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조관형의 백두대간 그 길을 걷다

바람은 밤새 나뭇잎을 흔들어 잠을 깨우고중산리 - 성삼재 (2)

2, 조관형의 백두대간 그 길을 걷다

바람은 밤새 나뭇잎을 흔들어 잠을 깨우고
중산리 - 성삼재 (2)
 
저녁 늦게 연하천(煙霞川) 산장에 도착했다.
아침 안개가 내(川)가되어 흐른다는 연하천이다. 벽소령 달빛이요, 연하천은 이름 그대로 저녁노을(燃)과 새벽안개(霞)가 절경이다. 그 새벽안개와 노을을 지나치게 좋아 하는 것을 연하벽(煙霞癖)이라 했다.


천하절경도 정(情)과 같아 깊어지면 고질병이 되니 연하고질(煙霞痼疾)이다. 지리산에 오래 머물다 그쯤 되면 주위에서 입산(入山)을 권하곤 했다.


지금도 그런 이유로 지리산 품안으로 몸을 의탁한 방외지사(方外之士)가 족히 3천명 쯤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리산은 그런 산이다
 
예상대로 연하천 산장에는 자리가 없었다.
후회해도 소용없다. 산장은 이미 초만원이다. 더구나 벽소령에서 1박하는 것으로 계획했으니, 텐트는 커녕 매트며 담요도 있을 리 없다. 궁여지책으로 버려진 비닐조각을 깔고 누워보니, 말 그대로 하늘은 이불이요,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초롱초롱 빛나는 별빛이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그러나 그런 낭만도 잠시, 산 아래서 노닐던 추위가 어느새 몰려 올라왔는지, 바람은 밤새도록 키 큰 나무를 사정없이 흔들어 댔고, 땅바닥 냉기는 몸 구석구석을 비집고 들어왔다. 지면에서 올라오는 냉기로 밤새도록 몸은 뒤집기를 반복해야 했다.


피곤에 떨어져 잠시 눈을 붙인 것 같은데... 추위로 눈을 뜨니 새벽 3시, 종일 산행했음에도 취침시간은 정확히 2시간 30분 뿐, 긴 밤을 감당하기엔 시간이 너무 많았다.


그러나 춥고 어두웠던 밤은 기다리는 것 외 달리 방법이 없다. 지금 생각해도 평생을 그렇게 추위에 떨며 참고 살아야 하는 것이 삶이 아닌가 싶도록, 연하천의 하룻밤은 길고도 길었다.
얼마나 떨었던지 이튿날 해가 뜨니 턱 관절이 뻐근하고, 온몸이 아파왔다.
 
추위도 제 철이 있는가 보다.
겨울 추위야 당연하지만 여름은 몸을 힘들게 한다. 밤새도록 추위에 시달린 몸은 무겁기가 천근만근, 더구나 예약까지 된 벽소령 산장을 포기했으니, 그것도 욕심 탓이다. 알면서도 행하지 못함이니 큰 어리석음이다.


오늘 산행구간은 연하천에서 노고단을 지나 성삼재까지 약12km, 다행히 하늘은 말고 날씨는 쾌청하다.
 


 






바람은 밤새도록 나를 흔들어 깨우고...
 
우선 토끼봉을 지나 화개재까지는 2시간 거리이다.
중산이재로 불리던 화개재는 ‘겨울 눈 속에서도 칡꽃이 핀다’는 전설이 숨어있는 길지로 지리산 주능선에서는 가장 낮은 고개다.


화개재(1,360m)는 그 옛날 섬진강을 이용한 수운(水運)이 발달했을 때, 화개를 출발한 장돌뱅이들이 뱀사골로 넘어 다녔던 고개로, 마천 운봉 등 내륙에서 생산된 곡물과 남쪽의 해산물 교역이 이뤄지던 곳이다.
그뿐이랴, 북쪽 함양 땅은 신재효 판소리 열두마당 가운데 변강쇠 타령 ‘가루지기’의 주 무대이니, 천하의 색골 변강쇠와 잡년 옹녀의 질펀한 육담(肉談)까지, 이곳 화개재를 넘어 꽃이 핀 소식처럼, 화개(花開)장터로 전해졌으리라.
 
‘동 금강(東 金剛) 석산이라 나무 없어 살 수 없고, 북 묘향(北 妙香) 찬 곳이라 눈 쌓여 살 수 없고, 서 구월(西 九月) 좋다 하나 적굴이라 살 수 있나. 남 지리(南 智異)는 토후(土厚)하여 생리(生理)가 좋다 하니, 그리로 살러가세’.
 
천하의 색녀 옹녀와 색골 변강쇠가 나눈 사설에서 산에 들어가 살기로 하고, 떠돌다 찾아 든 곳이 지리산 그늘아래 함양 마천으로 고증되어 ‘함양은 변강쇠의 고장’이 되었다.


