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아부지 돌 굴러가유 -

(하늘재 - 차갓재 19.1km)

18.아부지 돌 굴러가유 -

고개(嶺)는 산이 내려와 쉬는 곳이다.


이 산과 저 산을 불러내고,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며, 나그네 발길도 붙잡고, 바람도, 구름도 잠시 쉬어가며 인간사 이별과 상봉이 이뤄지던 곳이 고개다.


오고가는 나그네들이 온갖 세상사를 전해주던 곳이요, 고갯마루 성황당(城隍堂)은 힘없고 배고픈 백성들의 서러움조차 받아주던 곳이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이 고개만 넘으면 된다 ’ 위로받고 꿈을 꾸게 했던 곳이기도 하다.


오래전부터 가난한 백성들은 고개 너머 세상을 간절히 그리워했다.


이승의 삶이 힘들수록 고개 너머 세상은 좋으리라는 바램으로 피안의 땅이 되었다. 고개는 아주 오래된 길의 또 다른 형태, 삶의 매듭과도 같은 곳으로 가보지 않은 세상으로 이어주는, 그리하여 숱한 꿈이 된 곳이 고개다.


 


고갯마루 하늘재에 세워진 유허비(遺墟碑)에는 영남과 기호지방을 연결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해오면서 장구한 세월동안 온갖 풍상과 애환을 간직한 고개가 계립령이라 기록되어 있다.


하늘재, 지릅재, 대원령으로도 불리었고, 신라가 북진을 위해 아달라왕(阿達羅尼師今) 3년(156년)에 열렸으니, 기록상으로는 죽령보다 2년이나 앞서 열린, 이 땅에서 가장 오래된 고개다.


그 후 태종1년(1414년), 조령(鳥嶺)이 개척되었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군사적 요충지로 그 중요성이 인식되자, 하늘재는 그 역할을 조령으로 넘겨주었지만, 오랜 세월동안 묵묵히 애환을 간직해 온 하늘재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유허비를 세웠다는 내용이다.


 


하늘재(525m)는 그 생김새를 보면 고개라고 말하기도 쑥스럽게 고갯마루가 밋밋하다. 그래도 북서쪽으로는 험준한 월악산과 남쪽으론 수려한 문경새재 계곡이 한눈으로 조망되는 곳이다.


높이가 그리 높지 않았음에도 ‘하늘’이라는 지명을 얻은 이유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적어도 2000년의 역사를 간직한 유서 깊은 고개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곳 하늘재는 삼국시대 한반도의 중원(中原)에 해당 되는 역사의 중심지이었다.


특히 백제에 의해 꽉 막혔던 하늘재를 신라가 차지한 후, 지금의 한수면 송계계곡 아래로 흐르는 남한강 줄기를 따라가면, 한강으로 이어졌으니, 영남에서 서울로 가는 물길이 열린 셈이다.


그런 이유로 신라와의 일전을 앞두고 있던 고구려 온달장군이 던진 출사표에도 하늘재의 중요성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계립현(하늘재)과 죽령 서쪽 땅을 되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으리라’.


삼국사기 열전(列傳) 온달조(溫達條)의 기록이다.


 


그리고 망국의 한을 품은 마의태자와 덕주공주도, 이곳 하늘재에 올라 향후 거처를 도모했으며, 천년사직을 포기한 경순왕도 이 길을 통해 고려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리고 고려 마지막 공민왕도 홍건적을 피해 내려 올 때도, 이 고개를 넘어 왔으리라.


처음엔 백제 땅에서 고구려로, 진흥왕 때는 신라로, 신라가 망하고 나니 고려 땅으로... 중원은 삼국의 치열한 격전지였다.


남한강 목계나루가 고향인 시인 신경림(申庚林)은 충청도 말이 느린 이유를 이곳 조령, 죽령, 하늘재 등 군사적 요충지, 고개에서 찾는 해석을 했다.


말인즉 산이 깊고 고개가 높다보니, 외부소식이 늦어져 지배층이 수시로 바뀌어도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제 때 정세를 알 수 없었다.


