일망타진한 ‘다자구 할머니’는 죽어 죽령산신이 되었단다.


이 땅에서 삼국지의 제갈량이나 관우, 또는 호랑이가 아닌, 시골 주막집 할머니가 산신이 된 곳은 죽령이 유일하다.


죽령이 개척된 것이 서기158년이니, 하늘재 보다는 2년이나 늦은 셈이다. 그래도 2천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고개다.


소백은 부드럽고 아름다운 산이다.


오늘 산행구간은 죽령을 기점으로 소백과 태백의 지리적 경계로 알려진 고치령까지 약24km, 60여 리 길이다.


길에서 생각이 많으면 몸은 무거워지기 마련이다.


연화봉까지는 2시간 남짓, 시골길 같은 오르막이다. 그러나 소백산 천문대로 오르는 길은 넓고 포장까지 되어 있는데다 나른한 봄볕까지... 이내 지루한 길이 되고 만다.


길이란 본래 그 속성이 옷과 같아 몸에 맞지 않으면 주인을 힘들게 하는 것처럼 천문대로 오르는 길은 허튼 생각이 많아지는 길이다. 길에서 생각이 많으면 길은 힘들어 진다.


제2연화봉 목책 전망대에 올라 잠시 숨을 돌리니 멀리 비로봉, 국망봉까지 한 눈으로 들어온다. 봄기운에 가린 비로봉은 조망이 흐릿하다.


조선조 명종 때 예언서 격암유록의 저자 남사고(南師古 1509-70년)도 이런 풍광을 보고 그랬을까. 구름 속에 걸려있는 소백산을 보고 말에서 얼른 내려 큰 절을 한 후(南師古見小白次下馬拜) ‘과연 이 산은 사람을 살리는 산 (此活人山也)이라‘ 병란을 피하는 데는 소백이 으뜸이라 했다.


이중환도 택리지에서 병란을 피하는데는 태백산과 소백산이 제일 좋은 곳이라 했으며, 임란 때 양백지간(兩白之間)에 몸을 의탁한 사람은 목숨 하나만은 온전히 보전 했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가, 소백산을 오르면 우선 마음이 푸근해지는 느낌이 든다. 택리지(擇里志)에는 ‘샘과 돌은 계곡에 있고 산허리 이상에는 돌이 없는 까닭에 웅장하여 살기(殺氣)가 적은 곳’이라 했다. 큰 바위가 없으니 육산(肉山)이 되었으리라.


오르막은 그 흔적이 땀으로 남고, 몸은 봄빛을 핑계로 게으름을 피운다.


소백산 천문대에 도착하니 짙어진 봄 그늘이 지친 몸을 반갑게 받아준다.


천문대에서 연화봉(1,383m)은 코앞이다. 낮에는 전망이 좋은 능선길이요. 밤엔 천상의 별들이 모여 사는 곳이 소백산이다.


‘별빛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 있고, 가야할 길의 지도가 되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 했던가‘


별빛이 땅의 길이 되었다는, 폴란드 소설가 ‘좌르지 루카치’의 소설이론은 지금도 사막여행에서는 유효하다. 자신의 감각만 믿고 사막을 걷는 사람들은 커다란 동심원을 반복해서 돌기만 할 뿐, 끝내 사막을 건너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등산용어 중 ‘링반데룽(Ringwanderung, 環狀彷徨)'이라는 단어가 있다. 산에서 길을 잃거나 지쳤을 때 곧바로 걷는 것 같지만, 오른손잡이는 시계반대방향으로, 왼손잡이는 시계방향으로 원을 그리며 돌기 때문에 끝내 목적지를 가지 못하고, 결국 원점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이론이다.


때문에 오랜 경험의 현지 가이드는 지도가 아니라 달과 별의 위치로 방향을 잡는다.


얼마 전 TV를 보니 몽골초원의 유목민들은 지금도 하늘 별자리, 북두칠성을 보고 땅의 길을 찾아 가고 있었다. 어두워야 별이 잘 보이듯 살아가는 길, 역시 그러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즉 옛 선인들은 하늘의 길은 땅에 있음을 얘기했고, 땅의 길은 하늘에서 찾을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하늘과 땅은 늘 대칭인 동시에 서로를 보듬어 주는 관계였다.


