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一日不作 一日不食
(지름티재 - 이화령(16.7km)

一日不作 一日不食
(지름티재 - 이화령(16.7km)
몽골 사람들에게 산 이름을 묻는 것은 큰 실례가 된다.
그들은 산 이름을 부르거나 손가락으로 산을 가리키지도 않는다. 고대 유대인들이 성서를 읽을 때 ‘야훼(Jahweh)’는 직접 소리 내어 읽지 않듯, 그들도 산을 경외 시 한 탓으로 산 이름조차 함부로 부르지 않았다.
심지어 산에 있는 돌이나 커다란 바위도 함부로 옮기지 않았다. 그 돌이 새 자리를 잡기까지 적어도 3년간은 자리 탓을 하기 때문이라 한다. 가히 몽골인들의 산에 대한 존경과 경외심은 상상을 초월하고도 남는다.
희양산(曦陽山)도 그와 같이 자신의 이름이 세상에 쉽게 알려지는 것을 꺼리는 산이다. 그 산 아래 자리한 봉암사(鳳岩寺 )는 석가탄신일을 제외하곤 언제나 문이 굳게 닫혀있어 일반인들의 접근이 통제된 절이다.
혹시 철없는 등산객들이 희양산 정상에 올라 큰 소리라도 지를까 싶어 1982년부터는 등산로를 폐쇄하기에 이르렀고 ‘절대출입금지’라는 팻말과 함께 출가한 스님들이 교대로 산 능선 길목을 굳게 지키기도 했던 산이다.
요즘도 스님들이 길목을 지키고 있지나 않을까.
노심초사(勞心焦思), 지름티재에 올라 주위를 살피니 스님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다 -’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굵은 나무 구멍 속으로 꼬릴 감추는 다람쥐처럼 잽싸게 희양산 북벽 아래로 몸을 붙이니, 거의 수직과도 같은 절벽이 앞을 가로 막는다. 로프는 끊어져 있지 않았다. 가끔 스님들이 로프를 절단해 놓기도 한다는 인터넷 기록이 있어 걱정했는데 다행스런 일이다.
절벽 같은 오르막을 올라서니 또 스님이 지키고 있던 길목이라 한다.
오솔길이 아니라 좌우 낭떠러지 된 외길이다. 정상으로 가기 위해선 피할 수 없는 길인데...그곳에도 스님은 없었고, 앉아있던 나무그루터기 흔적만 남아있다.
희양산은 거대한 흰 바위 하나로 이뤄진 산이다.
정상에서도 봉암사는 보이질 않는다. 몇 번이고 자리를 옮겨 살피니, ‘봉황 같은 바위산에 용 같은 계곡이 흐른다’하여 붙여진 봉암용곡(鳳岩龍谷) 끝자락에 몇 개의 점으로 남아있는 봉암사가 간신히 눈에 들어온다. 좀처럼 보기 힘든 절인 만큼 신비롭게 느껴졌다.
희양산 북쪽은 괴산 연풍이요, 남쪽은 문경 가은이다. 문경은 후백제 견훤의 출생지로 지금도 문경에 가선 함부로 견훤 욕을 하지 말라 한다.
속리산부터 대야산을 거쳐 용트림하던 산세가 우뚝 솟구쳐 올려놓은 거대한 흰 봉우리(岩峰)하나가 희양산(999m)이다.
명산대찰(名山大刹)이라 했던가.
신라 헌강왕5년, 큰스님을 잉태 할 태몽을 꾼 지증대사(智證大師)는 어느 날 심충(沈忠)이란 사람이 찾아와 희양산에 선찰(禪刹)을 세워 달라는 부탁으로 이곳에 절을 세우게 되었다.
지증대사는 갑옷 입은 무사가 말을 타고 나오는 희양산 산세를 보고 필경 ‘여기는 스님의 거처가 되지 않으면 도둑의 소굴이 될 것’임을 예언하기도 했다.