때문에 낯선 사람을 처음 보았을 땐, 상대가 어느 지역출신인지 살펴 본 후에 말을 해야 했으니 말이 느려졌다는 시각이다. 목숨이 경각에 달렸으니, 재미있고 근거 있는 발상 같다.


충청도가 고향인 필자가 어렸을 때 곧잘 들어왔던 얘기하나, ‘아부지 돌 굴러가유우- ’ 아부지는 이미 돌에 맞아 죽었단다. 뿐만 아니라 선거 때도 여론조사를 하면 ‘뭐 다 그려-’ 그 속내가 무덤 같은 곳이요, 웬만한 유명가수가 와도 제대로 된 박수 한번 받기 힘든 곳이 충청도 그것도 북도라 했다.



 


하늘재라, 하늘로 가는 고갯길이라는 뜻인가.


예로부터 중생들의 삶은 그 자체가 고해(苦海)인지라, 하늘이라 함은 이승의 고통을 달래 줄 이상향에 해당하는 피안(彼岸)의 땅이다. 그런 염원 때문일까 지명조차 하늘재이다. 그리고 하늘재 남쪽은 문경읍 관음리(觀音里)요, 북쪽은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彌勒里)이다. 지명으로 보면 하늘재는 현세의 예토(穢土)에서 내세의 정토(淨土)로 이어주는 고갯길이다.


그런 이유 때문일까, 하늘재 남쪽 관음리에는 이승의 고통을 달래주는 사찰도 30여 개나 있었다 하니, 이승의 속진(俗塵)조차 훌훌 털고 미륵 세상이 열리는 고갯길, 하늘재는 ‘미륵의 나라’로 가는 고개가 되었으리라.






ⓒ 뉴스울산


미륵은 본래 석가의 도반(道伴)이었다.


부처가 될 바탕은 석가(釋迦)보다 반듯했으나, 게으름을 피우다 성불하지 못하고 다시 올 날을 기다리며 도솔천에 머물고 있는 보살이다.


부처가 열반에 들기 전, 비교적 상세하게 그 비밀을 밝혀 둔 열반경(涅槃經)은 부처를 우담화(佛如優曇華)라 했다. 우담화는 3000년 만에 꽃을 피운다는 전설의 꽃이다. 그런즉 부처 또한 3000년이 되면 다시 오신다는 뜻이리라. 이 땅의 불자들은 그렇게 믿고 있다.


불기(佛紀) 3000년은 1972년이다. 근세에 들어 그 징조로 보나, 시기를 놓고 보면 석가불은 운(運)이 다했고, 이제 미륵불의 새 세상(運)이 열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럴지도 모른다. 지금 하늘재 너머 상모면 미륵리(彌勒里) 미륵사지에 영험한 모습으로 서 있는 미륵불을 보면, 미륵의 용화세상은 이미 상징적으로 도래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지상선경(地上仙境), 불로불사(不老不死), 그 열락(悅樂)의 땅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하늘재이니 참 좋은 지명을 얻은 곳이리라.


누구든지 하늘재 너머 미륵사지에 서서, ‘한국의 불가사의(不可思議)’로 알려진 부처의 얼굴을 한번 살펴보라. 천년이라는 세월동안 이끼조차 범접치 못한 부드럽고 환한 미소를 마주하는 순간, 그대는 미륵세상의 현현을 긍정하게 될지도 모른다. 미륵불은 이제 판도라 상자에 마지막 남은 희망이 된 셈이다.


그리고 곁에 바보 온달이 갖고 놀았다는 장정 한 아름 크기의 ‘공기 돌’ 바위라도 보고나면 세상사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될 것이다.


고갯마루는 엊저녁 밤을 도와 내린 눈으로 덮여있다.


포암산도 눈 포대기로 덮였다. 서설(瑞雪), 첫눈이니 기념 촬영부터 하잔다.