벌써 20여 년 전 일인가. 희방사에서 구인사까지 소백산 종주 산행을 할 때 국망봉에서 처음 만났던 별빛의 기억은 참으로 대단했었다.


빈틈이란 단 한 점도 없이, 밤하늘 가득 빼곡했던 별빛들의 장관이 아직도 가슴을 뛰게 하는데, 우리는 지금 궁색하기 그지없는 가로등 불빛과 공해 때문에 별빛이 사그라진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초라한 모습이다.


어찌 보면 산다는 것이 그 잃어버린 별빛을 찾는답시고, 작은 손전등을 하나 들고 길을 잃고 허둥대는 모습이다.


별은 주위가 어두울수록 잘 보이는 법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오히려 어둠을 탓하고 있다. 지금 들고 있는 손전등조차 꺼야 별이 잘 보이는 데도 말이다.


지구에서 태양사이의 거리는 1억4960만km이고,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별, 프록시마(Proxima)까지는 빛의 속도로 4.3 광년의 거리다. 태양보다 16배나 밝은 씨리우스(Silius)는 8.6광년이며, 태양계에서 가장 가까운 은하인 안드로메다는 약 250만 광년의 거리다. 통상 우리 눈에 흐릿하게 보이는 별들까지의 거리를 과학자들은 대략 2000광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기록으로 남을 만한 지구의 역사라는 것이 길어야 1만년 정도이고, 생명체의 흔적은 대략 1백만 년이라는 과학자들의 주장을 믿는다면, 지금 저 별빛은 적어도 창세기 이전에 출발하여 방금 소백에 도착한 빛이 되는 셈이다.


가장 가까운 별빛이 이곳에 도착하기까지 4.3광년이 걸린다면, 우리들 삶이라는 것은 길어야 일백년이요, 내가 태어난 날을 곱 짚어 따져도 겨우 60년도 안 된다.


그런 티끌만도 못한 존재감은 기쁨보다는 슬픔으로 다가오기 쉽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생각하면 그 존재감은 오히려 ‘소중함’이 된다.


오늘 소백산에서 만난 별빛도 알고 보면, 역사 이전에 출발, 지금 소백산에 도착하여 기적과도 같이 만난 별빛이다. 그러나 그것을 깨닫기에는 오랜 세월이 걸렸고, 사람들이 너무 아둔했다는 점이다.


그 별빛 하나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산이 소백산이다.


그러나 소백산에서도 별을 제대로 관찰할 수 있는 날은 1년에 고작 50여일정도라 하니, 별빛도 귀한 시대가 되었음을 실감하게 된다.


그래서 일까, 다행이도 1999년에는 별빛을 관찰하며 즐기는, 소위 ‘별빛샤워’를 할 수 있는 공동체 마을, 별빛 보호지구도 생겼다. 강원도 횡성군 강림면 월현리 ‘천문인 마을’이다. 이제 별빛도 관광자원이 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과연 우리는 좋은 시대에 살고 있다해야 하나?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연화봉(1,383m)은 잠시 쉬기 좋은 소백의 서쪽 봉우리다.


멀리 능선 동쪽 끝 비로봉과 국망봉은 뿌연 봄빛에 갇혀있고. 철쭉은 아직 겨울잠속이다. 남쪽 계곡아래는 비교적 역사가 깊은 절, 희방사가 자리를 잡고 있다.


희방사의 창건 설화는 신라 선덕여왕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호랑이 목에 걸린 비녀를 뽑아준 두운조사(杜雲祖師)에게 호랑이는 아릿따운 아가씨를 물어다 주었다. 그러나 스님이 아가씨를 돌려 보내주니, 그녀의 아버지는 대신 기쁨을 얻었다는 희방사를 지어주었고, 절 아래로는 이곳이 내륙임에도 근교에선 가장 큰 폭포가 기쁜 소리를 우렁차게 쏟아내고 있으니 희방폭포다.


갓 피어오르는 연초록 빛 산을 보라한다.


