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금 주전자

황금 주전자
-박 장 희-
속 비우고
엎어져
거꾸로 매달리길
잘했다 잘했어
닫혔다 열렸다 할 일 없고
이리저리 돌리고 돌 일 없고
더 이상 쭈그러질 일 없고
기웃기웃 기웃거릴 일 없고
출렁출렁 쏟아질 일 없고
이 손 저 손 손때 묻을 일 없고
더 이상 담아놓고 혼자 속 끓일 일 없고
할 일은 오직
이것저것 모두 다 잊고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모두모두 비워내고
새로운 바닥
하늘방석에 엉덩이 붙이고
참선하는 것이었다
그때
오늘과 내일이 손잡고
비운 속으로 미래의 충만이
우우 차오르는 것이었다
- 귀원 박장희시인 프로필-
*울산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전공 문학석사
*문수학당 5년 漢文 修學
*한국은행 대구지점 4년 근무
*국제펜클럽, 한국문협·울산문협·울산시협 부회장
*시집『폭포에는 신화가 있네』『황금주전자』외 공저 다수
*2008년 올해의 작품상 수상-울산문인협회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및 울산광역시 문예진흥기금 2010년 선정 수혜
*2010년 샤르트르 문학상 대상 수상
*울산문학 편집주간
『황금 주전자』 해설
윤리적 실존의 형상화 방법으로서의 시
양왕용(시인, 부산대 명예교수)
이 작품에서 주점 그것도 막걸리를 주로 파는 서민들이 애용하는 주점의 주전자를 ‘황금 주전자’로 명명한 것은 다분히 역설적 표현이다. 주전자도 재질과 용도에 따라 여러 가지 종류가 있을 수 있다. 고급 일식집의 주전자는 주로 정종을 채우는 것으로 스테인리스로 만들어 은빛을 뽐내는 것도 있고 도자기로 만든 것도 있다. 만약에 일식집에서 황금빛으로 빛나는 주전자일 경우에 대단히 고급스럽게 금도금된 것일 수도 있다. 우선 제목으로 연상되는 것은 고급스럽고 귀족적인 주전자다. 그러나 둘째 연에서의 문맥적 의미만 파악하여 보면 그 연상이 빗나간 것을 당장 알게 될 것이다. 그 주전자는 앞에서 지적한 대로 주점 그것도 선술집에서 막걸리를 담아 손님들 사이로 오가면서 쭈그러질 수도 있는 얇고 가벼운 재질의 금속에다 금빛 도금을 한 주전자이다. 이런 점에서 일차적으로 역설적 효과를 거두고 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전개되는 시적 상황은 이러한 주전자가 아니라 첫째 연에서처럼 사용되다가 속을 비우고 술집 주방이나 가게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주전자가 인식의 대상이 되고 있다. 말하자면 술 주전자로서 가게 주인에게 돈을 벌게 해주는 주전자가 아니라 그러한 삶의 현장에서 비켜나 있는 주전자인 것이다. 둘째 연에서는 그동안 주전자가 겪어 온 삶의 현장을 열거하면서 그러한 현장에서 비켜나 있음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즉 여닫거나, 돌려지거나, 더 이상 쭈그러지거나, 기울이거나, 술이 쏟아지거나, 손때 묻히거나 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거꾸로 매달려 있다는 것이 단순하게 주전자에게만 미치는 의미 영역이 될 수 없다는 징후가 둘째 연의 마지막 행 “더 이상 담아놓고 혼자 속 끓일 일 없고”에서 넌지시 암시되다가, 셋째 연에서 버림의 미학으로 우리의 삶에 비유된다. 시간도 버리고, 세속에서의 성공이나 명예, 물질과 같은 헛된 욕망에서 해방되는 삶이 진정한 삶인 것이다.
박 시인의 이 작품 하나만 보아도 여유롭고 달관한 태도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여유로운 태도가 현실도피나 허무의식에서 온 것이 아니라 비움에서 오히려 미래에 대한 낙관적 전망이나 충만함이 비롯된다는 것을 마지막 넷째 연에서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아마 이러한 여유로움은 그가 가지고 있는 신앙, 즉 불교적 태도와 상상력의 소산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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