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산길은 술에 취해있는 길

산길은 술에 취해있는 길
(지기재 - 비재 23.9km)
이번 산행은 봄빛이 완연한 지기재 고갯마루가 시점이다.
작점고개에서부터 큰재, 개머리재, 지기재, 신의터재, 화령재까지 고갯마루마다 대간길이 분수령(分水嶺)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옥외 광고탑처럼 서 있다. 비록 낯선 풍경이었지만 특이 했다. 이런 시골구석에 분수령이라는 뜻을 알고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싶지만 그래도 보기 좋은 풍경이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른다. 지기재 동쪽으로 흐른 물은 대덕산에서 발원한 감천을 따라 낙동강으로, 그리고 서쪽 영동으로 흘러간 물은 금강에 몸을 섞으니, 서해바다가 된다.
시작은 한곳이나 헤어짐은 천리 먼 길, 산에서 분수령은 마치 운명과도 같은 곳이다. 한번 헤어지면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길이다.
엊저녁 내린 비로 산은 온통 초록빛 싱싱함이 살아 오르는 느낌이다.
절기(節期)로 보면 봄비(春雨)요, 생명수가 된다. 땅이 젖은 상태를 보면 이슬비(細雨)요, 내린 시각으론 밤비(夜雨)고, 시기로 보면 단비(甘雨)가 되며, 푸르름과 싱그러운 빛을 전해주고 있으니 자애로운 비(慈雨)가 되어 준다. 곧잘 시끌벅적해지기 쉬운 산행 길에서 소리까지 잡아준다. 그 쯤 되면 길도 길다워지고 마음까지 차분 해진다.
덕분에 산행속도가 걷잡을 수없이 빨라졌다. 대간산행에선 절대로 속도의 유혹에 빠지지 말라 했다. 그러나 신의터재와 이름이 예쁜 무지개산 갈림길을 지나 윤지미산까지 도상거리 13km를 4시간 만에 주파하는 속도감을 즐겼다. 잠시 한 눈만 팔아도 선두는 꼬리를 감춘다.
‘왜들 그렇게 빨리 가는 거지 무슨 상(賞)주나 -’
같은 길임에도 후미 대원들은 숨 고르기 조차 힘겨운 눈치들이다.
오늘 산행의 높낮이는 200에서 500미터 사이, 그리고 높아야 745m로 만약 오선지에 음계로 표시한다면 ‘미미 레레 미미도 솔도-’ 한결같이 낮은 음자리들이다. 미미도 솔도- 그래서 바람도 솔솔 경쾌하게 불어오는가.
게다가 우후답산(雨後踏山)이라, 발걸음조차 가볍다.
이렇게 이른 아침 잠자는 새들은 어떻게 깨어날까. 혹시 누가 돌아다니며 깨우기라도 하는 것일까?
갑자기 엉뚱한 질문에 궁금해졌다. 앉아있는 나뭇가지의 여린 떨림이 잠든 새들의 아침을 깨운다면, 혹시 우리 발걸음은 산을 깨우고 있지나 않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산들바람은 나무를 깨우고, 나무는 가지에 앉은 새를, 그리고 새는 훨훨 저 높은 하늘을 깨우고, 하늘은 사람을 아우르니, 고대 인도불교 설화에 나오는 ‘인드라의 그물(Indra’s Net)’처럼, 나를 둘러싼 우주만물 은 나와 더불어 하나의 유기체임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거대한 우주와 내가 한 몸이라-’
잠시 유쾌한 상상으로 발걸음조차 가벼워진다.
초록빛 번짐은 봄이 된다
백두대간은 오래 전부터 국경선이 되어왔다.
물론 산이란 높다고 행세를 하고 낮다고 굽히지는 않는다. 다만 있는 자리를 지킬 뿐이다.
한 때 치열했던 전쟁의 증거로 백두대간을 경계로 국경이 되었던, 역사적 사실이 이곳에서 속리산 앞 국수봉까지 여섯 마을은, 산이 낮은 탓에 국경선이 수차례 뒤바뀌는 시련을 당한 마을들이다.
고구려에서 백제를 거쳐 신라에서 고려로 지금은 경상도 땅이다. 그러나 대간을 놓고 구분한다면 충청도 땅이라야 산이 사람을 품어주는 삶이 된다.