화선지에 초록물감을 풀어놓은 듯 부드럽고, 수런수런 피어난 꽃향기를 바람이 전해주고 있다. 소백은 향기가 된 은은한 봄빛을 보라한다. 이쯤 되면 햇살은 연초록 잎을 농락하며 그윽한 훈향으로 절정이 된다. 바로 지금이다.


죽령을 넘으면 조선팔경(朝鮮八景)중 하나인 단양(端陽) 땅이다.


멀리 도담삼봉(島潭三峰)이 어림된다.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이 삼봉(三峰)이라는 호를 얻은 곳이다. 삼봉의 고향은 영주였으나 어릴 적 이곳에서 자랐다. 조선 건국의 토대를 다진 정도전의 어릴 적 꿈이 서려있던 도담삼봉은, 단양팔경 중 제1경으로 뽑힌 최고의 경승지다


그리고 정감록은 소백산 자락의 풍기 금계촌을 흉년이나 전염병, 전란이 미치지 않는 십승지(十勝地)중 첫째 길지로 꼽았다.


정감록이 예언한 십승지는 모두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산재해 있다.


‘임진(臨津)이북은 오랑캐 땅이 될 터이니, 몸을 온전히 보전 하는 것을 논 할 수 없다’. 정감록이 문제였다. 사실 한강 이북 땅에는 십승지로 점지된 곳이 한 군데도 없다. 그렇다면 정감록은 지금의 상황을 그때 이미 알고 있었다는 말인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당시 풍수도참설을 신봉했던 평안북도 박천, 영변지역 사람들은 189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무려 600여 가구, 약 3-4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풍기로 가야 살 수 있다’, 식솔을 이끌고 내려와 직물과 인삼을 업으로 정착을 했고, 그들과 함께 내려 온 것들이 지금 풍기 특산물이 되었다.


지금도 풍기엔 죽령이 보이지 않는(不見竹嶺), 어딘가에 숨어있을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 명당을 찾고자 풍수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진나라 풍수서 금낭경에 풍수를 깨치면 ‘신의 공도 빼앗고 하늘이 내린 운도 바꿀 수 있다(脫神功改天命)’는 천하 명당이 숨어 있는 곳이니, 소백은 이승의 삶 뿐 아니라, 저승의 죽음조차 쉬게 할 수 있는 명산이 되었다.


그런 이유로 조선조 선비들은 앞 다투어 소백을 다녀갔으며, 성리학의 거두(巨頭) 퇴계 이황도 소백산을 좋아했던지라, 풍기 현감으로 있을 때 초암사를 들러 죽계계곡으로 국망봉과 비로봉을 올랐던 유소백산록(遊小白山錄)을 남겼고, 조선 전기 대학자 서거정(徐居正)도 이곳에 올라 ‘태백산에서 치달려 온 소백산...(중략).... 하늘과 땅이 만든 형국 귀신도 울었다’ 는 시를 남기기도 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후세 사람들은 그 시를 새긴 비석을 비로봉 정상에 세워 놓기도 했다.






▲ 소백 철쭉은 아직 동안거 중이었고...(비로봉 정상)

ⓒ 뉴스울산


연화봉에서 비로봉까지는 약6km, 비교적 편안한 능선 길이다.


제1연화봉(1,394m)까지는 편하게 내려섰다가 급히 솟구쳐 오르는 산세인지라 숨고르기가 필요한 구간이다. 비로봉 앞 대피소에서 북서쪽은 단양 천동계곡으로 하산하는 코스다.


그러나 대간 길은 연화봉에 이어 부처님 광명이 온 누리에 비친다는 비로봉과 국망봉, 상월봉으로 쉼 없이 이어진다.


길이 편해지면 말이 많아지고 발걸음에는 게으름이 묻어나기 마련인가.


그러나 어쩌랴, 비로봉아래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을 산다(生千死千)’는 주목을 보면 요즘 와서 화두가 된 ‘느림’이 생을 살리는 묘약임을 깨닫게 한다. 적어도 200년, 많게는 700년 세월을 살고 있는 나무, 줄기가 붉다하여 주목(朱木)이다.