봉암사는 창건 때부터 환란이 극심해서 적어도 서 너 차례 성쇠(盛衰)를 거친 후 1955년이 되어서야, 지금의 대웅전 모습을 갖출 수 있었다. 그런 외적인 풍파로 봉암사엔 기념 될 만한 유물은 움직이기 힘든 것 들 뿐이다.
봉암사 입구 오른쪽 개울가에 놓여있는 야유암(夜遊岩)이나 관솔불을 밝히던 받침대 노주석(蘆柱石)과 지증대사 부도인 적조탑(寂照塔), 백운대 입구 마애불같이 도저히 훔쳐 갈 수없는 것들만 볼거리가 된 절이다.
‘어디 한번 밤을 놀아 볼까나 -’
야유암(夜遊岩)이라, 무슨 뜻으로 ‘밤에 노는 바위’라 했을까.
‘기한발도심(飢寒潑道心)’이라 가난해야 부처님 정신도 끈질기게 살아남는 법이라 했던가.
1947년 가을부터 2년 여 동안, 성철스님을 필두로 월산(月山), 자운(慈雲), 청담(靑潭), 보문, 우봉 스님 등 30여명의 스님들은 도성출입조차 할 수 없었던 조선 조 500년 억불정책으로 땅에 떨어진 불교정신과 일제 36년 동안 왜색으로 침체된 수행 자세를 떨쳐 버리자는 ‘봉암사 결사’를 단행했다.
‘사람이 땅에서 넘어진 자는(人因地而倒者), 땅으로 인해 일어서고(因地而起), 땅을 떠나서 일어나기를 구하는 것은(離地求起), 있을 수 없다(無有是處也).’ 결사란 이념을 같이 하는 스님들이 수행을 하면서 침체된 종단을 개혁하려는 자발적 실천운동이었다.
수행에 있어 정(定)과 혜(慧)를 같이 닦아야 한다는 취지로 고려 때(1188년) 보조지눌(普照知訥)선사의 주도하에 시작된 정혜결사(定慧結社) 선언문,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자‘는 참선 기풍을 일으켰으니, 이른바 ’봉암사 결사‘이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동안 먹지도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
그해 가을 스님들은 숨소리조차 뜨거웠음을 회고했다. 벌써 60년 전 일이 다. 그런 불교적 소명의식(召命意識)은 지금도 사월 초파일 외엔 절문을 열지 않았으며, 신라 하대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희양산파(稀陽山派)를 태동시켰으니, 희양산 봉암사는 1000년 선종(禪宗)가풍을 이어온 불교성지가 된 곳이다.
멀리 대간 길 능선 끝으로 이화령이 조망된다.
아득하게 보인다. 그곳까지 도상거리는 17km, 아침 일찍 은치마을을 출발했으나 좀처럼 오르기 힘들다는 희양산 정상에서 눈길을 빼앗기다보니 갈 길만 멀게 남는다. 그래도 오르기 힘들다는 희양산까지 올랐으니 다리에 힘이 절로 솟는다. 숨어서라도 오르고 싶었던 산이었는데... 이런 것도 등산의 묘미에 속할까. 산은 그렇게 의미를 찾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시루봉(915m)은 아랫길로 돌았고, 용바위를 지나 이만봉(989m)에 올라 갈 길을 서두르라 잊고 있던 허기(虛飢)를 달랬다. 나무 그늘아래는 벌써 서늘한 기운이 몰려있었다.
벌써 산은 가을이 찾아왔다. 이제 나무도 서서히 잎과 헤어질 준비를 하고 있다.
나무는 햇빛과 물이 부족한 겨울을 대비해서 털로 덥힌 겨울눈(冬芽)을 만들어 숨겨놓은 다음, 잎자루에 코르크처럼 단단한 ‘떨켜’라는 세포층을 만들어 물과 양분을 차단시키면, 이때 광합성 작용으로 생성된 당분은 줄기로 전달되지 못하고 잎에 쌓여 ‘안토시아닌(Anthocyanin)'이라는 물질이 생성되면서 잎은 붉은 색으로 변해 간다. 떨쳐내야 할 양분이 잎에 쌓인 모습이 단풍이요, 그 스트레스를 털어내느라 떨어져 쌓인 것이 낙엽이다.
