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산은 속세를 떠나지 않았건만

산은 속세를 떠나지 않았건만
(비재 - 밤티재 17.4km)
비재라, 고개 이름치고는 예쁜 지명이다.
날아가는 새를 닮아 비조령(飛鳥嶺)이라 했던가. 예로부터 새처럼 날아갈 수 있음은 자유를 뜻했다. 새는 본래 집이 없다. 저 넓은 허공이 집이다. 높이 그리고 멀리 날기 위해 뼈 속까지 비워야 했던 새는, 땅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인간들에 있어선 늘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죽으면 그 영혼이 새가 된다고 믿는 민족도 있다.
뜸 뜸 뜨음 - 뜸
발자국소리에 놀란 뜸북이 한 쌍이 빨간 줄 머리띠를 숨기며 이내 논두렁을 타고 사라진다. 뜸북 뜸북이 아니고 분명히 뜸 뜸 외자로 울었다.
우리나라에선 이미 멸종 된 것으로 알려져, 몇 해 전 중국에서 한 쌍을 기증까지 받았다는 희귀종인데, 이곳에 살아있다니...어릴 적에도 뜸 뜸 소리로만 들었지 시골출신인 나도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새였다.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실 때...’
소풍가는 애들처럼 노래가 저절로 터져 나온다.
산행은 시작부터 된비알이다.
비재에서 천왕봉(1,058m)까지는 약11km, 6시간 이상 소요 되는 거리다.
비재가 해발 320m이니 대간길은 갈령(721m)과 형제봉(832m)까지는 무려 500여 미터나 높였다가, 피앗재에서 다시 580m까지 낮춘 후, 천왕봉은 1천 미터로 솟구치니 태백과 소백을 줄달음쳐 온 대간이 크게 한번 몸을 일으켜 호령하는 산세를 이루는 구간이다.
후백제 견훤이 목욕하고 힘을 얻었다는 못 제까지는 십 여리길, 신기하게도 산 능선의 겹침 현상이 기묘하여 물이 갇히는 지형, 못제(提)이지 재(峙)가 아니다. 상주 땅 대궐터에서 군사를 일으킨 견훤의 힘이 막강해지니, 보은 삼년산성에 근거지를 둔 호족출신 황충이 소금 300석을 못제에 풀어 견훤의 힘을 뺐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곳이다.
출발한지 3시간여 만에 형제봉에 올랐다. 조망을 살펴보니 천왕봉을 기점으로 멀리 연봉 끝자락인 문장대까지 비로봉, 문수봉, 입석대, 신선대등 8개 봉우리와 8대(臺), 그리고 천왕석문, 비로석문, 금강석문 8개 석문등 수려한 산세와 오밀조밀한 암릉으로 천왕봉에서 문장대까지 24경을 품고 있는 속리산 연봉이 한 눈에 조망된다.
과연 시인묵객들이 올라 감탄을 자아냈던 절경으로 조선팔경(朝鮮八景) 중 하나로 선택 받은 산이 되었으리라.
그러나 천하절경도 눈길 하나 위로하지는 못하는 것이 여름산행이다. 폭염으로 속절없이 쏟아져 내리는 땀방울 때문이다. 소금기가 섞인 땀은 눈조차 뜨기 힘들게 한다. 산도 목이 타는지 길목마다 지열을 훅훅 내뿜는다.
산은 세속을 떠나지 않건만...
숨이 턱턱 막히니 목이 마르다. 여름산행은 물과의 싸움이다. 흘러내리는 것은 땀이요, 지금 무겁게 짊어진 등짐도 절반이상은 물이다. 갈증에 있어 물은 엄청난 유혹이다.
탁족(濯足), 세족(洗足), 등목(沐浴)으론 어림도 없다.
