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관형의 '백두대간 그 길을 걷다'

천섬의 종으로도 소리내지 않는 산, (중산리 - 성삼재 1) ( 29.8km )

1, 조관형의 '백두대간 그 길을 걷다'

천섬의 종으로도 소리내지 않는 산


(중산리 - 성삼재 1 ( 29.8km )


 


백두대간(白頭大幹). 백두대간 종주...


백두대간 종주산행 얘기가 나왔을 때, 먼저 지리산(智異山)이 떠올랐다. 몇 날이고 머릿속엔 온통 백두대간과 지리산 생각으로 가득했다.


과연 해낼 수 있을까. 그리고 대간종주를 하기로 결심 한 후 지리산을 조용히 불러보았다.


지리산, 지리산... 그리고 백두대간 종주.....가슴은 설레었다.


그러나 지리산을 오를 때마다 고생이 많이 해서 그런지 지리산에만 들면 왠지 자꾸 작아지고 이상하리만큼 체력적으로도 힘들었다. 그 후론 좀처럼 지리산 등반 얘기를 쉽게 꺼내지 않았으니, 지리산은 내게 오랫동안 힘들고 가까이 하기 힘든 산으로 각인 되어 있었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선생은 노후를 산청 덕산재에 의탁하고 덕산계정 기둥에 새긴 글귀에서 ‘천섬(天石)의 종(鐘)으로도 소리를 내지 않고, 하늘이 울어도 울리지 않는(天鳴猶不鳴)’산이라며 지리산의 장엄함을 경외 시 했었다. 서산대사도 지리산은 장엄하되 빼어나지 않다(智異壯而不秀), 수려하기 보다는 웅장한 산임을 얘기 했다. 지리산은 크고 웅장하다.


그 둘레만도 800여리요, 3개도와 5개 시군에 걸쳐있는 면적 만 해도 1억3천 만평이나 되는 거대한 산의 나라(山國)이다. 1천 미터가 넘는 봉우리만도 20여개요, 그 산속에 안긴 암자 만 해도 400여 곳이 된다.


산악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그 깊은 산자락에 안겨보고 싶은 어머니 품과도 같은 산이 지리산이다.


녹음이 짙어지기 시작한 6월초, 우리는 그 큰 산 아래 엎드려 감히 백두대간 종주산행을 허락해 달라는 발원을 했다. 대간 종주를 시작한 것이다.


頭流山神 地風雪神 伏以


尊神 今爲 大幹山行 保佑四時 三災不入 享受平康 祈願 伏推......


지리산신 지풍설신이시여 대간산행을 보살피시어 재앙을 막아주시고 평안한 산행을 누릴 수 있기를 엎드려 비옵나이다.


중산리를 떠나 장터목 갈림길, 칼바위 아래서 산신제를 올렸다.


무릎을 꿇고 머릴 숙여 발원을 했다. 그리고 음복(飮福)을 하는 것으로 대간이 끝날 때 까지, 낮은 자세로 세상을 바라보고 걸음걸이조차 조심하자는 다짐을 했다.


산그늘이 짙어지니 숲속은 벌써 한 여름이다.


중산리에 서니 천왕봉까지는 5km, 족히 서너 시간이 소요되는 오르막 코스다.


벌써 십오 년 전 인가.


적어도 3대 공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지리산 일출을 보기위해 법계사 근처에서 야영을 했었다. 이튿날 새벽 3시나 되었을까. 귓가를 쿵쿵 울리는 발자욱 소리에 눈을 뜨고 일어나 천왕봉 쪽을 바라보니 정상까지 등산객 후라쉬 불빛이 초파일 연등행렬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산 정상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던 한 밤의 연등행렬, 기억이 새롭다.


오늘도 대피소에서 식수를 보충하고 올려다보니, 정상까지 알록달록한 등산객 행렬이 마치 15년 전에 보았던 연등행렬을 연상케 하는 꽃등행렬이다.


‘이 땅에서 산이란 과연 무엇인가-'


무슨 이유로 이렇게 더운 여름날, 저 많은 사람들이 기를 쓰고 정상을 오르려 하는가. 그렇게 꼭 올라야만 했는가, 마치 남의 일처럼 묻고 싶어졌다.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산 208번지’


함양군에서 보면 마천면 추성리 산 300번지다. 남한 땅에서 한라산 다음으로 높은 천왕봉(1,915m)이 탐을 냈는지, 함양이나 산청 사람들 모두 천왕봉을 자기네 주소로 등재한 것이다.