나무의 입장에서 보면 아쉬운 이별이 아니라, 보낼 것을 제 때 떠나보내는 시원한 배설인 셈이다. 그건 아름다운 이별이다.
그 뿐이랴, 가을이 되면 이듬해 태어날 어린 나무들이 살아남기 위한 노력은 실로 놀라울 지경이다. 요즘처럼 과보호로 얼룩진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끔 하는 것이 나무가 맞이하는 가을의 모습이다.
‘떠나라 아주 멀리, 가능한 어미 곁에서 멀리 떠나거라.’
더 이상 어미 덕 볼 생각조차 하지 말고 떠나야 한다. 그렇게 어미 그늘로부터 멀리 떨어져야 이듬해 제대로 새싹을 티울 수 있다. 어미의 그늘을 벗어나려는 씨앗들의 투쟁은 눈물겹기까지 하다. 그들에게 있어 이별은 슬픔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수조건이기 때문이다.
한발자국이라도 멀리 떨어지기 위해 단풍이나 물푸레나무는 씨앗에 작은 날개를 달기도 하고, 도꼬마리처럼 사람들 옷이나 짐승 털에 붙는가 하면, 먹음직한 과육은 동물의 먹이가 됨으로 죽음과도 같은 이별여행을 떠난다.
그것도 아닌 작은 씨앗들은 눈에 띄기 쉽게 빨간색 열매를 맺고 새들에 먹힘으로 씨앗을 널리 퍼뜨린다. 단지 보기 좋으라고 붉은 열매가 열리는 것이 아니다. 곤충과는 달리 색을 구분할 줄 아는 새들에게 먹힘으로 더 멀리 씨앗을 퍼뜨리려는 식물들의 오래된 생존전략인 셈이다.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식물(植物)은 누구에게나 쉽게 먹히는 식물(食物)이 아니라, 오히려 먹거리(食物)를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오로지 식물만이 할 수 있는 햇빛을 이용한 광합성작용으로 생산된 양분은 초식동물들의 먹이가 되고, 다시 초식동물은 육식동물의 먹이가 되므로 생태계 먹이사슬의 기본이 되는 것이 식물군이다.
인간들의 가장 큰 잘못은 식물이 동물보다 열등하다는 착각이다.
숲의 진정한 지배자는 식물이다. 오염된 지구를 회복시킬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식물 밖에 없다. 그리고 식물은 가지에 열리는 열매의 량을 조절하는 ‘해걸이’(隔年結果. Biennial off-year)를 통해 결실로 균형이 깨진 영양 상태를 조정하고, 그 열매를 먹이로 삼는 동물의 개체 수까지 간접적으로 조절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찾아 온 계절은, 여름내 성장(成長 Growth)했던 줄기를 거센 바람과 혹독한 추위로 담금질을 시킨다. 이른바 성숙(成熟 Aiging )이다. 식물에게 있어 성숙은 고통으로 성장통을 겪는 인간의 모습과 같다.
이만봉을 떠나 2시간 여 만에 백화산(1,063m)에 도착했다.
이화령까지 잔여 산행거리는 약 5km, 지금 산행속도라면 777무명봉 근처에서 석양에 흩날리는 억새군락을 볼 수 있겠다 싶어 부지런하게 발품을 팔았으나, 나무만 보고 왔지 숲을 보지 못한 꼴이 되었다.
황학산(810m)을 올라 살펴보니 키가 커서 곧잘 눈에 띄던 대원이 보이질 않는다. 생존은 믿더라도 생사는 확인해야 했다. 다시 백화산까지 되돌아 올라가는 소동 끝에 대원은 두어 시간 후, 문경시 마성면 오시골에서 소재가 확인되었다.
‘ 아- 아니 아무 생각 없이 그냥 걷다보니 골짜기더라 -‘
명언 중 명언이다. 맞는 말이다. 그래 걷다보니 골짜기고, 살다보니 나이도 먹고 이렇게 살아지더라. 모두들 그렇게 한바탕 웃고 말았다.