은나라 현자(賢者) 무광(務光)은 탕왕이 왕위를 물려준다고 하자, 돌을 지고 물속으로 몸을 던지고 말았다. 우리도 물이 있다면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풍덩 뛰어들고 싶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 배낭 속에 들어있는 물처럼, 가장 무겁고 힘든 것이 삶(산행)을 지탱하게 하는 ‘힘’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런 ‘등짐‘이 나를 살릴 수 있는 ‘힘‘이 되고 있음을 무광(無光)은 알았을까?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런 깨달음은 언제나 뒤늦게 온다. 마치 그런 어리석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천왕봉 좌측 계곡, 은폭동에서 곧장 올라오는 코스와 만나는 곳에서 잠시 배낭을 나무 등걸에 걸치고 쉬었다. 계곡 아래서 치고 올라오는 상쾌한 골바람이 얼굴을 반긴다. 바람하나 불었을 뿐인데 흘러내린 땀방울은 순간 짜릿한 기쁨으로 변한다. 쉽게 얻은 달콤한 기쁨과 이렇게 고통을 견뎌낸 기쁨을 굳이 비교하라면 무게중심은 어느 쪽으로 기울까.
오늘 산행을 위해 출발 한 것은 새벽2시, 무려 7시간 만에 천왕봉(1,057m)에 올랐다. 천왕봉 정상은 이름만큼 너그럽지가 않다.
발 딛을 공간조차 협소한 바위는 한 여름 뙤약볕에 후끈 달구어져 있다. 관목뿐인 정상은 나무그늘도 벌써 도망가고 땡볕이다. 대원들 얼굴도 빨갛게 익은 모습이다.
살아가면서 소중한 것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결코 쉽게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흘린 땀이 너무 많았다는 생각이다. 그것이 산행이다.
쉬울 것 같으면서도 결코 쉽게 허락하지 않는 길, 그래서 하늘에 가까이 있다하여 천왕봉이라 했을까.
(대동여 지도 속리산 구간)
조선총독부 치하에서 작성된 국토지리원 표기는 천황봉(天皇峰)이다. 그러나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유형원의 동국여지지, 김정호의 대동여지지 기록에는 모두 천왕봉(天王峰)으로 표기 되어있다. 천황봉으로 된 것은 일제의 불순한 의도가 숨어있음이 분명하니, 이쯤에서 다시 찾아야 할 지명이다.
천왕봉은 삼파수(三派水)가 흐르는 봉우리다.
한강과 낙동강, 금강의 분수계로 동쪽으로 흐른 물은 낙동강으로, 서쪽은 법주사 경내를 거쳐 달천(達川)에서 한강으로, 남쪽은 보은 땅을 적시고 금강으로 흘러드니, 이른바 삼파수(分爲三派水)가 된다.
풍수지리상으로 보면 진안 마이산과 더불어 삼태극(三太極)의 정점으로, 화북면 7개 마을은 신선들이 살만한 이상향이 되었고, 우복동(牛腹洞)이라 불리는 승지(勝地)는 화북면 용유리로, 속리산 서북쪽이 십승지로 택함을 받은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천왕봉은 백두대간에서 갈라지는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頂脈) 분기점이다. 세조가 말을 타고 넘었다는 말티고개와 상당산성 동쪽의 선도산, 북쪽의 보현산을 지나 안성 칠현산을 통해 강화 문수산으로 연결되는 한남정맥(漢南頂脈)과 천안에서 홍성을 거쳐 태안반도로 지세를 키워간 금북정맥(錦北頂脈)까지, 남한의 중심에서 세 개의 정맥을 거느린 십이종산(十二宗山)으로 꼽혔다. 그러나 속리산의 옛 이름은 8개의 봉우리에 문장대까지 합쳐 구봉산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 이름 때문였을까.
속리산은 속세(俗)를 멀리(離)한 산(山)이다. 그러나 산은 속세를 떠날 수는 없는 법, 그 법이 안주 할 수 있게 세속을 떠나있는 절이다. 그 업보(業報)를 떨치지 못하고 산을 멀리한 인간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산이라 함이 옳으리라.
역성혁명을 꿈꾸며 백일기도를 올렸던 태조의 기도는 물론, 혈육까지 참수하며 왕위에 올랐던 태종의 참회며, 어린 단종을 죽음으로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의 욕심까지 받아 주었던 산이다. 그런 속세의 헛된 욕망을 벗어나려 했던 산인지라, 예로부터 숱한 풍류가객은 물론 세상을 등진 선비들이 찾아 들기도 했다.
신라의 대문장가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도 헌강왕12년(서기886년) 이곳의 산수가 속세와 인연을 멀리한 동천복지(洞天福地)임을 깨닫고, 도는 사람을 멀리 하지 않건만(道不遠人), 사람이 도를 멀리한다(人遠道)는 중용의 도를 인용한 시 한편을 남기기도 했다.
