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빌어먹을 비러머글
밤티재 - 버리미기재 18.5km

빌어먹을 비러머글
(밤티재 - 버리미기재 18.5km)
이번 구간부터 길은 문경으로 접어든다.
‘경사스런 소식을 들을 수 있는 곳’이니, 문경(聞慶)이라 했다.
한양에서 새재(鳥嶺)를 넘어 첫 고을인 이곳에 오면 ‘경상도’ 소식을 들을 수 있다하여 문경(聞慶)이다. 고려 현종 때 지명 역시 기쁜 소식을 듣는다는 문희군(聞喜郡)이었던 것을 보면 문경은 오래된 고을이다.
그리고 한양 가는 길목인지라 방(榜)이 붙게 마련이니, ‘만사여의(萬事如意)좋을씨구-’ 호남이나 영남북부 유생들도 멀리 돌아갈지라도 ‘죽죽 미끄러지는‘ 죽령이나 ’추풍낙엽처럼 떨어지는‘ 추풍령보다는 ’기쁜 소식을 듣는‘ 문경새재를 넘고 싶어 했던 것이다.
밤티재에서 버리미기재까지 18.5km, 여름산행치고 가까운 거리는 아니다. 시작부터 가파른 오르막이다. 산이 가파르니 696봉우리까지는 1시간 이상 땀을 흘려야 하는 거리다.
산행도 길들임인가. 첫발을 떼어 놓는 순간, 몸은 그날 컨디션을 가늠하는 바로미터가 된다. 일상에서 쉴 동안의 삶이 숨소리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 숨소리는 평소 생활태도의 반증(反證)이며 산행당일 컨디션의 척도가 되곤 한다.
거친 숨고르기가 끝날 때쯤 696봉에 올라 속리산 북쪽 능선을 가늠해보았다. 그러나 조망은 앞 뒤 몇 사람만 보일뿐, 산은 안개에 갇히고 말았다.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와 괴산군 청천면 입석리로 이어지는 늘재 역시 안개속이다. 늘재에 도착하니 시골집 아침 먹을 시간이다. 문득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고향집 생각도 났다. 어머님은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실까.
고갯마루에는 늙은 엄나무 한그루가 서낭당을 지키고 있었다. 나이가 300살이라니, 서기(瑞氣)까지 느껴진다. 엄나무는 본래 짧고 억센 가시가 특징이다.
식물학적으로 가시가 있는 나무들은 줄기와 잎이 약용으로 쓰이거나 맛이 좋아 초식동물이 즐겨먹는 나무다. 나무 입장에서 보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가시가 필요했을 것이다.
화살나무는 여린줄기를 화살촉 모양으로 바꾸었으며, 아카시아는 크고 억센 가시로 무장을 했다. 그러나 줄기가 굵어지고 키가 커지면서 그런 위험으로부터 벗어난 엄나무는 가시 크기를 줄이고 털어내어 한결 부드러워졌다.
엄나무(嚴木)는 우리나라 자생나무 중, 가시가 가장 억세고 험상궂게 생긴 바람에 잡귀를 쫓아내는 당산목(堂山木)으로 그 위세를 떨쳐온 나무다.
늘재에서 아침 안개에 잠겨있는 모습은 단단히 무장을 한 장수를 연상케 한다. 오래 살다보니 재질도 단단해지고, 촘촘해서 비오는 날엔 물기까지 쉽게 스며들지 못했으니, 죽어서는 청렴한 선비들의 상징인 나막신이 되었던 나무다.
‘한손에 가시 들고 또 한 손에 막대 들고 / 늙는 길 가시로 막고 오는 백발 막대로 치려드니 / 백발이 제 먼저 알고 지름길로 오더라.’
고려 말 단양팔경의 명승지, 사인암에 머물렀던 문신 우탁(禹倬)선생의 탄로가(嘆老歌)이다. 귀신조차 벌벌 떨게 했던 엄나무도 세월만큼은 막지 못했는지, 지름길로 먼저 달려 온 세월이 잠들어 있는 시골풍경이다.