그뿐이랴, 영남사림의 좌장(座長) 김종직은 지리산이 좋아 함양군수를 자청했고, 무오사화 때 죽임을 당한 문신 김일손도 지리산을 흠모하여 진주목사를 자원했으니, 예로부터 지리산은 골이 깊고 후덕해서 선비들 뿐 아니라 가난한 백성들도 살기에 좋은 산으로 꼽혔다.
 
화개재에서 북쪽으로 곧장 넘어가면 요룡대, 탁룡소, 뱀소와 같이 용이나 뱀과 관계된 담(潭)과 소(沼)로 유명한 뱀사골이다. 그 외에도 소금장수가 빠졌었다는 간장소며 병풍소등, 계곡을 흐르는 물이 ‘한국의 100대 명수(名水)’로 꼽힐 정도로 물 또한 맑은 계곡이다.


이곳 주능선에서 반야봉(般若峰)으로 갈라지는 삼거리까지는 이십 여분거리, 전북(남원)과 전남(구례), 동쪽으로 경남(하동)이 만난 봉우리가 날낫봉(날라리봉)으로 불리는 삼도봉(三道峰. 1289m)이요, 서북쪽 능선을 따라 사십 여분 거리에 우뚝 솟은 반야봉(1732m)은 지리산에서 최고의 전망대로 알려진 곳이다. 높이로 따지면 천왕봉 다음이지만, 산세로 본다면 지리산에서 첫손에 꼽히는 길지(吉地)로 알려진 곳이다.
 
반야(般若)는 지혜의 다른 이름이다. 반야봉은 중생(衆生)들의 사량(思量)분별은 ‘비움’에서 이뤄지나니, 모두를 내려놓고 오라한다.


그래서일까. 뜻있는 산 꾼들은 배낭을 벗어놓고 반야봉에 다녀오곤 한다. 반야봉에 올라서면 동쪽으론 천왕봉에서 서쪽으로 멀리 만복대까지, 거칠 것 없이 펼쳐지는 지리산 주능선이 한 눈으로 조망되는 바람에 반야봉은 지리산에서 최고의 전망대로 손꼽히는 곳이다.


그런 산들을 평생 바라보았으니, 관조보살(觀照般若)이라, 반야봉도 보살이 되었으리라. 옛사람들은 반야봉에 올라 평생에 꼭 한번 반야낙조(般若落照)를 보라했다. 세상사 잠시 손을 놓아도 좋다는, 일몰풍광이라 하니 지리4경이다.
 
조선조 명종 때 관군도 쩔쩔맸다는 도적 임걸년(林傑年), 그 이름을 딴 임걸령 고갯마루에서 곧장 내려서면 척박한 토양에서도 잘 자라는 기장(稷)농사는 된다하여 피밭골(稷田)로 불리던 골짜기다.


임진왜란 때는 의병들의 최대 격전지였고, 항일투쟁의 결전장이었으며, 6.25전쟁도 이곳으로 숨어든 빨치산과 그를 토벌하기 위해 투입된 국군들이 흘린 피가 계곡을 붉게 물들였다하여 ‘피아골’이라 했으며, 누군가 그 피아골을 ‘지리산의 울음주머니’로 표현하기도 했다.


천공(天公)이 나를 위해 뫼빛을 꾸몄으니 / 산도 붉고 물도 붉고 사람조차 붉어라. (남명의 삼홍소(三紅沼)부분)
 
산이 붉게 타오르니 산홍(山紅)이요, 붉게 물든 단풍이 물에 그윽하여 수홍(水紅)이니, 그 풍광에 든 사람조차 붉게 물들어 인홍(人紅)이다.


삼홍(三紅 )에 취한 남명(南冥) 조식선생은 ‘피아골 단풍을 보지 않은 사람은 단풍을 보았다고 말 할 수 없다’ 피아골 절경을 노래하기도 했다.


그 풍광이 가히 선경인지라, 지리산 일출 다음으로 지리 2경에 뽑혔다.
 
피아골에서 곧장 주능선 방향으로 올라가면 임걸령과 돼지령으로 노고단까지는 지척간이다. 돼지평전은 말 그대로 멧돼지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질매재에서 문바우동으로 이어지는 왕시루봉(1,243m)엔 예배당과 10여동의 외국인 별장이 지어졌고, 그곳에서 구약성서(舊約聖書) 번역이 이뤄진 곳이라 하여, 지금도 기독교인들에겐 남다른 봉우리로, 당시 지은 수양관등 건물의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제 지리산 종주산행의 끝자락, 엊저녁 선잠으로 몸은 무거웠지만 노고단(1,507m)에 올라서니, 멀리 유장하게 흐르는 섬진강 자락이 눈길을 위로해준다.


‘두꺼비 섬(蟾)’에 ‘나루 진(津)’, 섬진강은 왜구가 처 들어 왔을 때 수만 마리 두꺼비 떼가 강을 막고 고함을 질러 왜선을 가두었다는 전설의 강이다. 섬진강 두꺼비는 왜구도 물리쳤는데...그래서인지 섬진강은 자존심 강한 강이 되었으니, 그곳 사람들도 강을 닮았을 것이다.