‘道는 사람을 멀리 하지 않건만 사람은 道를 멀리하고
山은 世俗을 떠나지 않건만 사람이 山을 떠나는 도다‘
(道不遠人人遠道, 山非離俗俗離山)
장자도 포정해우(苞丁解牛)고사에서 포정이라는 백정은 칼 하나로 19년 동안 수천마리의 소를 잡아도 날카롭기가 처음과 같았다하니, 실로 몰아의 경지에서 기(技)로써 도(道)를 깨우쳤음을 얘기했다.
도(道)는 사물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니(道不離物)
사물을 떠나서는 도(道)가 아니다 (離物非道)
고운(孤雲)이 노래한 도불원인(道不遠人)과 포정이 깨우친 도불이물(道不離物)은 중용의 차운과 장자의 해석을 놓고 보아도, 사람이나 사물을 멀리해서는 궁극의 도를 이룰 수 없음을 얘기했다.
이는 세속을 멀리해서는 도(道)를 이룰 수 없음이니, 산은 속세를 떠나지 않건만 도를 떠나려는 인간들에게 둔세(遁世)도, 둔천(遁天)도 아니 됨을 시(詩)로써 깨우쳐주고 있는 것이리라.
시(詩)란 절(寺)에 깃든 말(言)이니, 침묵의 다름 아닌가.
그 무언(無言)의 불법(法)이 머무는(住)절, 법주사(法住寺)를 품에 안고 있는 산, 이름조차 아깝지 않는 산이다. 속세(俗世)를 떠난 산, 속리산(俗離山), 그러나 끝내 ‘세속을 떠나지 못한 산’이다.
멀리 능선 끝자락 문장대까지는 4km, 십 여 리길이다.
천왕석문과 비로봉, 임경업장군이 7년간이나 수련했다는 입석대를 지나 햇살이 기울기 시작한 즈음 지친 몸으로 신선대에 도착했다.
산행에서 몸이 지쳤다 하면 몸은 땀으로 호소한다. 땀은 몸이 내뿜는 숨소리다. 땀이 증발하면서 그 흔적은 소금기로 남는다.
오늘은 모자위에 파도를 그렸다. 이른바 ‘소금그림’이다. 땀으로 지워졌던 소금기는 옷이 마르면 다시 그림으로 살아난다. 땀은 햇볕을 받아 소금이 되고, 그 흔적은 그림이 되고, 그림은 다시 땀으로 지워지는 과정의 반복이 여름산행이다.
소금은 빛처럼 사라지지 않고 흔적으로 남는다. 빛이 변하지 않는 것처럼 소금그림도 그대로 남는다. 그래서 빛과 소금이 되라는 성서의 말씀은 언제나 유효하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소금그림을 ‘훈장’ 쯤으로 여긴다. 모자에도 어깨도 심지어는 배낭에도 훈장을 달고 다니길 좋아한다. 산행이 끝나면 그 훈장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짓는 사람이 진정 ‘산 꾼’이다.
청법대를 지나 조선팔경으로 널리 알려진 문장대에 도착했다.
누구든 세 번만 오르면 죽어서 극락을 갈 수 있다는 선경(仙境)으로, 늘 신비로운 구름 속에 쌓여있다 하여, 옛 이름은 운장대(雲藏臺)다.
더위는 길목마다 우릴 기다리며 발길을 서성이게 만들었다
예로부터 문장대(1,054m)는 시인 묵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명소로 뜻있는 선비들은 그 생김새가 기묘하여 문필봉(文筆峰)으로 예우를 했던 곳이다. 훗날 종실과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복천암에 들렸던 세조가 신하들과 이곳에 올라와서 천하의 질서를 얘기한 삼강오륜을 읽었다 하여 문장대(文藏臺)로 바뀌었다는 전설이 서려있는 곳이다.
필자가 젊었을 때 ‘이래 봐도 속리산 천왕봉 정기를 받아 태어났다’며 곧잘 고향자랑을 하곤 했다.
태어난 곳이 한남 금북정맥 천왕봉기점 45km에 있는 선도산(575m) 아래였으니, 가끔 술 한잔하면 헛소리를 한 적도 있다.