6월 초라 해도 여름은 이미 달아오를 만큼 익었고, 길이란 길은 모두 덥혀졌다. 정상까지 오르막은 숨 돌릴 틈조차 주질 않는다. 빈틈이 없다함은 몸 하나 잠시 숨길 그늘이 없다 함과도 같다. 비 오듯 떨어지는 땀방울이 등산화 콧등을 적신다. 발길마다 밟힌 더위가 길에 널려있다. 실로 대단한 더위다. 대간은 출발부터 혹독한 신고식을 하란다.


지리산의 또 다른 지명은 불복산(不服山)이다.


왕이 되려는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 와서 소지(燒紙)를 올렸으나, 타오르지 않고 배척까지 당했던 고집스런 산이다.


그래서 일까. 천왕봉은 쉽게 입산을 허락 하질 않는다. 가진 것이라곤 땀 밖에 없으니 3시간 이상 땀방울로 입산 턱을 내고나니 정상은 비좁은 틈을 내어준다. 하늘은 푸르고 맑았다. 조망은 깊고도 깊게 느껴졌다.


정상에는 지리산이 적어도 이 땅의 기상임을 알리고 있었다. ‘한국인의 기상, 이곳에서 발원하다’ 그래서인지 지리산은 기(氣)가 센, 자존심이 강한 산이 되었는가.


지리산은 지혜(智慧)로운 이인(異人)이 많은 산이라 했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들어와도 지혜롭게 모두를 품어 준다는 지리산, 누구는 사람을 살리는 산(活人山)이라 했고, 또 다른 이름은 백두산에서 시작된 맥이 흘러 이곳에 모여 솟구쳤으니 두류산(頭流山)이요, 어떤 이는 방장산(方丈山)의 삼신산(三神山)으로도 불렀다.


적어도 왕정시대엔 고통 받는 백성들 편에 섰던 의적들이 숨어들었고,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분단시대에는, 항일투쟁과 빨치산의 활동거점이 되었다는 이유로 적구산(赤拘山)으로 불리기도 했던 산이다.


 




산과 하늘의 경계가 없어진 무심의 산. 지리산


개인적으로는 천왕봉을 10여 차례 이상 올랐었지만, 아직도 제대로 된 일출을 본 적은 없다. 늘 욕심이 앞섰는지, 적선(積善)이 부족했던지, 그리고 이번에는 시간이 허락하질 않는다.


지리10경중 제1경에 해당하는 천왕봉 일출은, 그 장엄함이야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장관일 텐데 오늘도 볼 수가 없으니 아쉽다.


다만 억겁의 세월을 견딘 산은 산을 불러오고, 끝내 하늘과 맞닿은 곳엔 산이 하늘이요, 하늘이 산이니 생과 사의 경계가 따로 없다. 천왕봉은 끝내 하늘과 한 몸이 된 모습이다.


그렇게 천왕봉과 하늘이 하나가 되었듯 지리산을 좋아한 나머지 노후를 고향인 함양 덕산에 의탁한 남명(南冥) 조식(曹植)선생은 천왕봉 오르내리길 십 여 년, 그 지리산 산행기록을 글로 남겼으니 지리산의 다른 이름, 유두류록(遊頭流錄)이다.


‘경상좌도에 퇴계(退溪)가 있다면 우도(右道)엔 남명(南冥)이 있다‘


남명과 퇴계는 성리학을 대표하는 양대 거유(巨儒)로 남명의 고향은 함양이요, 퇴계는 안동으로 같은 해에 태어났으나, 만난 적은 없고 다만 서신을 주고받는 교유를 했을 뿐이다.


유독 청량산을 좋아했던 퇴계는 ‘차마 세상에 알려질까 두렵다’는 그 산으로 들어가 청량산인(淸涼山人)이 되었고, 평소 자신을 일깨우겠다는 뜻으로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을 몸에 달고 다녔다는, 남명은 노후에 덕산으로 들어 와 지리산을 마당으로 들어앉힌 산천재(山川齋)에 몸을 의탁하고 천왕봉 오르내리기를 12년, 마침내 그는 산과 하늘이 경계를 허물고 하나가 되었듯 천왕봉과 하나가 되어 지리산인(智異山人)되었다.


남명은 재야사림으로 유일하게 지리산을 몸으로 익힌 처사(處士)였다.


천왕봉에서 지리산 주능선의 끝인 노고단까지 도상거리는 25.5km, 곧바로 통천문(通天門)을 지나 제석봉까지는 1시간 거리요, 북쪽 계곡은 ‘선녀와 나뭇꾼’의 얘기가 나뭇꾼 대신 연심을 품은 곰과 자기 뿔에 걸린 옷을 가져다준 사향노루의 전설이 남아있는 칠선계곡으로 설악산 천불동 계곡, 한라산 탐라계곡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명승계곡이다.