오래 살아도 백년 채우기 어려운 것이 인생인데(人生不滿百), 수백 년을 살아 온 주목은 살았을 때는 늠름한 풍채로, 죽어서는 귀중한 목재로 대접을 받았다. 천년을 산다는 이유로 왕들은 왕조의 영원한 복락을 기원하며 궁궐 의 가구재로 쓰기도 했다.


워낙 귀한 나무인지라 산림청에선 지금도 일련번호 표찰을 달아놓고 생육상태를 관리한다. 그러나 잘생긴 주목은 이미 베어지고 없다. 못생긴 주목들만 살아남은 곳이 소백산 주목 군락지다. 거센 바람에 휘고, 부러지고 벗겨지고...안쓰럽다. 몸은 온통 상처투성이다.


소백산 주목(朱木)은 만물을 오로지 쓸모(有用)로 보는 인간의 욕심을 피해 간신히 살아남았고, 그 쓸모없음 때문에 그나마 살아남았음(無用之用)을 보여주고 있는 증거가 되어 있다.


작금에 이르러 그 쓸모없음(無用)을 양산하고 소비하는, 자본주의 폐해를 해결할 수 있는 키워드로 떠오른 것이다. 적어도 2400여 년 전, 장자가 무심코 던진 화두 하나 갖고, 지금도 끙끙대고 있는 것이 인간들의 모습이다.


소백의 정점은 비로봉(1,439m. 毘盧峰)이다.


비로(毘盧)는 지혜의 빛이 비추어 가득하다는 부처님의 진신(眞身), 우주만물을 관장하는 비로자나불이 상주하는 봉우리다. 그 자체만으로도 소백은 부처의 산이다. 소백의 백미(白眉) ‘빛을 발하여 어둠을 쫓는다’ 는 비로봉이다. 그러나 등산객들이 볼 때는 거센 겨울바람과 설화로 더 유명한 봉우리가 소백산 비로봉이다.


‘세상사 답답하고 허전할 때 소백산 겨울바람을 맞아보라.’


소백산 겨울바람은 거센 바람 속을 서 있어 본 사람만이 그 속내를 안다고 했다. 마치 날카로운 바늘이 얼굴에 박히듯 불어오는 바람 속을 걸어 본 사람은 살아가는 일에 있어, 왜 겸손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해준다.


양 볼이 얼얼해지고 가슴속까지 후련해지는, 소백산 비로봉 바람은 중독성이 강하다. 이른바 소백산 ‘겨울 따귀 바람’이다. 그 바람맞이에 한 번 빠져 본 사람은 겨울만 되면 소백산을 오르지 못해 안달을 한다.


필자 역시 비로봉 ‘따귀 바람맞이‘를 하지 않으면, 그 해 겨울나기가 힘들었던 젊은 날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 했던가. 그 바람소리를 듣고 싶어 30여 년 동안, 무려 마흔 번 이상을 찾았던 산이기도 하다.


‘그 때는 미쳐도 단단히 미쳤었지요‘


지금도 눈덮힌 소백산 전경이 TV화면에라도 나타나면, 내게 핀잔을 주는 아내의 푸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야 했다.


봄빛에 지쳤는지 배낭이 무거워진다.


아직도 40여리가 남았는데... 마음은 편안한 삼가동 하산코스를 탐한다. 곧바로 하산하면 비로사(毘盧寺)코스요, 북쪽으로 넘어가면 단양군 가곡면 어의곡리로 내려가는 계곡길이다. 채 2시간도 걸리지 않는다.


하늘이 떠돌음이라면 땅은 쉼이다.


잠시도 머물지 못하고 떠도는 삶을 뜬 구름(浮雲)같은 생이라 했던가.


땅을 딛고 살아가는 삶이란 어쩔 수 없이 한(恨)이 깃들기 마련, 건너편 우뚝 솟은 국망봉(國望峰) 사연도 그러하다.


나라를 잃고 월악산(月岳山) 기슭에서 떠돌던 마의태자가 국망봉(1,421m)에 올라 망국의 한을 달랬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본래 사람은 땅에 깃들고(人傑地靈), 땅은 그로 인해 이름을 얻고,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법이라(地因人得名而彰)했지만, 국망봉은 사람의 한(恨)이 모여 땅의 이름이 된 것이리라.


 ( 07. 5. 5일 )


글/조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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