그들의 고달픈 흔적으로 임진왜란 때 최초로 왜군을 격퇴시켰다는 의병장 김준신(金俊臣) 전적비가 신의터재 유적비(遺蹟碑)로 남아있고, 가까이 6,25 동란 시 칠곡 다부동 전투와 함께 아군의 낙동강 방어선 구축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화령전투 승전 전적비(戰績碑)까지 세워졌으니, 그 땅위에 살았던 백성들의 삶은 그만큼 고달팠으리라.
산도 그늘이 깊지 못하면 사람을 품어주지 못하는 이치와 같다.
윤지미산 정상 나무 그늘아래 앉아 중식을 했다. 구간 목적지 비재까지는 약12km, 아직도 사십 여 리길이다.
서두른 탓인지 다소 지친 모습들이다. 바람이 달다는 표현을 해도 될까. 돌아보면 고작 한 달사이인데 짙어진 녹음으로 조망이 전혀 안 된다. 보이질 않으니 조급증이 심해진 탓인가, 산행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느낌이다. 숨이 턱턱 막혀온다.
왜 그토록 허겁지겁 도망치다시피 산행을 서둘렀는가.
산길은 곡선이다. 곡선은 자연이 만든 선이다. 동물들은 좀처럼 직진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들은 목적을 위해 수시로 곡선을 버리고 직선을 선택한다. 산이 만든 길이 곡선이라면 인간이 만든 길은 직선이다. 걷다보면 그런 직선의 유혹에 수시로 빠지는 것이 대간산행이다.
중세이전에는 적어도 해 뜨면 들에 나가 일을 하고(日出而作), 해가 지면 들어와서 쉬는(日入而息) 일상의 느림이 있었었으나, 언제부턴가 속도가 효율이 되는 시대로 변했다.
길 위에 바퀴가 출현하고부터 길은 난폭해졌고, 인간은 조급증에 시달리기 시작했다는 것이 사회학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오감(五感)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문명의 발달속도가 빨라지면서 몸이 갖고 있는 그 오감조차 잃어 버렸다는 것이다. 슬픈 일이다.
바쁘다(忙)함은 마음(心)을 잃어버렸다는(亡)뜻이다.
급히 서둘다 보면 마음을 잃게 되고, 그 결과 무의식적인 직관(直觀 intuition)마저 잃게 되었다는 것이다.
밀란 쿤테라는 그의 소설 ‘느림‘에서 ’우리시대는 속도라는 악마의 탐닉에 빠져 너무 쉽게 자신을 망각하고 있다’. 그 속도를 경계했고, 영국 시인 오든도 ‘인간은 조바심 때문에 천국에서 쫓겨났고, 다시는 천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 성급함을 탓하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삶은 직선이 아니라 산길과도 같은 곡선이라야 한다.
서둘면 이루지 못하리라(欲速則不達). 산행도 마찬가지다. 산행에서 속도는 언제나 망각과 비례한다. 걸음걸이가 빠를수록 기억 속에 남아있어야 할 풍경은 쉽게 잊혀지기 때문이다.
시간의 길이와 속도는 기억 속에서 만들어지지만, 시간 속에서 기억과 망각은 공존할 수가 없다. 기억의 끝은 망각의 시작이다. 그러나 망각은 단순한 잊음이 아니라 잘 기억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리고 그 기억 속에 저장할 내용이 적으면 시간도 짧게 느껴진다. 이른바 회상효과(reminiscent effect)다. 때문에 몸이 속도를 쫒다보면 풍경과 기억은 그 만큼 빨리 잊혀 지기 마련이다.
그런 이유로 산행속도는 사람의 발로 가는 속도가 되어야 한다. ‘속도는 풍경을 놓친다’. 산행에선 오래된 격언이다.
그러나 산을 오른다는 것은 그런 기억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혼과의 대화라도 하고 싶다면 그 ‘풍경’조차 욕심 부리지 말라 했다.
길 위에 선 사람은 길을 닮는다 했던가. 산길은 직선이 아니라 술에 취한 듯 굽은 길이니, 자연과 하나가 되는 ‘심장의 속도’로 천천히 걸어 갈 것을 권하고 있다.