적어도 100여개나 되는 담(潭)과 소(沼)로 지리산 ‘최후의 원시림지대’로 알려진 계곡이요, 그 길이만도 무려 10여 km가 넘는다.


‘하늘과 통한다’는 통천문(通天門)을 지나니 널따란 평원과 함께 고사목 군락지, 제석봉(帝釋峰,1806M)이다. 제석봉은 천둥과 번개를 관장하는 신께 제사를 올리던 곳이다.


기록상으론 60년대 구상나무 무단벌채로 빗어진 풍경인데 언제 보아도 아쉬움이 앞선다.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살았던 호양나무는 죽어서도 3000년을 산다는데 이곳 고사목은 얼마나 더 견디어 낼까.


그러나 최근 20-30년 사이 상당히 많은 개체수가 사라진 것 같다.


장터목(場基頂,1750m)은 천왕봉 북쪽 마천사람들과 남쪽 시천 사람들이 봄, 가을로 만나 생필품을 교환하던 장터다. 이젠 반듯한 목조건물 산장까지, 말 그대로 구색을 갖춘 셈이다.


이곳에서 주능선 북쪽으로 넘어서면 깊은 계곡으로 안개가 자욱하니 백무동(白霧洞), 또는 천왕봉 성모여신을 모셨다는 무당이 100명이나 있었다 하여 백무동(百巫洞)이라 불렸지만, 행정구역으로는 경남 함안군 마천면 백무동(白武洞)이다. 무슨 이유에선지 백무동 지명의 전설만 구전되었을 뿐이다.


벌써 20년 전 쯤 되었는가.


큰아들과 지리남부능선 종주를 위해 이곳 장터목 산장에서 1박을 했을 때 일이다.


5월 초순으로 기억되는데, 갑자기 추워진 날씨 탓으로 야영하던 등산객들이 한꺼번에 몰려드니 산장엔 발 디딜 틈 없이 비좁았다.


‘발 디딜 틈이 없다’ 함은, 말 그대로 벗어놓은 신발위에 또 신발이 겹겹으로 쌓인 상태를 말했다. 그리고 밤 9시경, 군대로 말하면 주번사관 쯤 되는 관리인이 들어와 모두를 침상 위 3열로 세운 다음, ‘그대로 앉으세요.-’ 하고는 ‘그냥 앉은 상태로 취침’하란다. 분위기가 군대보다 더했다.


엊저녁 앉을 때는 분명 누울 자리가 단 하나도 없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모두들 누워 자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좀처럼 찾기 힘들거라고 생각했던 뒤엉킨 신발들도 아침이 되니 모두 하나씩 제 짝을 찾아 나갔다.


그 동안 살아가는 일이 힘들 때마다 장터목 하룻밤이 생각나곤 했다. 가끔 아들 녀석도 신기한 듯 곧잘 장터목 얘기를 꺼냈다. 손자를 통해 그 얘기를 들은 어머님께선 혼잣말로 중얼거리듯 우릴 위로 했었다.


‘사람은 본래 누울 자리는 받고 먹을 것은 지고라도 태어난다 했으니 먹고 사는 일 갖고 넘 염려 말거라’.


명(命)을 받기 힘들어서 그렇지, 태어났으면 다 살아가게 되어있단다. 그래서 아들을 다섯씩이나 낳으셨어요? 묻고 싶었지만 태어나는 것은 사람일이 아니라 삼신할머니께서 오래 전부터 점지해주신 일이라는 평소 어머님 말씀이 생각나서 캐물을 수도 없었다.






세석철쭉은 화려한 유혹이 아니다 그냥 담백한 모습이다


연하선경(煙霞仙境)으로 알려진 연하봉(1,652m)과 세석철쭉 풍광이 아름답게 조망되는 촛대봉(1,704m)에 올라 바라보니, 우선 시원하다. 그 면적만도 30여만 평이나 되는 세석평전(細石平田. 잔돌평전)이 답답했던 가슴을 탁 열어준다.


세석평전은 드넓은 청량감과 은은한 철쭉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러나 이곳 세석에도 애처로운 사연이 철쭉을 꽃피우게 했으니, 이른바 연진(蓮眞)과 호야(乎也)의 전설이다.


세석아래 대성골에서 세상 부러울 것이 없이 살던 부부는 아들이 없음을 알고, 영신봉 음양수 샘물을 마시고 산신께 빌면 아들을 점지해준다는 곰의 말을 믿고 기도를 시작한다.