길은 편안한 능선 길이었으나 서둔다 해도 이화령까지는 2시간은 족히 걸릴 것 같다.
그러나 일몰은 채 한 시간도 남지 않았다. 실종 대원 추적으로 시간을 놓친 탓으로 야간산행 준비를 해야 했다.
지는 해를 놓고 시간과 거리로 따져 봐도 남는 건 어둠과 걱정뿐이다.
이화령까진 아직 십 여리길, 십리절반 오리나무, 하늘 높이 키를 키운 낙엽송이며 신갈나무, 떡갈나무, 물푸레나무... 그래도 산에서 위로가 되는 것은 듬직한 나무들뿐이다.
먼 길을 떠날 때 짚신바닥에 잎을 깔았다는 신갈나무, 떡시루 밑에 잎을 놓았으니 떡갈나무, 선조임금이 의주로 피난 갔을 때 특히 좋아했다는 도토리묵은 상시로 수라상에 올랐다하여 상수리나무, 도토리 키 재기 졸참나무, 초록빛 열매를 짓이겨 물에 풀어놓으면 독성이 강해 고기가 떼로 죽었다는 때죽나무, 낙엽송은 침엽수임에도 가을이 되면 잎을 간다하여 잎갈나무, 소리 나는 대로 이깔나무로 불린다.
‘이깔 이깔 ...’ 성질도 된소리로 성깔, 성깔 한다.
그 이깔은 쉽게 바뀌어도 좀처럼 바꾸기 힘든 것을 성깔이라 했다.
‘성질은 본래 고질병인지라 고치기가 힘들다.’ 닥터 노먼 베쑨에 나오는 얘기다. 육종학적으로 보면 나무도 성깔이 있어야 쓸모 있는 나무가 된다는 것이 정설(定說)이다. 대간 종주도 다소 못된 ‘성깔’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입을 모으기도 한다.
어느새 키 큰 낙엽송 아래까지 어둠이 내려왔다.
후라쉬를 켜고 두리번거리며 길을 찾아야 했다. 못 찾겠다 꾀꼬리가 아니라 길 꼬리다. 다행이도 어둠속에서도 능선은 길잡이가 되어준다.
이화령까지는 부드럽고 아름다운 능선길이다. 문경새재 아래에 있는 길 중 가장 아름다운 산길이 아닌가 싶다. 길이 편하니 마음조차 편해지며 언젠가 다시 한 번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멀리 이화령을 넘어가는 불빛이다.
누군가 인생은 연기(演技)요, 삶은 무대(舞臺)라 했다.
신라시대 군사적 목적으로 개척된 최초의 고갯길, 하늘재를 넘어 한양으로 이어졌던 발길이, 조선 조 태종원년에 새재(鳥嶺)가 개척되었고, 1925년 일제 강점기 때 이화령(梨花嶺)에 신작로가 뚫리고 난 후, 500년 역사의 조령도 그 역할을 이화령으로 넘겨주었다.
그러나 이화령도 높았던지 1952년 확장공사를 거쳐, 2001년 중부내륙고속도로 이화령 터널이 개통되면서, 이제 이화령도 인적조차 끊긴 외로운 고개가 되고 말았다.
끝내 고갯마루는 길 위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길에도 흥망성쇠가 있고 본래부터 제 역할이 있다는 말은 지금도 유효하다.
이화령은 이제 연극무대에서 내려 온 늙은 배우처럼, 고갯길이라는 배역을 어둠 속으로 내려놓고, 더 이상 갈 곳 없는 몸짓으로 어둠속에 누워 쉬고 있었다.
‘고개도 저렇게 쉬어갈 때가 있는가 보다’.
그 고개를 자유롭게 넘나들던 길도, 세상 안으로 들어오면 구속(拘束)이 된다. 세상은 자유가 아니라 그 자체가 구속이기 때문이다.
‘잘 있게. 그리고 이제 편히 쉬게나. ’
무심코 이화령 고개를 향해 던진 말이다. (06. 10. 14일 )
강민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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