지금도 남쪽을 출발한 꽃소식은 하루에 50m씩 고도를 높이고, 거리상으론 22- 25km씩 북상하니 영남에서 서울까지는 대략 보름 정도 걸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름이라면 조선시대 백성들이 영남대로를 걸어 한양에 도착하는 시간과 비슷하다.
그런즉 서둘지 말고 발바닥과 땅이 호흡하며 꽃소식이 전해지는 속도로 걸어가면, 그 걸음걸이가 ‘심장의 속도’가 된다. 그렇게 걸어가며 발생하는 몸의 반복적인 진동(걷기)을 명상(瞑想 mediation)에서는 ‘다리로 하는 기도’라 했다.
인생을 꿈속에서 춤추듯 살았던 장자(莊子)도 ‘대인(聖人)은 발뒤꿈치(踵)로 숨을 쉰다’ 고 했다. 발뒤꿈치로 숨을 쉰다 함은 ‘춤을 춘다‘는 뜻이다.
성인(聖人)이라 함은 하늘의 소리를 듣고(耳), 노래하며(口) 춤추는 사람이니, 그 뜻을 한 번 음미 해 볼만도 하다.
터키 이스탄불에서 중국 시안(西安)에 이르기까지 12,000km 실크로드를 처음으로 종단한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그의 저서 ‘나는 걷는다’에서 올바른 걷기란 자기 신체적인 상태를 고려, 오로지 ‘느림과 침묵’으로 철저히 ‘홀로 걸어 갈 것’을 권하고 있다.
그는 길에서 느낀 ‘고독’은 인간의 사고를 건전하게 함과 동시에 몸까지 건강하게 한다는 얘기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최근 대간종주산행도 느림이 배제된 속도경쟁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점이다.
1984년 여류 산악인 남난희의 태백산맥 종주는 종주기간이 동계임을 감안하여 76일이 걸렸지만, 최근 백두대간 종주 소요 기간은 평균 40-50일 수준이고, 신체가 건강한 사람들은 30-40일이면 끝낸다고 하니, 적어도 ‘느림’을 얘기하고자 하는 산과 산행에 대한 모독(冒瀆)이다.
‘대간꾼들이여- 속도를 탐하지 말지어다’.
진정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길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 직선이든, 곡선이든, 속도는 걷는 즐거움을 앗아간다. 적어도 걷는 것을 즐길 줄 알아야 진정한 대간 꾼이라 할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지구상에서 그 심장의 속도를 초월하여 속도에 집착하는 동물은 인간들뿐이라니, 더욱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홀딱벗고-’‘홀딱벗고’
중식을 끝내고 출발하려하자 오랜만에 상큼한 새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새 이름을 묻자 글쎄- 서로 얼굴만 바라본다. 언젠가 경남 양산 통도사 뒷산인 영취산 샘터에서 만난 스님이 ‘홀딱벗고 새’라며 밝게 웃던 모습이 생각났다.
속설로는 이승에서 중생의 티를 벗어던지라 해서 ‘홀딱벗고 새-’라 불렀다. 그러나 놀러 다니기 좋아하는 묻지마 관광 아줌마들은 ‘좋을씨구 새’로 부른다. 본래 이름은 검은등 뻐꾸기다.
홀딱벗고- 좋을씨구- 듣는 입장에 따라 유쾌한 상상을 하며 파안대소 하니 산행 중 피로가 새처럼 날아간다. 윤지미산을 새처럼 가볍게 넘어섰다.
상주시 내서면에서 보은으로 가는 화령 재까지는 십 여리 길, 한 시간 거리다. 화령재에서 봉황산(745m)을 넘어 목적지 비재까지는 약8km, 남아 있는 거리가 다리를 무겁게 하고 봄빛은 배낭을 잡고 늘어진다.
예로부터 상주와 보은이 만나는 화령은 교통의 요지이며 넓은 지역이다.
신라시대에는 현재 화동 화서 화북 화남등 4개면을 합쳐 화령현이라 했고, 모동 모서면은 중모현이었다. 당시 상주목 아래 화령현과 중모현을 중화(中化)로 불렀으니, 화령의 위치와 지리적 역할이 막중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부터 열려왔던 화령장은 특산물이 없었음에도 ‘다른 곳은 몰라도 화령장은 안다’ 할 정도로 멀리 보은과 상주에서 장꾼들이 몰려들었고, 지금도 3, 8일은 화령장이다.