오래된 풍경은 언제나 아늑하고 아름답다.
길은 다시 청화산을 오르라 한다.
새벽일을 한 농부처럼 힘이 빠지니 걸음걸이가 더없이 무거워진다.
산행에 있어 몸이 느끼는 고통은 등산과 하산의 경계가 따로 없다. 오름은 오름대로, 하산은 하산대로 힘들긴 마찬가지, 굳이 구분하자면 산행 전 일주일간의 생활태도가 산행 당일의 컨디션을 좌우한다는 점이다.
마음속 병은 반드시 몸의 질병으로 이어진다는 심신의학(psychomatics)이론을 빌리지 않더라도, 지난주는 주초부터 회사일로 시달렸으니 몸은 출발 전부터 거의 녹초가 된 상태였다.
요즘처럼 과중한 업무의 스트레스와 계속되는 폭음으로 시달리다보면 산행은 시작부터 고역(苦役)이다. 산행은 어디까지나 고행(苦行)이어야 한다. 그리고 홀로라는 생각이라야 걸음도 가볍고, 느낌도 좋다. 요즘 들어 산도 내 몸 상태를 눈치 챈 것일까. 이젠 산이 두려워지기도 한다.
특히 하산이 등산보다 더 힘든 이유를 나이 탓으로 돌리지만, 등산은 근육이 긴장된 상태에서 오르는 관계로 민감하게 느끼지 못하지만, 하산은 근육이 풀린 상태에서 같은 무게를 지탱해야 하니 같은 무게라도 더 힘들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때문에 산의 높고 낮음을 떠나 대형 등산사고의 대부분은 하산 코스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본래 쉬운 산이란 없다. 굳이 난이도를 구분한다면, 산행에서 오래 참고 견디는 버릇이 몸에 습득된 체험일 뿐이다. 살아가는 일, 역시 그런 것 아닌가 싶다. 그러니 안달복달하지 말라한다. 산도, 삶도 그 과정은 습(習)이다.
청화산(靑華山, 984m) 정상이다.
청화산도 안개에 갇혀있다. 보이지 않으니 마음까지 감옥(監獄)이 된다. 그렇게 자신을 산속에 가두는 것이 여름 산행이다.
영조 때 실학자 이중환은 청화산을 좋아한 나머지 자신의 호까지 청화산인(靑華山人)이라 짓고, 이곳 청화산을 아끼고 사랑했다.
그는 1725년 신임사화에 연루되어 4차례에 걸친 구금과 유배를 끝으로 세상과 등진 후, 삼십 여년을 사람이 살만한 곳, 가거지(可居地)를 찾아 떠돌아 다녔다.
병화(兵禍)와 질병, 재앙(災殃)이 없는 곳, 그런 이상향을 찾아다니며 택리지를 저술했다. 그는 택리지에서 언급한 가거지(可居地)중 최고의 복지(福地)로 청화산을 지목했다.
그리고 청화산 동쪽 시루봉(876m)과 남쪽 도장산(828m)을 감싸 안고 속리산 연봉으로 이어져, 청화산까지 마치 활시위를 당긴 모습이 ‘소의 뱃구레’와도 같은 우복동(牛腹洞)을 최고의 승지(勝地)로 꼽았으니 지금의 화북면 용유리 일대이다.
청화산에는 연꽃같은 산봉우리 한 복판, 연심(蓮心)에 해당하는 모란형(牡丹形) 명당에 원적암(圓寂庵)이 있으나, 그마져 안개에 갇히고 말았다.
청화산에 올랐으나 청화산을 본 사람은 없다. ‘흙으로 된 봉우리에 둘린 돌은 밝고 깨끗하여 살기(殺氣)가 적다’, 擇里志의 기록일 뿐, 볼 수가 없다.
산길은 안개에 갇히고, 시그널을 따라 방향을 확인하며 길 찾기를 몇 번, 조항산(951m)까지는 다소 험한 암릉 구간인데... 조망이 전혀 안 되니 종잡을 수 없다.