전북 진안군 백운면 데미샘에서 솟아난 강줄기가 임실을 지나 곡성, 구례를 거쳐 지리산과 백운산 사이로 흘러, 하동과 광양의 경계를 이루니, 물길 하나로 경상과 전라를 나누었을 뿐 아니라, 남도소리를 태동시킨 소리의 강이기도 하다.


강을 중심으로 서쪽인 강진, 해남, 보성은 넓은 들판을 품고 있어 소리조차 애절하고 감칠맛이 나는 서편제요, 동쪽인 운봉, 구례, 순창지역 소리는 지리산을 닮아 매듭이 굵고 호방한 동편제가 되었다.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이지 않고 모여 흐른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이 노래한 섬진강 5백리 은빛 물결이 안개와 낙조에 갇히니, 시인 고은의 헌사가 아니라도 섬진강은 무엇보다 일몰이 아름다운 강이 되었으리라.
그 유장한 모습이 지리 10경이다.
 
지리산은 여신의 산이다. 그 여신은 선도성모 또는 마고(麻古)할미, 노고(老姑)라 불리는 천신(天神)의 딸로 알려져 있다.
그 제사를 올린 신단이 있었던 노고단(老姑檀)에는 신라시대부터 선도성모(仙挑聖母)를 모시는 남악사(南岳祠)가 있었고, 천왕봉엔 마고할멈 전설과 함께 성모석상을 봉안한 성모사(聖母祠)라는 사당(祠堂)이 있었다.
그런 이유로 지리산은 시작과 끝 봉우리가 모두 여신을 받드는 산으로 마치 어머니 품속과도 같은 산이 되었다. 그리고 그 끝 봉우리 노고단은 천왕봉, 반야봉과 함께 지리산 3대봉으로 우러름을 받게 되었다.


 







지리산에 와서는 뒤돌아보지 말라 했다
 
그러나 이곳 노고단도 민족의 비극이 비껴가질 못했다.


여순반란 사건 때, 반란군 잔존세력이 노고단 외국인 별장촌을 거점으로 투쟁하는 바람에 국방경비대는 50여 동이나 되는 별장건물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안타까운 일이다.


곧바로 내려서면 서부 지리산의 관문이며 불국토(佛國土) 화엄세계를 구현한 화엄사계곡이요, 북쪽으론 적어도 삼한시대까지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달궁계곡으로, 용이 못된 이무기의 전설에서 연유된 뱀사골을 만나, 구산선문 실상사를 세웠으며, 지리4대 관문중 하나인 팔랑치를 넘어 운봉으로 이어지는 전략상 중요한 길목이 된 계곡이다.
 
노고단에서 성삼재까지는 비교적 편안한 내리막길이다.


지리산에 와서는 뒤돌아보지 말라했다. 지리산을 닮지 못한 사람, 그 지혜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 크고 넓은 산 아래서 초라해진 자신을 돌아보지 마라, 발 앞에 놓인 현실이 쓸쓸해질까를 염려했던 것이다.


그래서 지리산이다. 지리산은 사람을 차별 하지 않는다.


세상 구석으로 내몰린 사람도, 시대와 불화를 일으켜 더 이상 갈 곳을 잃은 사람도, 둔세(遁世)와 둔천(遁天)을 따지지 않고 모두를 받아주는 어머니 같은 산이었다.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모두 산으로 갔어요’


시대와의 불화를 문학으로 꽃피운 신동엽시인의 ‘진달래 산천(山川)’을 시작으로, 조정래의 ‘태백산맥’ 박경리의 ‘토지‘ 이태의 ‘남부군’ 이병주의 ‘지리산’ 등 지리산에서 벌어진 민족의 비극을 문학으로 승화시킨 글들이 서점가를 장식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읽히는 책들로 지리산의 상처를 보듬기엔, 그 상처가 너무 깊다.
 
설악산은 바다를 등진 산세가 기묘하여 사람들이 끌리고, 소백은 보기에도 후덕한 육산이니 쉴 만하고, 태백은 민초들의 간절한 소망이 된 기도처요, 오대산은 연꽃모양 5대 봉우리에 부처님 진신사리(眞身舍利)까지 있으니, 불법이 만대를 이루는 부처의 산이다.


그러나 지리산을 수없이 다녀 온 사람들이나, 아예 그 품에 살고 있는 사람
들조차도 지리산을 얘기하라면 ‘모 . 르 . 겠 . 다’ (不知)고 답한다.


필자 역시 지리산 종주 산행기를 쓰면서도 조심스럽다. 심히 두렵고 자신이 없다. 그리고 다가갈수록 산은 더 멀리 달아나는 모습이다. 가까이 할수록 알 수 없는 산이다.
 
‘산은 지리산이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쓴 유홍준 교수는 지리산을 그렇게 말했다.


글, 사진/ 조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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