‘볼 장 다 봤다’는 말이 있다. 장(場)이란 햇볕 잘 드는 너른 마당이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를 의미했다. ‘볼 장 다 봤다’ 함은 장날임에도 볼일을 다 보았으니 장이 끝났다는 얘기다.
그러나 아직 대간길이 남아 있는 우리는 아직 볼 장이 남아있는 셈이다. 길 떠나는 날이 장날이고, 산길은 장터가 될 터이니, 멋진 일 아닌가.
비교적 최근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화령재 정자에 올라 잠시 몸을 쉬었다. 신라시대엔 답달비로 불렸다가 다시 화령군이 된 내력이 편액에 기록되어있다.
이제 상주의 진산으로 알려진 봉황산(745m)으로 올라야 한다. 이번 구간 중 가장 높은 봉우리다. 이조 중종의 태(胎)가 묻혀 있다하여, 태봉산(胎封山)으로도 불리는 산이다. 보은방향으로 500여 미터 국도를 따라 가다 산 밑에서 진입로 시그널을 주의해서 찾아야 한다.
산불감시초소 30분, 정상까지 40분. 작은 안내판이 눈에 띈다.
산은 이미 녹음이 짙을 대로 푸르렀고- 산불감시원이 과연 있을까. 의아심이 꼬리를 물었다. 그러나 예상을 깨고 늙으신 할아버지 한분이 ‘산불조심’ 빨간 모자를 쓰고 혼자 앉아 계셨다.
‘아 - 세상에... 아이고 수고하십니다!’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할아버지는 매일 도시락을 싸들고, 이곳 산 정상 작은 바위로(바위가 사무실 의자요, 책상인 셈이다) 출근을 하고 있었다. 근무지 고도는 해발 540m, 그래서 일까. 노인의 얼굴은 붉다 못해 검붉다. 아무도 보지 않더라도 햇빛 가림막 하나 없는 산꼭대기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산불감시 근무를 하고 계신 할아버지의 모습이 좋은 세상을 만들어 갈 것이라 믿고 싶다.
봉황산 정상에 서니 옅은 안개가 조망을 앗아간다.
멀리 속리산 연봉이 안개 속에 몸을 숨기고, 오른쪽 길 건너 상주 땅엔 견훤산으로 불리는 봉우리가 보인다. 아들에게 갇혀 후백제 건설의 꿈을 접고 생을 마쳐야 했던 비운의 장군, 견훤은 이곳 농바위(籠岩)에서 태어나 전설이 된 인물이다. 내리막길이 계속된다. 속리산이 가까이 왔음이리라. 큰 산 곁에 오니 작은 산은 큰 산을 닮는다. 사람도 그러하다.
멀리 속리산 앞 능선 형제봉위로 넘어가는 일몰이 아늑하게 느껴진다.
오늘 산행 도상거리는 24km, 실거리는 적어도 70여리 길이다.
다소 먼 거리 때문인가. 내 몸임에도 그 몸이 낯설어 진다. 다리는 다리를, 손은 손을 힘들어 한다. 목이 마르다. 몸은 물을 그리워하고 마음은 집이 그리워진다. ‘여우도 굴이 있고 나는 새도 집이 있건만 인자(人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던 예수님도 쉴 곳 없음을 외로워했다.
그러나 몸은 시원한 맥주한잔이 간절하다.
그림은 그리움의 줄임말이다. 글과 그리움의 어원은 같다. 마음속 간절함이 ‘그리움’이요, 그것이 화폭에 옮기면 ‘그림’이 된다. 글이 되었던 그리움이 되 었던 간절해야 좋은 그림이 되고 글이 된다 했던가.
그런 의미에서 살아가는 일이란 어찌 보면 세상과 사람에 대한 향한 간절한 그리움일지도 모른다. 간절히 그리워하라 그러면 이뤄지리라.
하늘을 나는 새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바람처럼 자유롭다는 뜻이리라, 비조령(飛鳥嶺), 그런 그리움을 안고 멀리 날아갈 수 고개였으면 좋으련만......(06. 5. 13일)
흔적을 남기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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