대간꾼들이 달아놓은 시그널이 오히려 길을 헷갈리게 했다. 시그널은 산 꾼들의 언어다. 그러나 시그널도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있다.
다행이 갓바위재(769m)를 통과하면서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문경의 옛 지명중 문경엔 신(申)씨와 호랑이가 많이 살고 있어 신석호(申石虎)‘라 불린 적이 있다. 그 후 신씨와 호랑이가 없어지니 문경엔 돌(石)만 남아 문경 산에는 바위가 많아졌단다. 실제로 문경을 경유하는 대간 구간은 약 110km,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암릉으로 이어져 있다.
조항산에서 고모치까지 1,2km, 암릉은 안개에 젖어 미끄럽기 그지없다. 몸은 안개비에 젖어 지친 상태에 허기까지... 길은 다시 오르라 한다. 이번엔 거대한 수직암벽이다. 바라만 봐도 현기증이 일어난다.
마귀할멈 통시바위라 한다. 마귀는 볼 일을 볼 때도 이렇게 험한 곳에서 봐야 마귀가 되는가 보다.
‘대장 통시간이 먼가여-‘.
‘아 - 그거 경상도 말로 뒷간이라고 알란가-’
거대한 바위산이 해우소(解優所)가 되었으니, 산은 가장 크고 융숭 깊은 해우소가 되었는가. 몸은 하나 밖에 없는 도량(道場)임에도 산행대장 입에선 망우초(忘憂草)가 끊일 날이 없는 애연가다.
대야산은 수도하는 자가 살만한 곳이라 했다 산행 출발 10시간 만에 대야산 아래 밀재에 도착했다.
청천면 삼송리에서 가은읍 다래골로 이어지는 고갯마루이다. 밀재는 짙은 그늘을 내주며 쉬어가라 한다. 여름도 깊이 익을 대로 익었다.
봄(春)은 땅속에 묻혀있던(屯) 새싹이 따뜻한 햇살(日)에 돋아 올라오는 모양이니, 봄(春)은 볼 것(見)이 많아 ‘봄’이 되었고, 그 햇살에 열매가 ‘열음’이니 ‘여름’이라 했다. 열매가 익었다 함은 나무 그늘도 제대로 깊어졌음이리라. 그늘이 깊어졌으니 역설적으로 여름 숲은 그림자를 남기지 않는다.
옛 선비들은 그림을 그릴 때 그림자(像)를 그리지 않았다.
자칫 허상(虛像)에 빠질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여름 숲은 그늘조차 무겁게 느껴진다. 금방이라도 초록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다. 길 위로 널려있는 나무 그늘조차 무게로 느껴지는 것이 여름산행이다. 그러나 그늘을 밟고 가는 발걸음은 더없이 상쾌하기만 하다.
대야산(931m, 大冶山, 大耶山) 정상에 올랐다.
한 때 큰 홍수로 인근마을은 모두 물에 잠기고 남아있던 산꼭대기 모습이 대야처럼 생겼다하여 붙여진 지명이라 지만 멀리서 보면 날카로운 모습이다.
그보다 대야산 동, 서쪽으로 신선이 놀았다는 선유동(仙遊洞) 계곡이 있으니, 선유산(仙遊山)이 더 어울릴 텐데... 대동지지, 대동여지도엔 왜 大冶山, 大耶山, 大野山으로 했을까. 모를 일이다.
대야산 서쪽 계곡인 괴산 선유동은 퇴계 이황선생께서 친척집에 놀러왔다가, 그 절경에 반해 9개월이나 머물면서 구곡(九曲)마다 이름을 지어 준 곳이다.
‘山水는 天地間의 무정한 사물이니 반드시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야 드러나게 되는 법이다’ 조선 중기 선비 소세양(蘇世讓)의 말처럼, 선유동은 퇴계를 만나 이름을 얻었다.
신라의 대문장가 최치원도 이곳 절경을 기억하고 싶었던지, 유려한 필치로 선유동(仙遊洞)이라는 글씨를 바위에 남겨 놓았으며, 조선왕조실록에 무려 3천 번이나 이름이 거명되었고, 숙종이 내린 사약을 세 번이나 들이킨 후에야 숨을 거두었다는 일화로도 기개가 센 선비였다.