베바우산이라 불리는 포암산(962m)까지는 1시간 거리, 마치 커다란 베(布)로 바위를 덮어 놓은 모습 같으니 포암산(布岩山)이다.


구름도 없고 날씨조차 쾌청하니 발걸음도 가볍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엊저녁 내린 눈비가 얼어붙은 포암산 오르막길은 발 딛기가 힘들 정도로 미끄러웠다. 미끄러짐을 반복하길 무려 2시간여, 고생 끝에 정상에 오르니 멀리 동쪽 능선 끝, 대미산까지 시원스런 조망이 우릴 반긴다.


대미산(大美山)까지는 30여리, 8-9백 미터 급 봉우리 8-9개를 넘고, 다시 1천 미터나 되는 산을 3개 넘어서야 하니, 말 그대로 열두 고개, 한나절은 족히 발품을 팔아야 하는 긴 능선 코스다.



옛날 얘기를 하면 고개는 왜 꼭 열두 고개였는지 모르겠다.


어릴 적 할머니께서 해주시던 ‘팥죽장사 할머니’얘기도 열 두 고개이다.


고개를 넘을 때마다 팥죽 한사발만 주면 잡아먹지 않겠다며 따라 온, 배고픈 호랑이한테 팥죽을 퍼주다가 그마져 떨어지자, 팔 다리까지 떼어주고 목숨만 살려 달라고 애걸 하시던 팥죽할머니, 그러나 끝내 호랑이 밥이 되었다는 얘긴데 ... 긴 겨울밤이면 할머니께선 그 얘기를 들려주시곤 했다. 그 얘기를 듣고 또 듣다가 졸기도하고...난 지금도 그 얘기를 끝까지 외울 수 있다.


왜 그랬을까, 그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것이 세월이라며 중얼거리시던 할머니, 지금 생각하면 팥죽할머니는 할머니 자신이 아니었던가 싶다.


눈까지 살짝 내린 대미산까지는 팥죽할머니 열두 고개 보다 더 길게 느껴지는 거리이다. 장정걸음으로 꼬박 6시간 이상이 소요 되는 긴 능선길이다.


낙엽이나 눈이 하늘에서 내린 것은 똑 같다. 눈은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내려왔고, 잎은 아주 짧은 시간동안 떨어져 왔을 뿐인데... 초겨울 산길에 겹쳐서 쌓이니, 스키장이 따로 없다. 낙엽스키라 해도 될까. 대원들은 죽죽 미끄러지면서 엉덩방아를 찧으며 명쾌한 소릴 지른다.


 


용하구곡으로 내려서는 부리기재에서 배낭을 벗고 잠시 쉬었다.


떨어져 쌓인 낙엽으로 미끄럽고 긴 능선 길에 모두들 지친 표정이다. 그나마 신참대원을 844봉에서 관음리로 탈출시킨 것이 다행스런 일이 되었다.


대미산(大美山 1,115m)은 문경에선 가장 큰 산이다. 또 다른 지명은 검은 눈썹 산(黛眉山), 두루 큰 산(大彌山)이라고도 하지만, 긴 능선을 걷고 보니 너그럽고 후덕한 장쾌한 육산(肉山)일 뿐이다.


뒤돌아보면 문경의 진산인 주흘산과 북쪽으론 골격이 뚜렷하고 장엄한 월악산이 눈길을 끈다. 산행출발 10시간여 만에 대미산 정상에 도착했다.






▲ 내린 눈은 꽃이 되었다.

ⓒ 뉴스울산


정상이란 모든 것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가끔씩 이렇게 정상에 서면 이승의 삶이라는 것이 어딘지 모르게 왜소하고 궁핍하게 보인다. 왜 그런 느낌에 사로잡히는 것일까.


그러나 저기 저 나무들은 저렇게 모두를 버리고도 당당한 모습들이다.


때가 되어 훌훌 털고 돌아가니(各復歸其根), 산도 나무도 하늘까지 텅 비어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萬法歸一), 그 하나가 돌아가는 곳은 어디인가(一歸何處), 경허스님의 상좌(上座)인 만공스님이 불목하니 13년 만에 얻은 화두(話頭), 우주와 내가 궁극적으로 하나라는, 범아일여(梵我一如)다.