그러나 이를 눈치 챈 호랑이의 고자질로 산신령은 곰을 토굴 속에 가두었고 산신의 노여움을 산 연진은 남편과 생이별을 한 채 세석고원에서 평생 철쭉을 가꾸고 살아야 하는 벌을 받았다.


여인은 촛대봉에 올라 천왕산신께 빌다 돌이 되었고, 낭군인 호야는 칠선봉에서 세석으로 가려다 산신의 제지를 받고 가파른 절벽에 올라 연진의 이름을 애절하게 불렀단다.


이곳 철쭉은 연진의 애처로운 모습을 닮았는지 그 색깔조차 강렬하지 않다. 종족보존을 위해선 향기도, 색깔도 짙어야함에도 ‘천박하게 어디대고 눈꼬리냐 -’ 아직도 지리산신의 눈치를 보고 있는지 언제나 옅은 분홍빛이다.


그것이 세석철쭉의 매력이다.


세석평전 들머리에서 삼신봉(1,354m)을 경유 쌍계사로 이어지는 코스는 무려8-9시간이 소요되는 장쾌한 능선이다. 문득 하염없이 산을 걷고 싶을 때 누구든지 한번 걸어보라 권하고 싶은 능선길이다.


삼신봉에서 남쪽으로 내려서면 신선들이 살았다는 전설적인 청학동(靑鶴洞)이요, 오른쪽 아래는 이 땅의 불자들이 지리산에서 가장 가고 싶어 하는 불일암(佛日菴)과 불일폭포가 있는 계곡으로 이어진다.


쌍계(雙磎)라는 지명은 반야봉 쪽에서 흐르는 화계천 본류와 쌍계천이 합쳐져 얻어진 지명이며 최치원이 지팡이로 새겼다는 쌍계(雙磎)와 석문(石門)을 지나면 물줄기가 다시 합쳐지니 이른바 겹쌍계를 이룬 셈이다.


그리고 쌍계사는 작설차의 본향(本鄕)이다. 유독 차를 좋아했던 추사 김정희도 다향(茶香) 가득한 쌍계사에 들러 대웅전의 현판(世界一花祖宗六葉) 글씨를 남겼으며, 신라 고운 최치원도 젊은 날, 이곳에 머물며 공부를 하고 대웅전 석축 앞에 진감국사비 비문을 남기기도 했다.


그리고 청학동은 예로부터 이상향으로 남아있는 삼재불입지지(三災不入之地)로 알려진 곳이다. 擇里志를 쓴 실학자 이중환도 ‘청학동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어느 곳 인지는 몰랐으며, 안다 해도 널리 알리지 말라’. 청학동을 지리산 남쪽기슭 푸른빛 선학(仙鶴)이 살고 있는 이상향으로 지목했었다.


‘어리석은 자, 의심 많은 자, 지혜 없는 자. 복이 없는 자는 들어가지 못하고 선덕(善德)을 쌓은 사람이 아니면 어찌 이 산을 들어가겠는가.’


하물며 우리 같은 중생들에겐 언감생심(焉感生心)이 된 선계(仙界)다.


조선 영조 때 실학자 여암 신경준은 산세도 물길을 따라 흘러간다 했던가. 세석평전 위 영신봉(1,692m)은 낙동강을 따라 김해 신어산까지 이어지는 낙동강 남쪽 길 550여리, 낙남정맥의 기점이 되는 봉우리다.


칠선봉(1,576m)을 넘어 덕평봉(1,522m)아래 지리산에서 물맛이 가장 좋다는 선비샘에서 식수를 보충했다. 오늘 숙박예정지 벽소령까지는 불과 1시간 거리, 남은 거리를 고려해도 하늘은 여유가 많았고 발걸음도 가벼웠다.


적어도 2시간이상 산행거리를 줄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니, 숙박지를 연하천 산장으로 변경하자는 의견들이다.


벽소령(碧霄嶺) 명월(明月)이라, 누구든지 이곳을 오르려면 달 밝은 밤에 다녀가라 했다. 휘영청 보름달이 떠오르면 교교한 달빛이 희다 못해 푸르게 되니, 벽소령은 달빛도, 계곡도 푸르게 되어 벽소(碧霄)라, ‘달빛이 깊고 푸른 밤‘이 되었으니, 지리 10경중 5경에 해당되는 절경이다.


연하천 산장으로 숙박지를 변경하고 형제봉(1,433m)으로 올랐다. 평소 단련을 했음에도 힘에 겨워선지, 갑자기 몸이 허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순간 단 한 발자국도 옮길 수 없이 그냥 바위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이런 경우는 없었는데... 물을 마시고 남아있는 간식을 입에 넣고 나니, 그제 서야 멀리 발아래 대성골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럴 때 시골 어른들은 ‘헛것’을 본 것이라고 했다.