그런 탓으로 초등학교 졸업여행은 언제나 속리산 법주사와 천왕봉 문장대가 되었다. 그 때 보았던 문장대 정상 녹슨 쇠말뚝은 뵈질 않는다. 물론 민족의 혈을 끊겠다며 문장대에 일제가 박아놓았던 쇠말뚝의 의미를 알 턱이 없는 나이었다. 누가, 왜? 어린 마음에 문장대위에 박혀있던 쇠말뚝은 신기하게 보이기도 했다.
일제는 이 땅의 명산 360여 개소에 쇠말뚝을 박은 다음, 산 이름 끝자리도 일본 천황을 의미하는 황(皇)이나 왕(旺)으로 바꾸고 민족의 정기까지 끊으려 했다. 생각 할수록 황당하고 괘씸한 일이다.
곧바로 남쪽으로 내려서면 소리가 문자로 되는, 한글창제 비밀을 터득한 신미(信眉)대사가 머물렀었다는 복천암 가는 길이요, 대간 길 북쪽 코스는 대야산 북릉과 점봉산 암릉과 더불어 대간 길 중 험로로 알려진 문장대 북릉으로, 출입이 통제된 구간이다.
시작부터 로프에 매달리며, 배낭을 벗고 몸을 구겨 넣듯 빠져나오길 몇 번, 전망 좋은 입석바위에 앉아 땀을 식히니, 멀리 청화산도 조망된다.
석양은 속리산 서부능선 위로 붉은 기운을 토해내고 있었다.
누군가 심신이 극도로 지쳐있을 때 바라 본 풍경이 오히려 절경이 된다 했던가. 석양이 깃든 풍경을 바라보는 것으로 잠시 쉼을 얻는다. 지는 해는 욕심이 없어 아름답다 했던가, 대원들 표정이 편하게 보인다.
시간만 허락된다면 속리산 북릉으로 넘어가는 석양을 좀 더 즐기고 싶은 표정들이다. 선조 때 학자 송익필도 ‘산길을 가다보면 쉬는 것을 잊고 쉬다보면 갈 줄을 모르는데 (山行忘坐坐忘行)...’ 눈과 귀에 느껴지는 오감도 잊고, 어느 경전에도 매달리지 않으며, 그 어느 곳에도 눈길을 주지 않는 좌망(坐忘)에 라도 들고 싶었던 것일까.
그러나 일어나야 한다. 돌아갈 길이 너무 멀다.
잠시 풀어 놓았던 생각을 짊어지고, 밤티재를 내려서니 길 위엔 벌써 어둠이 먼저 내려와 있었다. 곧장 고갤 넘어서면 화양동 계곡으로 유명한 괴산군 청천면이다.
몸이 너무 무겁다. 생각 같으면 그냥 길바닥에 눕고 싶을 뿐...산이 떠나도 좋고, 사람이 떠나도 좋다. 그것이 도(道)가 되었던, 속(俗)이 되었던 사람의 일이 아니었던가. 몸이 힘들어 지면 우리 같은 속인(俗人)들은 오로지 쉴 곳부터 찾는다. 몸은 잠시 한눈만 팔아도 게으름을 탐한다.
사람들은 늘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원초적인 속성을 지니고 태어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 이유로 사람들은 길 떠나길 즐겨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은 언제나 산이었다. 그러나 산은 끝내 세속을 떠나지 못했다.
속리산, 어찌 보면 오래전부터 조선팔경으로 알려진 산세보다, 그 이름이 더 아름다운 산이다. 한 곳에 머물지 못하고 떠도는 인간의 본성을 은유적으로 표현하여 이름을 얻은 산이다.
몸은 비록 세속에 찌들고, 거친 땅 위를 힘겹게 살아가고 있더라도, 사물을 떠나면 도가 아니고(道不離物), 산 또한 세속을 떠나지 않았으니(山非離俗), 그 이름 하나로도 속진(俗塵)을 훌훌 털고, ‘세속을 떠난 산’이 되었다.
세속을 떠나지 않았어도, 깊은 산 속에 있을 것 같은 산, 또 누구든지 속세를 떠나게 한다는 산, 그래서 俗離山이다. (06. 6. 17일 )
저작권자 ⓒ 뉴스울산(nunnews.kr) 무단복제-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