거유(巨儒)우암 송시열은 도저히 집을 짓고 살만한 터가 될 수없는, 화양동 금사담(金沙潭) 계곡에 결기(結氣)가 흐르는 암서재(巖棲齎)를 짓고, 노후를 의탁하기도 했다. 결국 그 집에 그 사람이 되었다.
우암의 나이 60세가 되던 해인 1666년도 일이다. 퇴계와 우암이 머물렀던 계곡이라는 것, 하나로도 고개가 끄떡여지는 명승이 된 곳이다.
정상에서 동쪽 계곡 문경 선유동(仙遊洞)은 서쪽 선유동과는 또 다른 계곡미를 자랑하는 월영대, 용추계곡, 용소 등 선경이 숨어있는 명승지다. 그리고 대야산 북쪽 하산 길은 점봉산 암릉, 속리산 북릉과 더불어 대간 길 중 몇 안 되는 험로, 100여 미터나 되는 수직 벽과도 같은 낭떠러지다.
팔 하나가 불편한 대원을 사이에 배치하고, 로프에 매달려 미끄러지듯 간신히 내려오니 촛대봉(668m)이다.
긴장 탓인지 얼굴가득 땀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사지가 멀쩡한 사람도 온 몸이 덜덜 떨리기 마련인데 팔을 하나 잃어버린 대원의 불편함은 상상만하기로 했다. 촛대봉에 올라서니 대야산이 한눈으로 조망되었다.
석양에 갇힌 탓인가, 서기(瑞氣)가 느껴지는 장엄한 모습이다. 산에서도 가끔 그렇게 바라보고 싶어지는 산이 있는가보다.
‘이 산은 수도하는 자가 살만한 곳이라’(欲修道者可於此山)
택리지의 기록이다. 이중환도 그런 상서로운 기운을 느꼈을까.
날씨는 더웠다. 가뜩이나 땀을 흘린 상태에서 석양까지 겹치니 그늘조차 뜨겁게 덥혀졌는가. 몸은 지치고 더위는 숨을 턱턱 막아서고 땀은 주체하기도 힘들게 흘러내린다. 더구나 바람조차 없으니, 실로 대단한 더위다.
‘없는 사람 살기는 겨울보다 여름이 났다고 하지만, 교도소의 우리는 없이 살지언정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 옆 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기는 겨울철과는 달리 여름 징역은 바로 그 체온 때문에 사람을 증오하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통혁당 사건으로 20년간 옥살이를 했던 신영복 교수는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까지 미워하게 되는 여름 더위를 그토록 싫어했음을 고백했다. 오늘은 그런 더위가 온몸으로 느껴지는 날이다.
촛대봉에서 오른쪽 능선으로는 문경 쪽 용추계곡으로 곧장 내려설 수 있다.
그러나 대간길은 불란치재를 내려 선 다음 그 생김새가 특이해서 곧잘 사진으로 더 잘 알려진 미륵바위를 지나 곰넘이봉을 넘으면 버리미기재에 닿는다. 평생을 조각보만한 땅뙈기에 의지해 가난을 ‘빌어 먹이다’가 아예 지명으로 굳어진 고개이다. 더위 탓인가, 생각보다 힘든 코스가 되었다.
‘제기랄 빌어먹을, 비러머글 ...’
내 고향 충청도에선 하던 일이 잘 안되면 혼잣말로 ‘빌어먹을 놈’ 한다.
‘ 빌어먹을 - 비러머글 놈의 대간산행-’
그래 어차피 빌어 먹일 삶이라면 고난을 등짐처럼 짊어지고 가야 하는 산행을 통해서라도 제대로 빌어먹어보자는 생각이다. 그럼에도 종일 더위에 시달린 몸에선 욕부터 나온다.
빌어먹을. 에이 비러머글 백두대간 종주 - ( 06. 8. 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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