 


차갓재까지는 아직 십 여리길, 눈길이니 2시간이상 예상되는 거리다.


물맛이 좋다는 눈물샘을 지나 새목재에 이르자 낙엽송 군락지 위로 휘영청 둥근 보름달이 솟아오르니, 한 풍경이 된다.


하늘 한가운데 우뚝 솟는 천중월(天中月)이다. 달빛 가득한 눈길 위를 걸어가니 길목마다 나목(裸木)사이를 비추는 산중월(山中月)이요, 걷어가는 발자국 소리마다 달빛이 묻어나니 심중월(心中月)이 되었는가.


불혹이 되면 달빛도 가슴으로 들어온다 했던가. 가슴가득 달빛이 가득 차오르는 느낌이다. 사위는 달빛아래 절경을 이룬다.


‘뽀드득 뽀드득’


발자국에 소리가 밟힌다. ‘아 - 얼마 만에 들어 보는 소리인가.’ 아주 어릴적 들었던 그 맑은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순간 귀가 열리는 느낌이다. 그 소리는 산행이 끝날 때 까지 계속 따라왔다.


 


걷는다는 것은 발(足)과 땅(地)이 하는 끊임없는 대화이다.


발 디딤과 떨어짐 그리고 앞으로 옮김, 그 반복행위가 인간의 가장 오래된 이동방법인 걷기다. 걷기는 어찌 보면 지극히 단순한 행위다. 그 단순한 반복행동으로 발과 땅이 하나라고 느껴질 때 무심을 불러오며 몸도 가벼워진다.


걷기의 규칙적인 진동 구조는 명상훈련의 좋은 방편이다. 단지 걸었을 뿐인데... 생각은 단순해지고 머릿속까지 맑아져 옴이 느껴진다.


그래서 일까, 노자(老子)는 욕심이 적으면 족함을 얻고(少則得), 앎이 많으면 미혹하게 되나니(多則惑), 부처님은 하심(下心)을, 예수님은 ‘내려놓음’을 얘기했다. 어린애가 되라, 그렇지 않으면 천국에 가지 못할 것이라 했다.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할 때 곧잘 ‘시작이 반’이라는 얘기를 하곤 한다.


그러나 그동안 대간산행을 걸으면서 그것은 언어의 유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절반이라면 안 되면 돌아가면 된다는 의미일 수도 있지만, 문득 되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왔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제는 포기도 되돌림도 안 된다. 탁부득이(託不得已), 어차피 걸어서 가야할 길이라면 몸으로라도 감당해야 한다. 몸이 시키는 대로 걸어가면 된다.


달빛이 베푼 여유도 잠깐, 춥고, 배고프고 다리는 아파오고...이럴 때 대원들에게 지금 가장 생각나는 것을 물으면 모두 ‘한잔’ 일 것이다.


‘따끈한 찌개에 소주한잔’, ‘시원한 맥주한잔‘ ’막걸리 한잔-‘


산 아래로 내려가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불빛은 가깝게 느껴지지만 길은 아직 멀었다. 몸이 지쳐있다는 반증이다.


 


‘백두대간 중간지점, 차갓재에 도착하다’


눈 길 산행 12시간 만에 드디어 백두대간 중간지점에 도착했다.


대간 종주를 놓고 보면 역사적인 순간 이다. 그러나 코끝이 찡해지는 감격이 왜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 너무 지쳐서 일까...... 모르겠다.


살아가면서 간절한 것은 멀리 있지 않다. 늘 곁에 있다. 곁에 두고 버릇처럼 멀리서 목마르게 찾고 있다. 지금도 목이 마르다. 그리고 아주 간절하게 생각나는 것은 그냥 ‘한 잔’ 뿐이다. (06. 12. 2 )


글/조관형


강민수 기자

강민수 (nu_kms@nun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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