정말 헛것을 본 것일까. 그리고 조금 전 넘어왔던 피의 능선과 대성골 의신계곡에서 죽기 살기로 도망치던 빨치산들이 느꼈던 배고픔도 이와 같았을까. 그들은 극심한 졸음과 배고픔으로 잠시 쉬는 동안 저절로 눈이 감기면서 깨어나지 못하고 곧바로 죽음이 된 경우도 허다했다.


어찌 배고픔뿐이랴. 지리산은 이 땅에서 가장 비극적인 상처를 모두 겪은 산이다. 동학혁명을 시작으로 항일투쟁, 그리고 6,25전쟁과 여순반란사건까지 피를 나눈 형제간에도 총부리를 겨누어야 했던 역사적인 비극이 골짜기마다 겹겹이 널려있는 산이다. 그런 흔적을 온몸으로 마주한 시인 김지하는 끊는 가슴으로 지리산을 노래하기도 했다.


‘눈 쌓인 산을 보면 / 피가 끊는다 / 푸른 저 대숲을 보면 / 노여움이 불 붙 는다 / 저 대 밑에 / 저 산 밑에 / 지금도 흐를 붉은 / 지금도 저 벌판 / 저 산맥 굽이굽이 / 가득히 흘러 울부짖는 깃발이여 / (중 략) / 아아 지금도 살아서 내 마음에 굽이친다 / 지리산이여 / 지리산이여‘ (김지하 詩, 지리산 부분)


그리고 벽소령 아래쪽 의신계곡 빗점골 배나무평전은 빨치산 사령관 이현상(李鉉相)이 마지막까지 저항하며 숨어있던 비트가 남아있는 계곡이다.


한국의 ‘체게베라‘로 불렸던 이현상은 중앙고보 재학 시 순종 장례식 때 일어난 6.10만세 항일운동 주동자로 옥고를 치룬 혁명적 기질의 전사였다.


그는 1948년 10월 여순반란사건 후 잔존 반란군 400여명을 이끌고 지리산으로 들어와 빨치산 총사령관으로, 거의 6년 이상 목숨을 건 투쟁을 벌인 최후의 ’파르티잔(partizan)'이었다.


‘이현상을 잡지 않고는 지리산 빨치산을 토벌했다고 할 수 없다’


그런 이유 때문인가. 이승만 대통령조차 별도의 현상금을 내걸었으며, 소설가 이병주의 장편소설 ‘지리산’에도 등장했고, 조정래의 ‘태백산맥’에서는 신비롭고 영웅적인 인물로, 이태의 ‘남부군’은 이현상이 창설한 직속부대의 체험적 소설이었으니, 적어도 지리산 빨치산들에게 이현상은 가히 전설적인 존재, ‘선생님’으로 불리었다.


그리고 이듬해 1953년 9월 18일 주력부대를 잃고 내몰리던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은 이곳 의신계곡 빗점골에서 최후를 맞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현상의 최후에는 아직도 많은 의문점을 남기고 있다.


군경토벌대에 의해 총살되었다는 기록과는 달리 북에서 은밀히 보낸 첩자에 의해 암살되었다는 설(이는 평양의 열사능 묘비에 새겨진 사망일이 9월17일로 토벌대발표와는 다르게 되어 있음)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51년 11월 하순부터 시작된 토벌작전 중, 특히 1952년 1월 9일 대성골에서 감행된 수도사단의 ‘백야전 사령부 3기 토벌작전’은 지리산 전투 중 가장 치열했으며, 빨치산 주력부대가 절멸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역사적으로는 임진왜란 때 부터 갈 곳 없이 이리저리 내몰리던 가난한 백성들이 숨어들기 시작한 대성골 의신계곡은, 이상하리만큼 근세 일어난 동학민란이나 여순반란사건, 그리고 빨치산 투쟁까지, 모든 전투의 최후 격전지가 된 곳이다.


그렇다면 ‘최후의 격전지 대성골 의신계곡’ 그건 무슨 또 의미인가.


조선 중기 문인 소세양은 산과 물은 천지간에 무정하므로 반드시 사람을 만나야 드러나게 된다 했는데, 대성골에서 벌어진 비극은 분명 사람이 저지른 일임에도 모를 일이다. 사람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의신계곡은 저간의 사정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지리산은 말이 없다. 아니 말을 잃은 것 일게다.



  글, 사진/ 조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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